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4) (히10:1~18)

2019. 1. 20(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그 때는 지금 보다는 목사님과 덜 친할 때다. 친하다는 형용사가 존경심을 감하는 말로는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목사님께서 나를 동지라고 불러 주셔서 겨우 쓰는 말이니까.

(2)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 집사, 나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내 개인적인 일은 다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실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는 보상을 안 하셔.”

한 15년 전쯤이다. 이 말을 처음 들을 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도 사는 건 고생이라는 뜻인가? 그 때는 내 믿음의 수준이 그 정도였다. 이제는 조금씩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좋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에 대해 우리 인간이 기대하는 보상을 하지는 않으신다. 믿음도 열심도 다 우리를 키우시는 일이며 그런 우리가 현실에서 시달리는 것도 다 우리를 키우시기 위해 마련하신 삶의 현장이다.

(3) 위의 얘기를 하실 때의 박목사님은 그야 말로 팔팔하실 때였다. 그렇게 당찬 목사님께서도 산다는 것에 대한 수고와 아픔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4) 그 때 쯤의 어느 수요 예배 때였다. 청년 하나가 목사님의 설교에 대꾸를 했다.
“시끄러워 좀 더 자라면 알게 돼.”

목사님은 온 청중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2. 내용

가. 서론

(1)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제일 큰 관심사는 죄 사함을 얻고 천국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신 후에 왜 이 세상에 남겨 두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자답게 살려고 늘 애를 쓰는데 잘 되지 않는다. 이 괴로운 세상에 우리를 남겨두시고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 마땅하고 감격할 테지만 잘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되나 싶어 물어보면 안 되는 것 같다. 대다수 신자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시간을 왜 끌고 가시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도 바로 그런 문제에 노출되어 있었다.

(2)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여러 위험과 손해를 감수해 왔는데 이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보상이 없고, 예수를 대적하고, 예수 믿는 게 뭔지 모르는 세상 권력들과 부도덕한 것들이 오히려 득세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것에 대해 낙심했다.

이 편지에는 우리가 당연시 하고 있는 말들로 격려가 되고 있지 않다. 힘을 내라, 믿음을 지켜라, 참아라.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지금은 예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는 시간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십자가로 끌고 간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어떠한 고통을 감수하셨는가? 얼마나 큰 진심으로 우리를 대하셨는가? 로 돌아가서 그 감격, 그 역사적 사건, 우리의 고백, 믿음을 다시 확인한다. 그래도 현실을 견디는 문제에는 진전이 없다. 십자가는 분명한데 그 후의 우리의 생애는, 고백과 소망과 약속을 가지고 있으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현실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알다가도 모를 얼굴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거기에 대한 답이다.

나. 본론

(1) 본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렇게 얘기한다. 구약에서도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속죄제라는 것이 있었다.

1년에 한번 씩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하고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제사가 매년 있었다. 그러나 그 황소와 암소, 염소 같은 짐승의 피로는 깨끗하게 하는 일의 유효기간이 1년 밖에 되지 않아서 그 제사는 매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예수님께서는 한 번에 이것을 끝장내셨다. 왜냐하면 그의 피는 짐승들의 피와 비교할 수 없고 우리의 피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속죄 제물이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죄를 씻는 일에 한계가 없었다. 유효기간이 영원하다. 단번에 드리셨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하려는 얘기다.

(히9:24) 세상에서 대제사장들이 동물의 피로 우리를 속죄하는 일은 유효기간이 1년 밖에 되지 않아서 자주 했어야 했지만 예수님은 자주 하실 필요가 없었다. 무한한 효과를 지닌 속죄였다. 그러니 생각해 보라. 십자가는 한 번에 끝났다. 십자가는 반복되지 않는다.
오늘 본문 10장 16절을 보자(히10:16).

끝난 거다. 회개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막 말하자면 그렇다. 거칠게 가 아니라 강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렇게 한번으로 죄 문제가 끝장나고 해결된 것인데 왜 아직 안 부르시는가 하는 것이다. 질문이 여기로 와야 한다. 그럼 지금은 무엇인가? 죄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고 따지지 않을 거라면 지금은 과연 무엇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너희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 역할을 계속하고 있느니라. 죄를 씻는 일 말고 우리에게 남겨진 인생이라는 기간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고 있는 일이 있으니, 너희의 지금 인생은 죄를 씻는 일 말고 다른 일로 남아 있는 것이란다.

여기를 헷갈리고 있다.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남겨 놓은 시간이 아니라 죄를 씻고 새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새 기회를 주신 거다. 그래서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가?

그 답은 2차로 하더라도 우선, 우리가 죄로 늘 회개하고 씻고 마음에 자책을 하고 절망을 하고 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다른 기회와 기간을 사는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2) (고전11:23~27) 성찬식은 십자가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가 피를 흘리셨다. 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죽음은 끝났다. 예수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다시 오신다. 우리는 지금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너희는 예수로 인하여 새 인생, 새 사람, 새로운 약속 속에 있고, 그 약속과 기회를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살아내야 하는 책임 속에 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극화하고 거기서 감동하고 거기다 모든 것을 쏟아 부음으로써 살아야 하는 지금이 염두에 없다.

성찬식만 하면 울려고 한다. 그러지 말고 거기는 끝났고 나는 새로 시작하여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또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텐데 너 뭐하고 있냐? 라고 하신다.

고전11:17을 보자 내가 피 흘려서 너를 학교에 보냈는데 너는 뭘 하고 있느냐? 뭐를 배우는 거냐? 진도는 나갔느냐? 라고 묻고 계신다. 너는 신자답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내가 너를 새롭게 만들어 다시 오겠다고 한 약속의 기간 동안, 너에게 준 명령과 기회를 알고 있느냐?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라고 물으신다.

이 문제는 너무나 분명하게 사도행전을 둘러싸고 있다.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승천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가 해방자, 구원자일 것이라고 믿었다. 뭘 보고 그랬는가?

죽은 자를 살렸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았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이가 메시아가 아니면 누가 메시아란 말인가?

그런데 그 메시아가 죽었다. 그것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죽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설마설마 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이가 죽는다는 게 말이 안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끝까지 따라 들어갔다. 설마, 설마, 설마 하면서. 그러나 정말 죽었다. 여기서 무슨 수가 있겠는가? 저주하면서 부인했다. 그가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것이다. 베드로의 실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어떻게 그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 손에 잡혀서 죽을 수가 있는가? 넋이 빠졌다. 부활하셨다. 무슨 생각이 들었겠는가? 아, 이렇게 세상 권력에 대해서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뒤집으시는구나. 마지막 장면에서 제자들이 묻는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제는 됐습니까? 예수님은 느닷없는 답을 하신다. 그건 아버지의 손에 있다. 나는 모른다. 나는 간다.

이건 경악이상이다. 아니 그러면 부활은 왜 하셨어요? 부활하실 걸 죽기는 왜 죽으셨어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잘 살아보려고 하는 우리를 왜 이렇게 살게 하세요? 우리는 성경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이미 일어나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는 그 약속들을 우리는 놓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눈을 감았다.

(3) 성령이 오신다. 그 때를 보자. 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믿었던 예수가 죽으신 것으로도 놀랐는데, 부활한 것으로는 더 놀랠 수밖에 없었다. 부활하신 후에는 빌라도와 헤롯을 혼내시고 우리들에게 상을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아무것도 안하시고 떠나 버리셨다.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이 오셨다. 새로운 힘으로 충만해졌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와 요한이 귀한 선언을 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일어났다. 뛰며 소리 질렀다. 온 성에 소문이 퍼졌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당시 권력자들이 그들을 잡아갔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그런 소리로 백성들을 미혹하지 말라. 위협과 협박을 받고 놓였다.

(행4:23~31) 이 기록의 모순을 아시겠는가? 잡혀간 사도들을 기다리고 있던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돌아온다. 우리나라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안이숙씨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 이다. 일제 강점기 때 순교자들의 이야기 속의 기록이다. 첫 번째 투옥이 일어났을 때에는 죽이지 않았다. 풀어주었다. 두 번째 투옥 때부터 순교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첫 번째 투옥된 사람들이 풀려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도했을 때 출옥한 목사, 장로들에게 물었던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이었다.

“고문을 당할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도우시던가?”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다. 대답은 이것이었다. 아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길이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것이 이 사도행전 4장에 있는 이야기이다.

성도들이 물었다.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우리를 위협했고 한 번 더 하면 죽이겠다고 했다.

사도들이 여기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맞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시편 2편을 인용했다. 어찌하여 열방이 나서며 세상의 권세자 들이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가?

헤롯과 빌라도는 주의 일을 이루기 위한 악역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순종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자기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믿습니다. 힘을 주시옵소서.

그러자 그 모인 장소가 진동하고 성령이 임하여 성령이 충만했다.

원래는 언제 오셨어야 되는 것인가? 사도들이 잡혔을 때 오셔야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빌라도와 헤롯을 제압하고 사도들을 풀어 주셔야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사도행전 4장의 고백처럼 한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이다.

(4) 여기를 안 믿는다, 어렵고 괴로운 것이 전부다. 우리를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영광과 찬송으로 끌고 가시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게 하는가, 라는 문제는 외면하고 싶어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다. 믿음 장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가? 넉넉히 이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가? 답을 얻지 못하고도 충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충성이나 순종으로 그들의 삶이 편해졌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고생고생하고 보상받지 못하고 끝장이 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금에서 보아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믿음의 선조요, 영광된 인생을 살았다고 우리 입술에서 고백이 나온 다. 그 길이 세상이 만드는 한 순간에 불과한 헛된 영광이나 헛된 승리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도 그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 고난과 이 고통과 답이 없어 보이는 이 길이 주께서 살았던 성육신의 길이었고 우리 보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 성육신의 연장이다.

요한복음 14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친히 이렇게 약속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 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께 와서 하실 일을 하셨다.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께 더 구함으로써, 예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겠다는 것이다.

더 큰일이라는 게 무엇일까? 아버지의 영광, 아버지의 승리, 아버지의 권능, 진리요, 은혜요, 생명이요, 기적이요, 감사요, 기쁨에 해당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 안에서 보여 졌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것이다.

통치,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를 부르신다. 모든 은혜와 기적과 승리와 기쁨이라는 것들이 예수를 통하여 온 것 같이 우리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증언이 되고 수단이 되고 모범이 되고 자랑이 되는 인생을 살게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다만 우리로서는 해결되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고난과 원망들이, 어떻게 큰 조건이며, 하나님이 그 안에서 어떻게 당신의 영광을 받으시는가,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5) (엡4:17~32)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거룩함에 있다. 그리고 명예에 있다. 옛 사람은 감각 없는 자요, 방탕에 방임하는 자이며, 헛된 삶을 살고 있다면, 새 사람은 생명 있는 삶을 산다. 생명의 아름다움과 부요함과 영광으로 우리의 본질과 정체성과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25절에 표시된다.

여기서 모르는 내용이 있는가?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은 알고 있다. 문제는 분냄과 악독과 노함과 거짓됨을 하지 않아야 할 그때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해야 할 때 해야 된다. 할 필요 없는 곳에서 떠들지 말라. 사랑 합시다 하지 말고, 사랑을, 여러분이 도전받을 때 여러분에게 요구할 때, 해야 된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인생이다.

우리는 매일 도전 속에서 있다. 세상이 내 방법대로 해라, 라고 하는 도전과 위협 속에 있다. 신앙 속에서는, 너, 네가 져라, 하는 권면 속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해야 할 때에는 안하고, 할 필요 없을 때에는 떠들기 때문에, 말은 다 잘하고 해야 할 때는 아무것도 안한다.

쉽게 이것부터 해보자. 안녕하셨어요? 우리의 대답은 다 이거다. 지랄하고 있네. 그때 안녕 하셨어요? 를 같이 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를 해야 한다. 그것이 매일 할 일이다. 무슨 남북통일을 하고, 세계평화를 원하는가?

우리에게 매일 벌어지는 일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눈 하나 마주치지 못한다. 어디에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겸손이 있는가? 해야 될 때 안한다. 그리고 자책한다. 자책은 있고 신자답지는 않는 것이다. 회개만 하지 말고 할 일을 해야 한다.

영어를 왜 못하는가? 우리는 머리로 영작을 해야 말이 나간다. 그럼 상대방은 이미 가고 없다. 해야 되는 줄은 아는데 놓치지 않는가? 그러니 연습을 해야 한다.

요즘 아시안 컵 축구를 하고 있다. 우리가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보다가 아시안 게임을 보니까 한심하다. 다 서 있기만 한다. 이동을 해서 공간을 움직여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메시가 제일 축구를 잘한다. 그 사람은 어떻게 잘하게 되었을까? 연습의 결과이다. 연습이란 육체의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다.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하는 집중력, 그의 정신력을 다지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가 없다. 기술적으로도 부족하고 정신력으로도 부족하다. 신자로서 산다는 것을 모른다. 현실을 추상명사와 명분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말을 해보라고 하면 엄청난 말을 한다.

온 인류와 운명과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대꾸도 못한다.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같은 팀이라는 것이다. 패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끼리 안쳐다 본다. 뭘 하고 있는 줄을 모른다. 세상에 나가서 하려면 여기서 먼저 해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한 이유이다. 세상에서 실력 발휘를 하라고 준비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오늘 자책했는가? 내일 하나 더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원래 축구라는 것은 골이 많이 안 난다. 30번 슛해서 하나 나오는 비율이다. 괜찮다. 그래도 우리는 해야 한다. 두 골이 되게 하고 세 골이 되게 해야 한다. 그게 연륜이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키는 일이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가지는 정신적, 육체적, 습관적, 인격적 영성이 나온다. 하루가 뭔지를 모르니까 신앙생활이 연습이 되지 않고 중첩되지 않는다. 막막하고 놀라서 왔다가 가는 것이 다가 되었다. 히브리서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다. 결어

(1) (히8:1) 우리의 하루는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하루이다. 히브리서는 얘기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키고 계신다. 믿음으로 살아라, 그 고난 속에 영광이 담겨 있다고 믿어라. 네 할 일을 해라. 네가 할 수 있는 말을 해라, 네 수준에서 네 자리에서 해라. 오늘을 살아라. 그리하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네게 담겨지리라.

3. 에필로그

(1) 다시 보는 히브리서 설교가 참 좋다. 설교자에 대한 최고의 격려와 칭찬은, 오늘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지만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참 좋다,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2) 성경마다 핵심 주제가 담긴 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중요한 장들이 있다. 로마서라면 단연 7장에서 8장이고 히브리서라면 11장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보는 히브리서가 다 좋은데도 11장 설교를 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1/20) 하신 10장 설교는 히브리서 전체를 대표하는 것 같은 설교였다. 주제도 구성도 꽉 차게 잘 짜였으며 결론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우리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셨다.

(3)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런 감격과 은혜를 이런 못난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목사님, 사람이 많이 아프고 나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들었는데 오늘이 그러신 것 같았어요.”

웃으신다.

독자들께서는 더 깊은 말로 박목사님 설교에서 받으신 은혜를 표현하시기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