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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의 한국교회사적 조명
한국교회설교자와 설교(제1회 박영선목사와 그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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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의 한국교회사적 조명
                김영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목회와 신학」에서 행한 차세대의 영적 지도자의 자질에 관한 설문에서 응답한 468명의 목회자 가운데 28.9 퍼센트가 인격이라고 답하였으며, 21.6 퍼센트가 영적인 권위라고 답했는가 하면 19.7%가 설교라고 답했다고 합니다.1)

  첫째와 둘째의 응답인 인격과 영적 권위는 같은 범주에 속하므로 응답자의 거의 절반이 신앙 인격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회자는 설교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훌륭한 신앙 인격의 소유자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설문에서 설교하는 것을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답한 사람이 소수였다고 해서 설교하는 것은 이차적이라거나 덜 중요한 것이라고 답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또 다른 칭호가 설교자이듯이 목회자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설교는 심방, 상담, 교회행정 등과 함께 목회자가 해야 하는 과업이고 신앙 인격은 이런 과업을 수행할 목회자의 인격적인 자질과 자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신앙인격을 갖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절실한 일이지만, 그것은 목회자 각자가 기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도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힘쓰는 가운데 연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나은 목회를 위한 연구 과제는 될 수가 없습니다. 거듭 말합니다만, 신앙 인격은 목회자가 맡은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그릇이요 과업의 내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세미나는 목회자가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를 제쳐 두고 목회자가 해야 하는 과업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 즉 설교에 관하여 연구하자는 모임입니다.

  필자는 개혁주의연구소에서 한국의 설교자에 대한 첫 세미나에서 박영선목사를 택한 사실을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으며, 더욱이 필자에게 그의 설교를 한국교회사적으로 조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고 적지 아니 당황했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에 드러난 선배 설교자들이 많이 계신데 왜 박영선목사를 먼저 다루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가 한창 현역에서 일하는 목회자이므로 아직 역사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한국교회사에서 자리 매김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강의자 자신이 설교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참여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육의 일선에서 후퇴할 때가 된 사람으로서 그저 생각하는 바를 얘기하면 된다고 해서 사양하다 못해 주제넘게 강의자의 한 사람으로 몫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여러 가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박영선목사는 현 한국 교회의 여러 대표적인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를 연구할 설교자로, 다시 말하면 설교 연구를 위하여 그가 도움을 줄 대상으로 선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그가 목회하는 교회가 만 명에 육박하는 교인을 헤아리게 되어 대 교회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교회의 분열로 인하여, 6.25 사변으로 인하여 무지역 노회들이 생기면서 교구 교회 제도가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인구의 이동이 격심해지면서 교인들은 좋은 설교자를 찾아 모여드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대교회들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교회의 목사님들은 일단은 모두가 훌륭한 설교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설교가 모두 다 신학적이라거나 건전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하지만 대 교회를 이룬 경우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큰 교회를 이룬 목사님의 설교라고 해서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기 나름대로의 이유나 특징이 있을 것이므로 충분히 검토해 볼만 한 것입니다.

  1. 설교의 문서화

  한국 교회 역사에서 원고 설교를 처음 시작한 이가 1930년대 초반에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송창근(宋昌根)목사였다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을 전한다면서 원고 없이 설교하던 시절에서 송창근목사는 그러한 관례를 지양하고 한 단계 새로운 기원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강단에서 한 설교를 책으로 출판한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설교를 강단에서 말로 할 뿐 아니라 글로써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하는 작업은 1960년대 이전에는 별로 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능한 설교자의 교회가 대형화되어 집필을 도울 수 있는 보조 인력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설교를 문서화하는 일을 두고도, 피동적으로 하는 경우와 능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경직 목사의 경우는 1970년대 초에 교회와 몇 몇 교계 지도자들이 마치 한경직 목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 사업을 하다시피 설교출판 위원회를 조직하여 총회 교육부를 통하여 10권으로 된 설교전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문서화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설교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설교를 피동적으로보다는 능동적으로 출판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설교가 예배의 때와 장소를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미치게 하려는 바람을 가지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박영선목사는 곧 자신의 설교집을 능동적으로 출판하는 대표적인 목회자입니다. 최근에 어떤 지도적인 목사님이 오늘 날 제일 안 읽히는 책이 설교집이라고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유로는 내용의 빈곤, 즉 신학의 빈곤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영선목사의 설교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가 펴낸 설교집이 무려 70권에 달할 뿐 아니라 거의가 다 여러 판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설교라면 분명 신학과 내용을 가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실 또한 그러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곧 박영선목사의 설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한 수긍할 만한 충분한 이유인 줄 압니다.

  2. 박영선 목사 설교의 특징

  박영선 목사의 설교가 많은 이들에게 매력이 되고 있는 점을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합니다만, 본인 나름대로 말하자면, 먼저는 그의 설교가 논리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는 설경 말씀의 내용을 대지와 소지로 나누는 설교였습니다. 대체로 3 대지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1960년대부터인 것으로 아는데,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가 도입된 것으로 압니다. 대지로 나누는 설교에는 일관된 논리성이 결여되기 쉬운 반면에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하는 설교는 논리성을 갖추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오늘에는 많은 설교자들이 그렇게 설교합니다. 그것은 설교 시간이 단축되어서도 그러하고 교인들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도 역시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논리 정연하게 전개해 가는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의 많은 설교들이 믿음과 구원, 성화 등의 교리를 가르치는 설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설교가 길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친근한 속어도 사용하면서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때문이며, 회중을 질타하면서까지 하면서 금속성 고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호소하며 재미있게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강단에서 들먹이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 뒷골목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다른 강단의 설교에 익숙한 신자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익숙한 청중들로 하여금 곧잘 웃음을 터뜨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가 야하거나 천박하지가 않습니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의 말씨와는 달리, 설교의 내용은 언제나 격조가 높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신학적인 통찰력이 깃들여 있으며 신학적인 내용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교하는 그의 억양이나 자세가 너무나 진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은 그가 지닌 천부적인 은사이므로 다른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부분입니다. 흉내를 내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국 교회의 신앙과 생활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그런 부분을 갖추도록 호소한다는 점에서 그의 설교는 새롭고 특이합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추세나 경향을 거슬리면서, 김정우 교수의 말씀처럼, “왕따”를 무릅쓰고 그가 맡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 내용(sermon)과 그가 하는 설교(preaching)는 한국 교회와 설교자들이 경청해야 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만, 목회 초년생들이나 지망생들이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의 설교 형식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해학이 넘치는 예화와 비유를 적절히, 그러나 특이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설교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나 사건을 본보기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한 모범으로 삼도록 예화를 사용합니다. 그런 경우 설교자가 든 예화들은 설교에서 강조하는 내용과 병행하는 위치를 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화가 설교의 한 대지로 충당되거나 상당히 큰 부분의 내용을 대신합니다.

  그에 반하여 박영선 목사는 예화나 비유를 본문을 강해하면서 성경에서 나오는 말이나 교리적인 개념을 더 부연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신자가 지향해야 하는 삶의 한 모델로서의 예화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화나 비유는 길지 않고 무슨 단어를 설명하는 말처럼 짧고 간단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하는 예화나 비유가 성경 강해의 내용을 대신하거나 구조나 흐름을 깨뜨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강해 설교의 장점과 약점

  박영선 목사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입니다. 성경의 책을 따라 하는 강해 설교는 성경 말씀을 주어진 대로 고루 가르친다는 장점을 지닙니다. 그리고 또한 문서화하여 책으로 낼 수 있는 이점을 지닙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나 구미의 설교자들이 즐겨 취하는 방법입니다. 구미에서는 성경의 책을 따라 강해 설교를 않는 경우에도 교회에서 정한 성경 말씀의 단원(lection)을 강해하는 설교를 주로 합니다. 그래서 주일 설교를 위해서도 대부분의 경우 설교 제목은 없이 설교 본문만 명시합니다. 주어진 본문이 하나 이상의 주제를 말씀하고 있을 경우 사실은 그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제목을 붙인다는 것은 고역입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내세우지 않는 설교가 성경 말씀을 대변하기 훨씬 수월함을 발견합니다.  

  성경의 책을 따라 하는 강해 설교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게 되는 나머지 설교자가 설교할 당시의 시대적인 혹은 사회적인 상황은 잘 투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설교집이 청중이 처해 있는 사회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성경의 본문을 충실히 강해하는 것이므로 독자들이 어떤 시대와 환경에 있든지 상관없이 설교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하는 설교를 직접 듣는 교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일상 생활이나 시대적인 혹은 사회적인 환경과는 직접으로 관련이 안 되는 내용의 설교 말씀을 듣게 됩니다.

  방선기 목사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설교에 대한 평신도들의 가장 큰 불평은 설교의 내용이 매일의 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입니다(Han 151).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성도들의 생활과 연결시켜 주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목회와 신학(1991년 8월)에 따르면, 평신도들이 원하는 설교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80.99 퍼센트가 성경을 일상 생활과 연관시킨 설교를 원했으며, 9.09%는 그냥 성경 본문 강해 설교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4.13%는 신학적인 설교를, 5.79%는 많은 예화를 곁들인 설교를 원한다는 것입니다(손기태, “평신도들의 설교 수용에 대한 분석”, 「목회와 신학」, 1991년 8월호, 185쪽; 한 152에서 재인용).

  교회의 절기 혹은 국가 경축일, 이를테면 3·1절이나 8·15 광복절 등과는 전혀 관계없이 성경책의 본문을 따라서 진행되는 강해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사회적 상황에는 무관심하거나 스스로 소외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의 핍박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뜻 있는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에서 고난의 삶을 사는 교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말씀을 발견하여 전하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나 예루살렘 수복의 역사를 조국 해방을 약속하는 메시지로 읽고 전했습니다.

  성경의 책을 따라 본문 강해에 충실한 박영선 목사의 설교에서는 사회 및 정치의 상황이 별로 투영이 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박영선 목사에게는 설교에서 언제나 인격적인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므로 주변의 상황이 투영된 그런 설교는 할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을 선택해서 강해 설교하거나 혹은 제목 설교를 하는 대부분의 보수적인 설교자들에게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영선 목사의 설교는 대다수의 복음주의적 설교자들과 구별되면서도 역시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화의 설교  

  우리의 구원의 삶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즉 죄인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으로 죄를 회개하고 회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게 여겨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이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씀을 통하여 알고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 즉 성화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도 성경의 메시지를 이렇게 구분해서 말한다.

  “성경에는 아주 대별해서 두 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은 자로서 믿은 자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도 선교의 대상국으로서, 신자는 100여년 동안 많이 늘어났지만 수준으로서는 아직도 전도 설교를 해야 마땅한 곳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선택을 요구하는 전도설교가 아직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곳입니다. 이제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도 이미 예수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선택이 아닌, 즉 믿었는데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전도설교가 필요합니다(요한복음 강해 II 생명의 떡 (요 6:51), 1987초판 2000-6판, 113쪽).”

  선교 교회인 한국교회에서는 일찍부터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라는 메시지를 주로 전해왔으며, 현재도 대부분의 복음주의적인 설교자들은 그런 설교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 역시 그런 설교의 필요성을 말씀합니다만, 정작 그가 전하기로 택한 메시지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박영선 목사는 성화의 생활을 강조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나머지 전도 설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일을 마치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라는 설교와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는 설교에 머무는 일반적인 경향에 역정을 내기까지 합니다.

  박영선 목사 자신이 종래의 한국 교회의 설교가 주로 전도 설교에 머물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수 천당” 하는 식으로 하는 설교는 오늘에 와서는 무책임한 설교라고 말합니다. 박영선 목사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일을 위한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 점에 역점을 두어 설교한다고 말합니다.

  박영선 목사가 설교에서 성화를 강조하나 단순히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화를 중심으로 하는 강해 설교에서 성경을 신앙인격의 완성이라는 구도에 맞추어 해석하며 결론으로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께 쉽게 항복하지 않는 우리 인간의 고집과 이를 꺾으시고 항복시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빚어 가시기 위하여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에 대항하는 인간의 불신, 무능과 아집, 혹은 자포자기로 대결하는 인간의 무능과 무책임성을 발견하게 합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서 인간 자신은 온 힘을 다해 힘써야 하지만 온전함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므로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아니고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을 재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설교에는 신학적인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영선 목사가 강조하는 성화는 믿음으로 얻은 칭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데에서 머물거나 거기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와 그것을 성취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의 한계간의 긴장 속에서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국 선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완성을 지향하며 간다는 사실을 매 설교마다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영선 목사의 성화의 설교에서 칭의의 단계에서 필요로 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을 재인식하게 됩니다.

  박영선 목사가 성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의 설교가 복음주의적이기보다는 개혁주의적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가 흔히 이해하듯이 칭의는 뒤로하고 성화에 치중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칭의 없는 성화는 없고 성화로 이어지지 않는 칭의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설교에서 구원의 시작 아닌 구원의 완성과 그 과정에 더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아니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전자를 말하는 데서 머물므로 자기는 후자를 강조하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만, 그의 설교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구원의 개념을 다룬다는 점에서 신령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즐겨 읽고 배우는 구미의 설교자들이 아마도 그런 성향을 가진 인물들인 줄 압니다.

  신령주의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강조하는 반면에, 개혁주의는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은총을 시인하고 가르칩니다. 우리 인간의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은 일반은총에 속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일반은총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설교에서 교인들에게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는 설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임을 자책하고 나무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기 무능을 인식하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하고 고백하도록 몰고 갑니다. 그것은 당연한 결론이요 귀결점입니다.

  그러나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좀 더 긍정적으로 격려하며, 이를 도와주시고 힘주시는 성령을 따라 살도록 동시에 가르치는 것 역시 성경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생활에 대한 강조가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무능을 인식하기 위한 종속문으로서가 아니고, ‘그리고’ 혹은 ‘그러나’로 이어지는 대등한 문장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일반은총도 동시에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하여 도덕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우리의 무능을 절감하거나 그 점을 상기하는 한 도덕주의에 빠질 위험성은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박영선목사는 인격의 성화를 주로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고 성경책을 그냥 따라 하는 강해 설교를 하므로 그의 설교에 시대적인 혹은 사회적인 상황이나 사회 참여, 혹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말씀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설교는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전통에 속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설교는 문화와 사회 상황에도 관심을 두는 신칼빈주의적인 개혁주의 전통에 속하기보다는 시종일관 구원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신령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 전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뉴잉글랜드에서 언덕 위의 도시 건설을 희망했던 청교도의 전통과도 먼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에서 강조하는 성화는 인간의 무능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론적으로 재인식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반은총을 위한 여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소위 성화를 강조하는 박영선 목사의 설교는 한국의 많은 복음주의적 설교자들의 설교와 구별되면서도 역시 경건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전통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론

  박영선 목사의 교회론은 그가 늘 말하는 인격의 성화론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하는 교회임을 자처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을 매도하면서 “일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교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교회”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한국 교회에 결여된 부분을 말씀한다는 점에서 쾌재를 부르고 싶습니다. 본인 역시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라는 글에서 같은 점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2장은 “온 성도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영선 목사가 “일하는 교회”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학적인 균형을 잃은 것이라고 봅니다. 인격적인 성화를 이루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고, 일, 즉 전도와 선교는 그 이후에 할 일인 것처럼 말씀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교회에서 처음 믿는 사람들이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들보다 전도를 잘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것은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첫 사랑이 아직 생생한 사람, 즉 구원 얻은 감격에 벅차하는 초신자가 더 열심을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직 무얼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전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또한 그렇게 명하십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주님께로 인도한 일이 그러하고, 사마리아의 여자가 동네를 다니며 메시아를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고한 일이 그러합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분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간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12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직후에 아직 무엇을 잘 모를 때 그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셨습니다. 70인 역시 그렇게 보내셨습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가 혹은 교회의 지체된 각자가 아직 무얼 충분히 모르는 상태에서도 전도하고 봉사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인격적인 성화가 죽기 전에는 온전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나 성화에 순응하는 노력과 훈련은 주께서 명하시는 대로 봉사하는 일과 늘 함께 어울러져 발전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했으나, 또 한편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험에 따르면, 신앙생활을 오래 한 만큼 반드시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에 가까워지기는커녕 허물 많고 거짓되고 위선에 찬 자신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따르면 성화는 개개인의 인격적인 완성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혼자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어울려져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큰 죄인임을 더 발견하므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을 깨달을수록 형제를 관용하며 존경하고 의지하면서 서로의 짐을 지며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배우면서 함께 성화를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이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일 것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교훈의 말씀은 한 개교회의 성도들만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노회에 속한 교회들이, 혹은 한국 교회가 다 함께 약한 형제와 약한 형제의 무리들, 즉 약한 교회를 보살펴야 한다는 말씀으로 부연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여러 가지 부족하고 미숙한 점들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을 나의 것으로 우리의 것을 끌어안는 것이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일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기복신앙을 거부하는 한편, 기복신앙을 수용하는 한국교회를 질타하면서 소신대로 말씀하고 목회하는 행복한 설교자이십니다. 그는 이미 성숙한 인격적인 성화를 지향하자고 설교하는 설교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목회하시는 교회 역시 그런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박영선 목사는 한국 교회가 시정해야 할 점이나 보완해야 점을 강도 높게 외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기복신앙은 성숙하지 못한 신앙이요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탈피해야 할 그런 신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하는 단계의 신앙은 역시 자기 자신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므로 기복신앙과 전혀 거리가 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거부하시지 않고 받아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하고 환호하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셨으며, 역시 그 정도의 지식밖에 없는 제자들,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앞으로는 발을 씻어주는 의미를 알게 될 것을 기대하시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야 할 것입니다.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음은 유감스런 일이지만, 또한 많은 목회자들이 유치할 정도로 미숙한 신자들을 끌어안으며 오래 참음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 양육하는데 힘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목회자들의 헌신으로 한국 교회가 이만큼 자라왔습니다. 사실 기복신앙을 탈피하는 것도 성화의 목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으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기복신앙 역시 온전히 떨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는 줄 압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짓겠다든지 목회는 어떤 방식으로 한다든지 하는 계획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무엇이며 목회가 무엇인지를 옳게 깨우친 존경할 만한 생각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 놓으면 그 곳을 채울 교인들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다는 발상은 목회가 아니고 사업입니다. 신부감을 사귀기도 전에 아이를 몇 명이나 가지겠다면서 계획을 세우고 집부터 크게 지어 놓는 그런 남자는 극히 드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식구를 거느린 가장과 같이 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필요에 따라 그리고 형편을 따라 집을 널리듯 함께 예배하고 교육하는 공간을 널려 가면 되는 것입니다. 목회는 목회자의 아이디어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맡기신 교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함께 성화의 삶을 살며 선교 및 구제 봉사 등 주께서 주신 과업을 함께 수행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설교 세미나는 어떤 특정한 설교자나 그의 설교를 평가하거나 칭송하거나 혹은 비평해 보자는 모임이 아닙니다. 앞으로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들이나 설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설교가 무엇인지 설교가 목회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를 재인식하며,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를 함께 연구하고 배우려는 모임입니다. 연구소는 이 번에 그 일에 도움을 주실 설교자와 설교로 박영선 목사와 그의 설교를 택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방송과 TV 매체를 통하여, 또한 녹음 테이프를 통하여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튀는’ 설교자들이 쉽게 부상합니다.  또한 한국 교회 안에 대교회가 형성되어 있어서 여러모로 사람들이 그런 교회와 목회자들의 영향을 받거나 많은 사람들이 대교회와 그 목회자들을 모델 교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전한 생각이 아니지만, 여하튼 그것이 현실입니다.

  박영선 목사가 최근에 「獨說」이란 이름으로 설교집을 출판했습니다. “毒舌”과 같은 음을 가졌으므로 광고의 효과를 노린 소위 튀는 제명(題名)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독특한 설교”의 준말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그런 제명을 붙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獨說」 그것은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격적인 성화를 늘 말씀하는 그의 설교는 아닌게 아니라 독특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의 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명과 역할을 맡은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설교자는 독특한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세를 거슬리거나 흐름을 돌리려면 보통의 경우보다 힘을 두 배나 세 배 더 쏟아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있은 여러 운동에서 그러한 작용들과 역작용들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도 한국 교회의 미숙함과 잘못 나가는 길에 제동을 걸고 방향 전환을 모색하다 보니까 그의 설교가 예리하고 독특한 면을 자연 갖게 된 줄 압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비록 한편으로 좀 치우치는 감은 있으나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건전한 신학을 가르치는 설교여서 많은 자극과 배울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고 좋은 설교자가 되기를 지망하는 이들이 반드시 독특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선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다 균형 잡힌 보다 원만한 보통의 설교, 그럼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능력 있는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그렇게 세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튀는 설교자를 통해서가 아니고 이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목회처에서 평범하게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긴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와 봉사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을 신뢰하고 따르는 성도들의 헌신을 통하여 자라왔습니다.

  모든 설교본문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하며 잘 믿고 전도하며 봉사하자는 결론을 이끄는 복음주의적 목회자의 설교나 이에 맞서서 성화를 강조하며 설교가 풍성한 성경 말씀의 많은 부분을 제쳐둔다는 느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와 우리의 구원과 삶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심판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령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죄와 회개와 구원, 칭의, 성화, 부활과 영생, 하나님의 나라와 천당, 세상의 종말과 재림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말씀이 있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족보 이야기도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있으며, 이웃 사랑과 기독교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 있으며 봉사와 헌신을 가르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에 대하여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노래하는 시가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덧없음과 왜소함을 절감케 하는 말씀도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와 노래도 있습니다. 그 주제를 일일 다 들어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주제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보다 원만하고 성숙한 교회로 자랄 것입니다. 성경은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평생을 목회하며 설교해도 다함이 없는 설교의 보고(寶庫)입니다(김영재, 「교회와 예배」, 228).

  설교는 신학이고 신학은 설교와 같아야 한다고 저는 평소에 늘 생각합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듣거나 읽으면 공감하는 면에서 그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교회 역사에서 학교 강단에서 창출되는 신학은 부정적인 방면으로 교회에 별로 도움이 안되거나 오히려 해를 주는 방향으로 발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특히 계몽사조 이후에 볼 수 있는 현상들이었습니다. 설교와 신학의 괴리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건전한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성경 말씀에 충실한 설교자의 설교를 통하여 전달되는 신학은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기적을 낳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양육하며 함께 그들의 한 사람으로 그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설교자의 직분과 삶은 참으로 고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설교한다고 스스로 말씀하시는 박영선 목사는 설교를 위하여 폭넓은 독서와 소탈한 삶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합니다. 설교하기를 좋아하고 즐긴다는 박영선목사는 여러 면에서 설교자 지망생들의 사표가 되시는 줄 압니다. 설교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신학 서적만 읽을 것이 아니라 고전이랑 많은 일반 서적도 두루 탐독하라고 권하며 숙제까지 주신다는 얘기도 감명 깊이 들을 얘기입니다. 비록 그의 설교나 설교 전달의 독특함은 본받을 수 없다고 않더라도 그의 통찰력과 열정과 소탈함과 신사다움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박영선 목사께서 건강하시고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셔서 우리에게 계속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를 바라며 한국 교회가 늘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설교자로 남으시기 기원합니다.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