다시 보는 히브리서(15) (히10:19~39)

2019. 2. 3(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초등3부 얘기를 한 번 더 하겠다. 초등2부 아이들과 초등3부 아이들은 단순히 나이나 학년이 2년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덩치도 엄청 차이 나고 생각이나 능력도 큰 차이가 난다. 특히 6학년들은 남자 큰 아이는 성인만큼 크고 여자 큰 아이는 숙녀만큼이나 크다.

(2) 그러나 예배시간은 조금 산만하다. 떠드는 아이, 장난치는 아이,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 게임하는 아이, 그리고 화장실 다녀오는 아이 등이다. 물론 기회가 닿는 대로 예배 전에 화장실 다녀오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다. 특히 남자 애들은 예배 중 자연스럽게 일어나 물을 먹으러 간다거나 화장실 간다고 간다.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산만한 동작은 주의를 주지만 물을 먹거나 화장실 가는 것을 뭐라고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배는 많이 산만해진다.

(3) 초등3부에는 조금 보수적인 선생님들이 많다. (나도 그 중 하나이다.)예배를 어렸을 때부터 라도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니 1시간 예배 중에 차례로 7~8명이 움직여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고쳐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어떻게? 우선은 예배 시작 전에 광고 방송을 꼭 해서 화장실이나 물을 먹게 하도록 했다.

그래도 나가는 애는 어떻게 할까?

여기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박목사님께서는 주일학교 아이들에 대해서 교사들이 많이 기다려 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씨를 뿌렸으니 싹이 트고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뭐 부인 할 수 없다.

미국 초등학교 애들은 어떤가?

예배 전 장난치고 노는 건 우리 애들보다도 더 심하다. 그러나 신기한 건 예배가 시작되면 정확히 정좌하고 단정히 예배를 본다.
(20세기까지 미국은 그랬지만 21세기에는 안 그렇다고 하시고 싶은가? 하긴 내가 미국에 다녀온 건 1994년의 일이니까.)

(4) 교사들이 깊이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은 차례가 되어 우리에게 온 아이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지압을 좀 살살 해야겠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히브리서 10장 26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한 번 긴장하게 한다. 예수 믿는 거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데 성경에는 이렇게 중간 중간 경고가 나온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에서도 이 경고를 만났었다. 이런 경고는 히브리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모독죄, 용서받지 못하는 죄 중의 하나로 히브리서 6장과 10장이 인용되는데 여기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히브리서가 우리를 꾸중하고 격려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간다는 복음의 내용은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믿은 후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사이에 중간 시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죽음으로 끝나는 한 인생의 끝까지 시간을 가진다. 예수 믿고 삶을 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2) 이 시간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히브리서이다. 왜 이러한 질문은 야기되는가? 예수 믿고 헌신과 진심을 바치는 데도 기대한 것과 같은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다, 는 것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인데 고난은 잘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징벌인가? 심판인가? 그럼 잘하면 형통하냐?, 하는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천국에 당장 붙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대적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 같이, 신자의 신앙생활은 외적으로도 고난이 임하고 내적으로도 고난이 있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나. 본론

(1) (롬7:15~25) 여기 24절의 고백은 역사 내내 인류의 고백이었다. 선악을 구별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아는데 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이 비명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나는 죄만 짓는가? 선을 행하는 것은 어쩌다 한 번 이고 못된 짓은 안하려고 하는데도 되는가? 이 비명에 대하여 답이 예수로 주어진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24절에서 나는 왜 죄밖에 짓지 못하는가라고 비명을 지르자 25절은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답을 했고 그 답은 분명히 24절의 질문에 어떤 해답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계속되는 25절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 비명과 어떤 갈망에 예수가 답이 되었으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는 죄의 문제가 없어지고, 나는 선한 생각과 결정만을 하게 되었다, 라고 말해야 맞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죄의 법이 남아 있고 죄의 힘이 약화된 것 같지는 않다. 선을 향한 의식과 소원은 더 커진 것이 사실인데, 신자답게 살겠다는 의욕과 명분이 강화되자 죄도 더 강화되어서 우리의 비명은 옛날 보다 더 처절해졌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저도 겪고 있는 일이고 여러분의 표정을 보면 안다. 여러분은 시원한 표정으로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다.

(2)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옛 언약이 효력이 없으므로 내가 너희와 새로운 언약을 만들어 내가 너희에게 목적한 것으로 꼭 승리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다른 것은, 새 언약은 내가 너희 마음에 약속을 심고 너희 머리에 두리라 라고 하는 것이 다르다.

새 언약이 들어와서 옛 언약이 하지 못했던 죄와 사망을 몰아내고, 이것만 남기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환경에서 보듯이 예수를 믿으면 천국으로 간다가 되지 못하고,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이 권력을 잡고 있는 세상에서 넘겨져서 예수를 믿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진 새 언약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거룩하고 권능에 찬 약속이, 우리 속에 들어와 사망 권세와 맞서서 겨우 한 자리를 차지한 것 같이 보인다. 여기서 갈등이 안 생길 수는 없다.

하나님 왜 이 갈등과 실패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구원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질문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막연히 십자가로 인하여 더 이상의 실패와 갈등은 없다고 보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기에 스스로를 괴롭힌다.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울고 금식하고 자학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를 몰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괜찮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길 것이다. (8장1절)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들어와 죄와 사망의 법이 만들어낸 결과를 이겨낼 것이다, 라고 한다.

죄를 소멸하고 해소하고 쫓아내지 않고, 그 둘 사이의 갈등이 끝이 아니라, 오호라 라는 절규가 비극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롬8:12~17) 이 구절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다. 그런데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너희는 무서워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네 아버지인 것을 기억해야 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 것이 현실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면 우리가 그 사실을 굳이 기억해 내야할 필요가 없다. 그 사실을 누리면 된다. 그 경우엔 갈등이 없고 공포와 의심이 없어야 된다.

그러나 기억하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신앙현실이 애매하고, 두렵고, 아닌 것 같고, 망할 것 같으니까, 오히려 이러한 현실이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준,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준, 기회이며 시간과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은 성령이 약속한 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자주 걱정 말라고 한다. 왜 그럴까? 결과가 아직 안 나와 있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왔다면 걱정 말라는 격려는 필요 없다.(롬8:26~39) 우리가 못났기 때문에 성령은 탄식하며 기도한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편들고, 이 어려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보여 지는 증상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를 믿으면 시원하거나 형통해지지 않는다. 잠깐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게 뭔가 싶고 그것이 정상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 과정이 무엇을 만들고,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가를 모르면, 체념을 하게 되고 포기를 하기 때문이다.

잘잘못이라는 것이 개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에 걸쳐 그를 훈련시켜 앞으로 밀고 나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잘못된 것마저도 일을 한다는 것이다.

(28절) 실패도 못난 것도 일을 한다는 것이다.

(29절~30절) 하나님 자녀들의 운명은 예수 안에서 완료되어 있다는 것이다. 승리와 영광이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미리 아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선지적 완료라고 한다. 지금은 완료되지 않았지만 이 운명으로 가고야 말 것이다.

결국 헤매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 시간도 일을 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더 적극적인 생각과 이해를 가져라, 라고 말한다.

(31절~34절)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늘 보좌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그 예수를 보내신 이가 우리 아버지이시다. 성경은 왜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가?

지금은 격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닌가 보다 하지만, 자신이 없지만, 성경은 너는 이걸로 끝이 아니라고 한다.

(33절~37절) 36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편한 인생은 없고 마음에 확신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도살당할 양처럼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38절) 여러분은 어디까지 내려가 보았는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나락에, 타협할 수 없는 원망에, 분노에, 절망에, 비참함에, 부끄러움에 내려와 보았는가? 성경은 여기에다가 말하고 있다.

(3) 하나님은 왜 이런 것을 요구하실까?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우리를 부르신 제자도는 이렇게 되어 있다.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진심과 열심으로만 받아들인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네 이해와 능력 밖에까지 쫓아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잘 납득하지 못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과 경우를 육체로 따라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무엇을 하고 가셨는가?

문둥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며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지만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하신다. 우리를 부르신 복된 기회라고 하신다.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예수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주지 않았다. (행4:12)

이 고백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듯이,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 인생의 말 못할 극한의 정황들을 거쳐서 완성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우리의 실력이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잘잘못이라는 것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매 경우마다 후회가 따라온다. 잘못하고도 벌 받아 죽지 않고 잘못하고도 살아났기 때문에 민망하게 된다.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뭐야? 나는 왜 이래? 이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네가 봐. 네
실력이 무언지 진실을 봐, 그게 뭐야? 거기에 무슨 명예가 있어? 거기 무슨 가치가 있어?

이게 우리 인생 내내 벌어지는 일 아닌가? 잘한 일은 없으니까 생각할 틈도 없다. 여러분은 편안하면 존다. 새벽기도에 와 보았는가? 거기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온다. 편안한 사람은 안 온다. 편안한 사람 중엔 딱 이런 사람만 온다. 미국 갔다 왔는데 시차가 적응이 안돼서, 깨어 있느니 기도나 하자고 온다.

이런 곤궁함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는가? 내가 기대하는 만큼도 안 되는 것인가? 내가 최선을 다 했는데도 하나님은 왜 뒤집어 놓으셨는지? 십자가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몸에 지닌 사람만이 오게 된다. 이게 우리 인생의 전체이다. 하나님은 끝없이 이 일을 하신다.

(갈5:16~17) 우리가 좋은 일을 생각하면 꼭 따라 들어오는 것이 있다. 그런 시험 중 무서운 것이 이것이다.
“잘난 척하지마. 가만히 있어.”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게 된다.

우리는 선한 일을 선택하기도 어려운데 선택해서 하면 육체의 욕심이 꼭 딴죽을 건다. “네가 뭐라고 나서.” 그래서 우리는 죄나 안 짓고 있는 게 전부인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가 감사와 기쁨이 없다. 여러분을 야단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왜 겁을 먹고 있는지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 일을 시도도 못하게 시험받고 있다. 위대하게는 못한다. 훌륭하게도 못한다. 가장 작은 것 하나를 하라.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성령과 육체의 욕심사이에 충돌이 있다. 여기서 선을 행하겠습니다, 라는 자발적인 실력이 생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살리는 길이다.

(4) 예수님의 생애를 보자 그가 그 모든 권능을 가지고도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비켜 주시옵소서”

정직한 기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원하여 아버지의 뜻을 좇는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자 이렇게 말씀 하신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12개의 사단 병력을 보내주실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되겠느냐?”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로 구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값을 주고 채우는 일이다. 즉, 탕자의 비유이다. 부흥시대에는 설교가 회개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까지만 왔다. 그러나 이제는 큰 아들 얘기가 나온다. 큰 아들은 왜 등장할까? 작은 아들은 이 비유 속에서는 거지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에게 내침을 당해 방황하다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요, 아들로서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큰 아들은 화가 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은 이랬다.

너는 네가 맡은 일이 얼마나 굉장한지 모르겠느냐? 너는 내 아들 교육을 받고 있지 않느냐? 네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그 일이 무언지 아느냐? 창조 세계를 나와 다스리고 있는 일이란다.

욥기도 이와 같았다. 욥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친구들은 와서, 네가 범죄해서 벌을 받는 것이니 회개하라고 한다.

아니다. 나는 그건 모르겠다. 하나님 설명 좀 해주세요.

하나님은 설명 대신 창조세계를 보이신다. 나는 창조의 하나님이다. 인과율의 영역을 벗어난다. 너는 네가 억울하다고 나에게 항의 하느냐? 네가 억울한 바로 그 원칙, 무에서 유를 만들며 죽은 자를 살리는 창조의 세계에 내가 너를 부르고, 너를 요구한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욥은 회개한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 최악의 경우도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고 외면될 수 없다. 최악의 조건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다. 결어

나는 내 조건 내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이 선택과 이 기회를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여러분 하나의 씨름이 여러분 하나에 그치지 않고, 여러분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과 권능과 기적과,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에필로그

(1)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일까? 누가라는 학자도 있고 바울이라는 학자도 있으며 혹은 부르스길라 라는 학자도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바울에게 한 표 던진다. 문체로만 보면 다른 바울 서신과 확연히 달라서 바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의 정연함이나 구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면 자꾸 바울 아니고서야 누가 저렇게 쓰겠어, 하는 생각이 든다.

(2) 바울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직접 바울을 일꾼으로 택하신 이유는 바울이 잘 못은 있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가문에서 공부 잘 하고 잘 성장했으며 열정도 남다르니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고려하셔서 바울을 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3) 딤전1:15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 겸손이었을까? 물론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것은 진실이었다. 바울은 평생 스데반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지 못했다. 비록 그가 알지 못했을 때의 일이지만 그것이 스데반을 죽인 그의 죄를 덮지는 못한다. 그는 스데반이 죽는 현장에 있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설교했던 성전 내에도 있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은 것도 보았다. 그러나 바울의 선택은 자기가 옳고 스데반이 틀렸으며 자기와 스데반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스데반을 죽였다.

(4) 예수께서 바울을 택하신 이유는 정말 모른다. 사람이 했다면 당연히 극적인 반전을 노렸다고 했을 것이다. 박목사님의 설교에서 어느 정도 답이 된다. 바울은 평생 스데반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살았고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누가 살인자라는 죄명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니 바울은 진정으로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일부러 자신을 기다렸다가 만나 주신 일에 깊은 뜻이 있음을 죽을 때까지 더욱 깨달아 갔다. 그러니 바울의 능력을 보고 바울을 택하신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정말 다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