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3) (히9:11~17)

2018. 12. 23(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남포 교회의 교인인 나는 한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이런 걸 자랑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하시기 바란다.) 나는 교회에 비치되어 있는 박 목사님의 모든 테이프를 다 들었다. 몇 년 전부터 교회에서는 말씀을 CD로 정리하고 있지만 그 전에는 카세트 테이프였다. 이 테이프를 다 듣는데 4~5년이 걸렸다. 운전할 때가 가장 듣기 좋다. 설교는 뒤로 감기(rewind)는 안 되지만 테이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음질이 안 좋았던 요한복음 테이프는 테이프 하나를 서너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책도 거의 다 읽었다. 갑자기 책에 대해 신중하게, 모두라고 하지 않고 거의라는 부사를 택한 이유가 있다. 2년 전에 이대원 목사님과 박 목사님 책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처음 들었던 책 제목 하나가 “통찰과 분별”이었다. (2000년에 처음 나왔던 이 책은 2018년에 “흔들어 보기도 하고 거꾸로 쏟아 보기도 하고” 라는 책으로 새로 출간되었다. -필자 주) 그 책을 재빨리 읽었지만 그 후에는 책에 대해서는 거의라고 조심한다.

(2) 박 목사님 설교가 어렵다거나 설교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어떻게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우선 박 목사님의 신학을 이해해야 한다. 깊이 있게는 모르지만 목사님은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너무도 명확한 신학적 고찰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이거나 우리가 능력이 부족해서 겪는 것이거나, 우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래? 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다음은 박 목사님 설교는 비교적 기승전결이 구분되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나 승에서 알아들었거나, 또는 알아들은 것처럼 느껴져도 조금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 또 목사님은 농담이나 예화 하나라도 설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씀은 하시지 않는다.

한편 목사님의 설교는 대표적인 만연체이다. (간결체나 건조체가 아니라는 거다.) 예를 들어,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이자 은혜이며 십자가의 참된 의미입니다, 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권능과 은혜와 십자가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어떤 높으심을 강조하기 위해 병렬적으로 쓰신 수사적인 표현이다.

끝으로 목사님의 설교는 조금씩 진화한다. 파악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정말 그렇다.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에 대한 비유, 탕자의 비유, 달란트 비유, 씨 뿌리는 비유 등 설교에서 인용하시는 많은 비유들의 내용이 점점 진화한다. 그리고 설교도 더욱 은혜롭게 진화한다.

2. 내용

가. 서론

(1) 히브리서는 핍박받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그들이 받는 고난을, 기회이고 유익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하는 중이다. 본문 11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시다. 우리는 현재에 있고 그리스도는 미래의 완성을 위한 지금 대제사장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에서 다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를 넘어서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일에 십자가로 다시 돌아간다.

신앙생활이 잘 잘못으로만 판정이 되고, 잘못했을 때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바람에, 십자가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며 지금이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모른다. 모든 신앙행위에서 회개가 있을 뿐이지, 잘하기 위한 기회로는 이해되지 않고 있다.

(2) 15절을 보면, 십자가로 과거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8장1절을 보자. 대제사장이 계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모든 신앙행위 중 가장 답답했던 것은 십자가로 구원하신 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데, 왜 인생이 고단하냐, 만족할 만한 신앙생활이 안 되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받는가, 어떻게 해야 잘못을 씻어 내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성경의 기대와 다른 것이다.

나. 본론

(1) (히9:27~28) 느닷없이 이 구절의 이야기는 왜 나올까? 27절의 말씀은 겁이 난다. 너 죽는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그러니까 죄 짓지 말아라. 이렇게 밖에는 연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 구절의 뜻은 지금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고 있고 그 결과는 여기서 얘기한대로 심판으로 끝나게 될 것인데, 그러니 지금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냥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 아니다, 라는 뜻이다.

어떤 어린이가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 아이가 벌어서 집안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 어떤 노신사가 넘어져서 신음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일으키고 고함을 질러서 사람들이 와서 병원에 데려가 살려 냈다.

노신사는 유력한 교육계의 어른이셨는데 나중에 그 아이를 불렀다. “너 왜 그 시간에 날 살릴 수 있었냐?”

“아니, 어르신을 살려준 게 잘못입니까?”

“아니 그 시간에 너는 학교에 있었어야 했는데 왜 거기 있었느냐?”

“저는 집안이 가난해서 제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신사는 아이의 집안에 얘기했다. 이 아이에게 모든 장학금을 줄 테니 학교에 보내라. 부모가 답했다.

그 애가 학교 가는 건 좋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굶게 되니 그렇게 못한다. 좋다, 생활비도 주마. 그래서 아이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 후에 아이와 아이의 부모들이 노신사를 위해 하루에 10시간씩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면 말이 되겠는가? 아이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인간이 더 깊고 더 위대해지라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좋은 학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학생이 요구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선생님, 좋은 시설, 좋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학교가 아무리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지고 있어도 당사자가 훌륭해지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이 바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라고 하는, 어찌 들으면 이 구절은 매우 공포스러운 선언일 수 있으나 이것은 공포가 아니라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 교육받는 시기이다. 지금 너에게 훌륭해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외적 조건은 내가 다 만족 시켜주마, 너는 네 실력을, 네 정체성을, 네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2) 우리가 이런 기회와 책임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잘 잘못에 묶여서 회개하고 울고 하나님 앞에 진심을 확인받는 것을 반복하면서 제자리에 있게 된다. 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해 보는 것이다.

마치 시험을 볼 때,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틀리고, 엉뚱하게 찍었는데 정답을 맞춘 경험처럼 우리도 인생을 겪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학교에 보낸 것처럼,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위협과 시험 속에서 살게 하신다.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인가? 세상이 가지는 폭력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강해지거나 독해져라. 이러한 조건 속에 우리를 집어넣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 승천하신 아들이 우리 편을 들고 계시는데도 여전히 이 폭력과 공포는 남아 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신다.

우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 도전과 시험에 네가 답을 내라, 해결하라가 아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이런 일에 대하여 보호를 받지 않으며 해결할 실력이 있지도 않다.

세상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지게 된다. 또 후회한다. 더 큰 힘을 가지지 못한 것, 더 독해지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원망과 분노가 쌓인다. 그래서 표정과 행동이 이렇게 된다.

“나 건들지 마.” 같이 죽을래? 문신을 하는 것도 이런 거다. 온갖 방법으로 안전을 확보하기에 급급하다.

나이가 들면서 배운다. 중학교로 다시 가고 싶어진다. 다시 중학교에 가면 그때 같이 놀지 않을 거야.
공부를 잘할 거야. 잘 하는 게 뭔가? 모든 시간을 집중하는 거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열매이다. 인생의 최고의 덕목은 성실함이야. 나 그때는 수학을 못했어. 나는 내가 머리가 나쁜 줄 알았어. 수학은 어떻게 해야 잘 하는가? 머리가 좋아야 잘 하는 게 아니다. 외워야 된다. 수학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외우면 이치가 깨달아진다. 영어도 물론 외어야 한다.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배우게 된다. 악해지고 독해지고 그래서 이긴 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가치? 이게 인생이란 말인가? 이게 인간이란 말인가? 드디어 그 질문을 만난다. 이렇게 이겨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그렇게 보복해도 아무 쓸데가 없는 것을,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게 나이가 하는 일이다. 그 긴 기간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3) 성경의 이 비유를 잘 생각해 보라. 탕자의 비유이다. 그는 고아였던가? 그는 둘째 아들이었다. 아들이 집을 나가는 것이다. 나가서 무엇을 배우는가? 세상에는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정당한 보상이 없고 영광이 없다는 걸 배워서 아버지께 온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마저도 넉넉했는데. 이것은 다만 경제적인 표현이 아니다. 거기는 사람대접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께 돌아가겠다. 가서 아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저는 감히 자식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옵소서. 아버지가 답한다. 무슨 소리냐. 얘들아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송아지를 잡아라. 내 작은 아들이 돌아왔다.

이것이 회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겪는 신앙 인생의 진솔한 내용이다. 여러분, 긴 시간 동안, 평생에 걸쳐서 신자다운 인생을 살 겨를은 막판 밖에 없다. 그 전에 이런 과정을 겪으면 집 나가 본 적이 없는 큰 아들이 하는 얘기를 하게 된다.

저 놈은 다 팔아 먹고 왔는데 왜 송아지를 잡습니까? 나한테는 염소새끼를 주신 적이 있나요, 병아리를 주신 적이라도 있나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인이 있는 자리와 본인이 배웠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증언에 불과하다. 순종을 한다는 것,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면 그 순종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그건 다만 강제적으로 묶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발적 항복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찾아 오셨던 것처럼,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고 기도해서 보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 같이 우리가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세상과 하나님을 똑같이 높고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계신다. 가지는 것,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기 확인, 자기만족, 그런 거대한 목적과 뜻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를 역사와 인생 속에서 살아가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기독교는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우리는 이 일이 출애굽 사건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고 있다. 출애굽 하는 일,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고, 구름 기둥 불기둥과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주신 샘물 등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지만 가나안 땅은 저들이 결심하여 자발적으로 들어가야 했다.

(4) 신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며 여러분의 자유이고 책 임 이어야 한다. 그걸 순종 이라고 한다. 순종은 한 번의 선택으로, 복권이 당첨 되듯이, 여러분의 생애를 행운에 넘길 수 있는 그런 선택이 아니다. 자기가 한 선택을 본인이 살기로 하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에 대해 글을 하나 써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컨텍스트에 자신을 본문으로 채우는 것” 이것이 순종이다.

여러분의 모든 조건, 여러분의 가문, 부모, 자식, 부부, 시대, 한국이라는 나라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이 환경,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겪으라고 하시며, 그 도전과 선택을 여러분 스스로가 하라고, 잘 잘못을 넘어서는 경우와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잘못한 것까지 일을 한다. 그 후회와 그 회한이 여러분을 더 깊이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이 그런 뜻이다. 여러분이 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늘 얘기 하지만 겸손은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는 자기의 진실을 아는 자만이 겸손 할 수 있다.

자신의 못난 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겸손하다는 것은 동정이다. 이건 얼굴만 봐도 안다. 동정을 떠는 건지, 겸손한 것인지는 속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실력이다.

당구장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걸음걸이만 봐도 그 사람이 고수라는 걸 알 수 있다. 교회도 그렇다 성경책 들고 들어서는 모습만 봐도 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수준 낮음이 있다. 웃을 줄 모르고, 열어 놓을 줄 모르고 겁을 낸다. 눈을 안 마주치려고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직면한 도전이다. 구원의 감동, 순교의 각오를 넘어 온 그 다음 단계. 일상, 매일 반복해야 되는 공동체 안에서, 주어진 사회 안에서, 이웃 앞에서 우리는 신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놀라서 도망간다.

여기는 책임도 기회도 없다. 옆 사람 답안지를 보고 써서 점수를 얻는 학생과 같다. 여러분의 인생을 제대로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 안에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만들어 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

(5) 1945년 39살의 나이로 죽어버린 본회퍼, 실력 있는 신학자 이며 목회자였으나 히틀러 암살에 참여하여 잡혀서 교수형을 당한다. 그의 책 중에 1월에 추천할 책이 있다. 제목은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 이다. 제목이 아주 도전적이다. 우리는 비겁하다.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되는지, 어떻게 책임져야 되는지 모르고 우리는 도망 다녔으니까 본회퍼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 라고 물었던 본회퍼는 비겁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살며 경험하고, 배우고, 창조하고 즐기며 고통 받지 않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일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이란 채워지지 않는 텅 빈 시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시간을 요구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나의 시간을 그분께 내어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시간을 드려야 하는 일이다.”

여러분들이 원망하는 현실이다. 어쩌란 말입니까?

할 수 있는 것을 실력만큼 하라. 잘 할 수도 있고 잘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을 반복하지 말라. 반복하거든 더 나아지려고 애를 써라. 그래서 실제로 나아져 가라.

내가 중학교 때 수석을 했다, 차석을 했다가 아니라, 그것이 지금 어떤 나를 만들었는가를 보라. 한국교회가 겁을 내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광분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이웃, 여러분의 회사, 여러분이 속한 이 사회가 있다.

여러분은 지하철에 서 있을 때에도 모습이 달라야 한다. 표정이 달라야 한다. 살아 있는 존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표정, 마땅히 가져야 할 어떤 여유가 있어야한다. 이것은 명분이 아니라, 실존이어야 한다.

(엡4:13~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의 차원으로 초청하고 있다.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아버지와 자식이란 차별을 가질 수 없는, 그 속성이 가장 친밀하고 근접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이, 이런 일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일하시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시는 시간이요 기회라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다만 명분에, 다만 이상으로 기대하면서 오늘을 낭비하거나 오늘을 외면하는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사랑이냐? 여기서 사랑은 명분도 윤리도 아니고 최고의 자발성을 얘기한다.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약속이다.

다. 결어

(1) 보통 세상에서 종교를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책임을 미루기 위해서이다. 여러분이 하는 기도의 대부분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내가 책임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닌가?

여러분이 기도할 수밖에 없고 비명 지를 수밖에 없을 때도 답이 안 내려 올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력만큼 하라. 화를 내도 좋고 밥상을 걷어차도 좋다. 그리고 뭘 배우는가? 밥상을 엎으면 내가 치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운다. 그건 명예롭지 않다. 그건 강한 것도 아니요, 독한 것도 아니요 못난 짓이라는 걸 배운다.

교회를 30, 40년 다녀도, 예수를 평생 믿어도, 나아진 게 없다. 부끄러워 해야 한다. 참된 인생을 사는 신앙이 되기 바란다. 비난하고 원망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스스로의 기만에서 벗어나라. 위대한 인생을 살기 바란다. (기도)

3. 에필로그

(1) 오늘이 지나면 2018년은 하루가 남는다. 모든 사람에게 이 연말이라는 시간이 주는 소회는 각각 다르겠지만 2018년의 연말은 내겐 너무 춥다. 내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인가? 나는 언제 부터인가 겨울 내복을 5단계로 입는다. 당신이 너무 놀라니까 내가 좀 받쳐 라도 드리고 싶다. 1단계는 10월 말쯤이다. 아침저녁 쌀쌀하고 낮은 가을인 이때에는 가장 엷은 내복(120수) 하의만 입는다. 2단계는 상의까지 입는 것이고 11월은 이런 내복 패션으로 지낸다. 3단계는 12월 초이거나 중순이다. 첫 추위 등이 오면 무조건 내복 중 얇은 기모로 되어 있는 것을 입는다. 기모 내복의 따뜻함은 입어 보아야 안다.

(2) 4단계는 12월말부터 1월 상순경 까지다. 이때는 기모를 조금 두꺼운 것으로 바꾸거나 그것도 안 되면 10월에 입던 얇은 내복을 속에 입고 그 위에 두꺼운 기모 내복을 입는다. 마지막 5단계는 1월 중순이후 1월말까지다. 내복을 더 입기는 좀 불편해서 이때는 상체는 스웨터로 보강하고 아래는 바지 자체를 기모 바지를 입는다. 오리털 패딩은 기본이고 요즘은 롱 패딩으로 교체했다.

내가 내복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힘을 주시는 분은 박 목사님이시다. 목사님도 내복을 즐겨 하시고 늦게 까지도 입으신다. (얇은 내복을 4월에도 입으실 때가 있다. ) 그래서 내복 입기에 관한한 나는 박 목사님과 강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다.

(3) 최근 송파구 시설관리공단에서 아시아 공영 주차장(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입구에 있는 우리가 늘 이용하는 그 주차장)의 후문을 주일에도 폐쇄한 적이 있다. 이유는 공단의 전산 프로그램이 바뀌어서 그런 것이고 그 결과는 차량 한 대가 출차 하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이 일을 직접 겪은 나는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공단과 상의하여 결국 후문 폐쇄를 다음 주일날에는 풀었다. 그 주의 목요일이었다. 박 목사님의 전화다. 나는 천하 없는 일을 하다가도 목사님 전화가 오면 먼저 받는다.

“이 집사, 주차장 후문을 폐쇄하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있다며? 그거 잘 안되면 내가 1인 시위를 할게.”

천하의 박 목사님께서 1인 시위를 하시겠다고? 나는 전신에 전율이 왔다.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내용을 다 아시고, 이것이 신자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라는 걸 아셨을까? 그리고 어떻게 당신께서 직접 1인 시위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실까?

“목사님 상의 중입니다. 잘 안되면 다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4) 박 목사님께서 1인 시위를 하셔야 하는 사태 까지는 일이 번지지 않고 해결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1인 시위를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물론 나도 그 옆에 서서 같이 피켓을 들어야지. 춥지 않을까? 추울 거야. 그러니까 내복을 단단히 입어야지, 양말은 두꺼운 거 2개는 신어야겠지? 모자! 방한모가 있어야 해. 마스크도 해야겠네. 내 시위는 송파구 시설관리공단과의 싸움이 아니라 추위와의 싸움이 될게 뻔했다.

감사한 일이다. 박 목사님께서는 나보다도 더 육신이 약하신데 교회를 위해서라면 1인 시위도 불사 하신단다.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했고 너무 따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