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고린도후서(20) (고후8:9~15)

2019. 1. 30(수)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1월말은 설날 전의 월말이라, 나 같이 비중이 낮아 아무 물에도 잘 뜨는 가벼운 사람에게도 바쁠 때이다.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 목사님. 이번 주 수요 예배에 왔었어? 가슴이 덜컹한다. 죄를 지었냐구요? 그렇다. 수요 예배 빠지고 일을 했다. 네 못 갔습니다. 응, 내가 이번에 마태복음 13장을 했는데 잘한 것 같아 그거 정리 좀 해 볼래? 네 목사님. (어느 안전이라고 다른 말을 하겠는가?) 씨 뿌리는 비유를 하셨군요? 이 말이 튀어나가는걸 나의 충실한 목젖이 막아 주었다. 평신도가 너무 아는 척 하는 건 좋지 않다.

(2) 나는 최근에 목사님께서 2016년 3월 합신 개강 수련회에서 하신 강의를 정리한 원고를 읽을 기회를 가졌다. 여기서 씨 뿌리는 비유를 강의 하셨는데 이번 수요 예배 때 하신 것과 조금 다르다.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관점이 그렇다. 소개한다.

“예수는 인류가 당신을 알아보고 못 알아보고를 넘어서 있는 구원을 위해 오셨다는 것 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와서 구원을 이루겠다, 라는 것입니다. 옥토라서 결실이 맺힌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시 떨기이거나 돌밭이어도 이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3) 이번 수요 예배에서는 이 보다 더 쉽게 하셨다. 평소 즐겨 쓰시는 꽃밭 비유를 적절히 사용하셨다. 노파심에서 씨 뿌리는 비유의 이중적 의미를 정리한다.

(비유1)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에 떨어지면 많은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너희는 이걸 보면 땅이 옥토여서 결실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비유2) 그러나 옥토는 자양분을 줄 수는 있지만 생명 그 자체를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은 오직 씨에게만 있다. 너희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바로 그 씨다. 내가 뿌려지면 돌짝밭이든 가시떨기이든 결실을 맺을 수 있다.

1) 예수님은 이 씨가 되어 우리라는 꽃밭에 심기어 지셨다. 이 씨가 썩어 많은 꽃이 풍성하게 피었는데 이 꽃 하나 하나가 바로 우리이고 세상은 이 꽃밭을 예수 꽃밭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씨가 꽃 피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밭을 구원한 셈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 세상을 구원하는 것과 같다.

2) 이 씨는 다만 옥토에만 떨어지지 않고 돌짝밭이나 가시 떨기에도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 씨는 가능성이 있는 옥토에만 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곳에 간다.

3) 우리도 이와 똑 같이 아무 곳에나 뿌려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삼켜져 썩어야 한다. 그 곳이 옥토여야 가겠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이거나 교만이다. 뿌려진 후에는 하나님이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다시 태어난 꽃과 열매들을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셨음에도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여겨 주신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신다.

4)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모르고 라는 이 말씀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해서 되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언제나 진리다. 만일 구원이 우리가 이해해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은 없어진다는 것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 내용
가. 서론

(1) 배경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돕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에 구제를 요청했고 고린도 교회는 그것을 하기로 약속했다.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쉽다. 너희가 원했고, 너희가 약속했으니, 끝까지 잘해라, 이런 독려로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제에 관한 중요한 성경적인 이해가 있다. 지난 시간에는 헌금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확인했었다. 오늘 구제에 대한 이해를 확인한다.

나. 본론

(1) 이런 중요한 독려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본문 9절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함이라.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 말 번역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빌2:5~11)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 오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는 우리를 위한 어떤 희생, 어떤 구제를 하셨다는 것이다.

이 만한 높은 수위의 물이 낮은 곳에 물이 차게 하기 위해, 자신의 높은 수위를 모두 다 내어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시면서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은 남김없이, 필요로 하는 곳에 다 채우기 까지 자신이 어느 만큼의 구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자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마지막 한 푼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구제하는 것, 나누는 것, 자신이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자를 채우는 것, 이것들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 실천을 요구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받은 백성으로 삼아 어떤 대접을 하시려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구원에 기독교적 이해를 충분히 가르치는 본문이 된다.

(2) 마태복음 13장에 가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씨 뿌리는 비유 중 첫 번째 비유가 나오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씨를 뿌렸는데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짝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떨기에도 떨어지고, 옥토에도 떨어졌다. 있을 수 있는 경우를 얘기했다. 다 씨 때문이 아니라 밭의 조건 때문에 결실을 못하다가 옥토에 떨어지니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됐다. 누구나 아는 얘기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렇게 묻는다.

“(마13: 10~17)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 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 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설하신다. 우리가 다 아는 해설을 하신다.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말했다. 이 쉬운 얘기를 뭐 비유로 하십니까? 그냥 얘기해도 다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뭐가 어렵다고 비유로 하십니까?

이것은 못 알아듣는 얘기이다. 그래서 내가 비유를 베풀었다. 이것은 이사야가 받았던 선지자 소명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고 했을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그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가라 그러나 그들이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그 일의 성취이다.

제자들은 못 알아들었다. 너희 돌짝밭이 되지 마라. 너희 완악하지 마라. 순종해라. 순종했더니 이렇게 많은 결실을 했다. 그 얘기 아닙니까? 아니라고 하시는 거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우리는 이 비밀을 풀기 위해 요한복음 12장으로 간다.

(요12:24)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이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썩는 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땅에 떨어지는 것은 다 썩지만 그 속에 있는 생명은 열매를 맺는다. 땅에다 묻을 때에는 마치 버리는 것 같다. 땅은 삼켰다고 하고 하나님은 심었다라고 말씀하신다, 라고 전에도 표현했던 것 같다.

이 씨가 자기 생명력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지 땅이 결단코 생명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나쁜 땅이면 생명이 열매를 맺을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해서 결실하지 못하고, 옥토이면 결실을 한다고 했다. 우리도 안다. 그러나 둘이 기가 막히게 묶여져서 우리가 들어도 모르고 봐도 모를 얘기가 되어 버렸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돌짝밭이 생명을 키우지 못하지만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책임을 질수는 없다, 옥토는 결실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옥토가 생명을 창조하는 거냐? 이 점에서는 옥토나 돌짝밭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심지 않은 것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옥토라는 것을, 도덕성이 있고 성실하고, 상식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길가이거나 돌짝밭으로 생각한다. 밤낮 미운 소리나 하면 가시 떨기쯤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의 밀알이 땅위에 떨어져 결실을 한다고 선언하셨다. 죽어야 되는데, 썩어야 결실이 되는데, 하나님이 이 씨가 열매를 맺음으로 땅에게 오히려 이름을 주신다.

코스모스가 피면 밭 이름이 코스모스 꽃밭이 되고 장미가 피면 장미 꽃밭이 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오셔서 당신의 생명으로 만드신 열매들에게, 또는 열매가 맺힌 나무들이 있는 밭들에게 생명과 명예와 영광을 얻게 하셨다. (정리자 주: 말하자면 이 밭들은 생명 밭이거나 명예 밭이거나 영광 밭이 된 것이며 총칭 예수 밭이 된 것이다.)

이 일에 땅이 도울 수 없었고 돕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죄인들 속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에서 열매를 맺으시자 우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정리자 주: 위 비유에 적용하면 우리 각자는 예수 밭에서 자라나게 된 한 송이의 꽃이다.)

그래서 구제라는 건 무엇이냐 하면, 이걸 도우면 열매를 맺을 만한 옥토인가, 성의가 있느냐, 가능성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필요한 곳에 뛰어 들어가는 것이 구제이다. (정리자 주: 이래서 예수님의 오심은 복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능성과 성의를 전혀 보시지 않고 일방적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셨듯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사 죽으셨듯이, 우리 안에 삼켜지거나, 우리 안에 파묻혔듯이, 그러나 거기서 다시 살아 내셨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살려 낸 것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따라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구제란 무엇인가?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너를 돕거나 너를 알거나 네 힘이 되는 곳에 가서 네 복음과 진리가 저들의 열성과 합력하여 열매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너 보내지는 곳에 가라, 이다. 씨를 뿌리는 곳에 가라. 열매를 내가 네게 맺은 것 같이 저희 안에 열매를 맺을 것이다. 저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네가 들어가 저들이 열매를 맺으면 저들에게는 어떤 이름이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구제를 할 만 한 것, 베풀 만 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는 곳에 우리가 가기를 원하신다. 돌짝밭에 가라, 가시떨기에 가라, 내가 너를 부활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들 앞에 열매를 보이면, 네가 던져진 그 땅이 옥토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정리자 주: 땅은 옥토가 되고 그 밭은 예수 밭이 된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외적 조건과 외적 기대와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 방법과 같은 방법으로 보내진다. 내가 진심이 있는데 하나님 내게 기회를 안 주십니다. 내가 열심히 있는데 못 알아듣습니다. 이런 것들과 상관이 없다.

자신이 열매 맺으면 그 땅 전체에 열매가 가득해진다. 자신이 열매를 못 맺으면 그 땅과 함께 망한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서 나는 할 도리를 다 했다, 라고 말하면서 너희는 반응하지 않았다, 라고 한다면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거기서 죽어야 한다. 심겨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들에게 함몰 되듯이 보내져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다.

직장에서 한마디도 할 말이 없고 예수 믿는다고 큰 소리 칠 것도 없고, 그러나 그곳에서 부활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과 같다. 그들과 같은 눈높이, 같은 정도의 처지에 여러분이 심겨야 한다. 거기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들에게 보상을 받거나 그들로 결실을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거기서 신앙인이어야 한다. 그게 구제이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것을 놓고 우리를 찾아와 마지막 하나까지 버리고, 마치 우리와 방불한 죄인인 것처럼, 십자가에 죽어야 되는 죄인인 것 같이, 여기까지 심겨진 것 같이, 자신의 생애를 바친 것 같이, 우리 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이렇게 씨와 정체성이 묶이는 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보자. (엡1:17~22) 예수는 씨가 밭에 뿌리어진 것 같이 당신의 충만을 우리의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시겠다고 한다. (정리자 주: 이 부분도 오랫동안 어려웠다. 우리의 충만이 없다면 예수님의 충만도 없다. 우리가 충만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이미 충만하신 분이겠거니 라고 생각하지 말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되는 것은, 지극함이나 종교적 정성 등 수단과 방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만드시려고 했던 것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것을 보여준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서 신앙인과 불 신앙인이 얼마나 차이가 큰 지도 보여준다. 우리는 너희는 돌짝밭이다, 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큰 것이다.

머리만 따로 있는 몸은 없다. 우리 몸은 머리가 몸 중에서는 우두머리 일지라도 한 사람의 존재와 정체성은 머리와 몸이 합해져야 이루어진다. 균형과, 유익과, 필요, 명예에서 함께 간다.

(엡3:14~19)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 왔는가? 아무 조건이나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길가 같고 돌짝밭 같고 더 흉측하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당신의 꽃을 피움으로써 마치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만들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를 품으셨다.

우리는 우리가 할 테니 세상은 응답하라, 라고 나가지만 세상은 응답하지 않는다. 응답하지 않는 곳에, 적대시 하는 곳에 ,그리고 우리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 우리를 보내신다.

복음성가에도 있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흩날리듯 아름다운 종소리가 되어 퍼진다. 지금 여러분의 불만스러운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요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잘하셔야한다. 훌륭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인상을 쓰면 안 된다. 진지한 것과 인상을 쓰는 건 다르다. 진지한 것과 불만은 같이 갈 수 없다. 여러분이 더 좋은 조건과 더 좋은 기회를 찾지만 아니다. 들어도 모르고 보아도 모르는 자들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신비가, 지극하신 사랑이 거룩하심이 우리 인생에 그대로 허락되고 있지 않는가?

(엡4:15~16) 우리는 구원의 역사 속에 있다. 기적 속에 있다. 하나님의 최고의 권능과 지혜 속을 살고 있다. 우리의 현실이다. 누구를 부러워 할 게 아니다. 특히 죽어서 책임 없는 아브라함, 모세 같은 위인을 부러워하지 말라. 지금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끼리 열심히 사는, 보람 있는 인생이 되시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외람되지만 감히 쓴다. 앞에서 말한 합신의 원고를 읽어 보면, 역시 신학생에게는 깊이 있는 설교를 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2) 우리가 듣는 주일 설교나 수요 예배 설교의 깊이가 낮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수준에 맞게 해주신다는 거다. 그러나 이번 수요 예배 설교는 신학생들도 와서 들었으면 좋았다. 예수님은 이사야를 여러 번 읽으셨음이 분명하고 그 이해도 뛰어 나셨다.

(3) 이렇게 커 보이는 이사야도 변화산에서 예수님 옆에는 서지 못했다. 모세, 엘리야만 섰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도 의전 서열이 있다면 분명히 이사야는 모세, 엘리야 다음 서열일 것이다. 농담이다. 이번 설교가 너무 중요해서 한참을 집중했더니 조금은 풀어지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