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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의 신학사상
한국교회설교자와 설교(제1회 박영선목사와 그의 설교

박영선의 신학사상
                                     김정우 교수(총신대, 구약학)

존경하는 나의 친구 박영선 목사님,

우리가 신학을 시작한지 올해로서 만 25년이 지났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던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늘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때 박형은 기도할 때마다 “나의 침삼킬 동안도 나를 놓아주지 않으시는 주님”이라는 말로 시작하곤 하셨지요. 그 때 권형(편집자주: 권성수교수)은 “내가 주를 의지하고 원수 앞에서 담을 뛰어 넘나이다”를 고백하곤 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아무런 사심이 없이 순수한 우정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 때가 참 그립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은 다시 올 것 같지가 않지요?  

이제 25년의 세월이 흘러 박형이 한국교회에서 가장 또렷한 소리를 내는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인정받는 자리에까지 가게 된 것을 보며, 친구로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존경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번 <박영선 설교세미나>에서 박형의 “신학사상”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오박사(편집자 주: 오덕교 교수)로부터 부탁을 받고, 박형의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저의 존경심은 더욱 깊어져 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박형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평소 교제도 나누었지만 박형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평소 박형에 대해 가진 “존”하는 마음이 “경”하는 마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박형은 그 정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고산”과 같은 느낌을 저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박형은 “孤山”(외로운산)으로서 “외로운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옛날 저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외롭다”곤 하셨는데, 책을 읽으면서 박형의 외로움을 조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박형의 외로움은 아마 박형 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형의 소리는 박윤선과도 다르고, 우리를 가르쳤던 여러 스승들의 소리와도 다른, 오늘날 한국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설교자들과도 다른 소리로 느껴집니다. 그만큼 박형은 한국교회의 대세를 거스리고 있으니 외로울 수 밖에 없지요.  

박형은 “高山”(높은 산)으로서 “큰 맥”과 “높은 봉우리”를 갖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박형의 첫 작품인 <구원 그 이후>(1984)로부터 가장 최근작인 <믿음의 본질> (2001)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는 탄탄한 일관성은 박형이 큰 맥을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한 평생의 목회에서 “신학적인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박형에게 이런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박형이 목회를 시작하던 1983년 경에 이미 신학적-목회적 체계를 탄탄하게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온갖 바람이 한국교회를 휩쓸고 가는 가운데에서도 늘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맥을 유지하며, 높이 세워가신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박형은 “古山”(오래된 산)으로서 “오래된 사상”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박형의 설교에는 신학자 이름 보다 영화배우들이나 만화가나 바둑기사들의 이름이 더 많이 나오지만, 개혁신학의 틀이 탄탄하게 깔려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박형은 늘 <스포츠신문>이나 들고 다니지만, 아마 남몰래 많은 독서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김홍전”에 대해 극찬에 가까운 평을 하는 것을 보면서, 박형이 단지 기발한 상상력에 의존하여 청중을 현혹시키면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바빙크와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고전을 더 많이 읽을 수 있었더라면, 박형은 어쩌면 “박형 사역의 완성을 다음 시대의 인물이 이루리라”는 비현실적 기대에서 벗어나, 박형 당대에 더욱 뚜렷한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스스로 이룰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도 갖습니다.

제가 볼 때, 박형은 “외롭고 높고 오래된 산”이지만, 박형은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고, 소위 박형을 흉내내거나 쉽게 비판하는 친구들은 더욱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형에게 “空山(공산)”이라는 호를 드리고 싶습니다. 원래 철모르는 속빈 사람들이 스스로 “巨山(거산)”이나 “靈山(영산)”이니 하지만, 박형에게는 “공산”이 더 어울립니다. 그것은 박형이 집요하게 자신과 교회를 “비우려고” 몸부림치고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평생 동안 그만둘 것 같지도 않습니다. 텅빈 산과 같은 박형의 모습 속에 박형의 “신비”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박형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저는 박형을 객체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비밀이지만 박형은 “냉철한 이성의 덩어리”라기 보다 “열정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저의 편지가 길어질 것 같고, 그래서 혹시 이 글을 읽게될 독자들을 위해 편의상 번호를 부쳐가며 편지를 써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앞으로 “신학”과 “신앙”에 대한 우리의 대화가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박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지난 50여년의 세월 동안 형성되어 왔지만, 저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diachronic) 역사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동시적” (synchronic)으로 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저의 “눈”으로 볼 것입니다. 박형의 눈도 작지만, 저의 눈도 작기로 보면은 만만치 않습니다. 또한 박형의 세계를 “저의 회로”에 연결시켜 보고자 합니다. 제가 그려본 박형이 박형에 가깝기를 바라고, 또 박형이 보지 못한 박형의 모습까지도 제가 보여준다 하더라도 너무 놀래지는 마십시오.

1. 목회신학의 중심: 인격적 성화론

박형, 제 생각에는 박형의 신학에 “중심”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강물처럼 끝도 없이 흘러가는 박형의 글들 속에서 제가 느끼는 박형의 “중심”은 “인격적 성화론”입니다. 제가 구태여 “인격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워치만 니파나 구원파처럼 “초월적”이지 않고, 오순절파처럼 “은사론적”이지도 않고, 또 “성화”라는 말 자체가 자연스럽게 내포하는 “윤리적-도덕적” 관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이유는, 박형의 모든 사고가 “인격적인 하나님”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박형을 “구원론의 도사”로 여기기도 하지만, 박형의 마음과 생각의 모든 중심은 “주님을 닮은 고급한 인격으로 자라가는 하나님의 자녀상”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이 글에서 박형의 “인격적 성화론”이 박형의 모든 사고체계와 목회 영역에서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 연결시켜 볼까 합니다.

2. “믿음의 본질”과 “인격적 성화론”  

박형, 제가 박형의 어디부터 볼까요? 배부터 쨀까요, 머리부터 깨어볼까요? 제가 볼 때는 어디를 째든 가르든, 박형의 소리는 하나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믿음의 본질”에 관한 열정이요 열심입니다. 그 열정이 박형 전체를 태우고 있는 에너지입니다. 박형의 모든 책과 설교와 사역은 “본질적인 믿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박형이 혼신의 열정을 다 쏟으며 내려찍는 듯 한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득은 한국교회사의 “주류”를 거슬러 가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여기에서 말하는 “주류”는 “정통”으로서의 주류보다는 “통속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지난 1970년대로부터 21세기를 시작한 오늘까지, 한국교회에는 수많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그동안 전도와 선교와 교회 성장과 큐티와 제자훈련의 바람이 있었고, 부정적으로 볼 때, 균형을 잃은 은사운동과 이장림의 휴거소동과 신유운동과 토론토 블레싱 등이 있었습니다. 물론 전자가 모두 긍정적이고, 후자가 모두 부정적이란 말은 아닙니다. 어쨌던 신기하게도 박형은 단 한 번도 이런 바람에 휘말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포교회는 늘 역동적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제자훈련”과 “은사운동”의 축을 왔다갔다하지 않을 수 없고, “전도”와 “선교”는 주님의 지상명령으로서 교회 제일의 우선순위로 여기지 않기가 힘들며, 특히 한국교회는 별다른 반성 없이 이 큰 물줄기에 휩쓸려 내려 왔는데, 박형은 늘 여기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자신감과 권위를 잃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믿음의 본질을 향하여 줄기차게 움직이는 박형은 철저한 구심력주의자입니다. 한국교회가 철저하게 원심력적이라면, 박형은 죽을힘을 다해 구심력적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팔이 왜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박형, 박형은 왜 이렇게 “이미 잘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 왜 쉴새 없이 “믿음”에 대해 말하지요?

박형의 “믿음”에 대한 관심은 신학을 하기 전부터, 신자로서 늘 갖고 있던 “오래된 관심”이요, “집요한 관심”으로 여겨집니다. 박형이 끈질기게 믿음에 대해 물고늘어지는 이유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양면의 배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부정적으로 볼 때, 한국성도들의 기본적인 신앙은 “기복적”이며 목회자들은 “사업가”로 변질되었다는 점이 박형의 기본적인 이해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교회의 신자들과 지도자들이 가진 신앙에서 가장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할 것은 기복신앙과 지도자들의 자기 증명 욕구입니다. 어느새 지도자들의 자기 증명 욕구와 신자들의 기복 신앙적 욕심이 손을 잡고 사업을 벌이는 일종의 기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인격적이고 전생활적인 신앙 책임은 외면한 결과로 신자 같지 않은 신자들을 동원하여 큰 사업을 벌여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을 사회적으로 확인 받는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모델이 되는 것은 잘못입니다.” (<독설> p,302).

교인들의 기복신앙에 대해 박형은 자주 “알라딘의 마술램프”로 멋있는 예증을 하고 있습니다. “마왕이 가진 능력을 필요로 할 뿐이지 마왕이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마왕의 주인은 알라딘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최고 약점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쓸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땅을 치고 통곡할 문제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박형은 통속적인 축복관을 날마다 부수느라고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하고 진급 잘하고… 추석 때에 내가 바치는 뇌물보다 들어오는 뇌물이 더 많고… 차리리 ‘증권거래소’로 교회 이름을 바꾸십시오. 여러분들은 축복이 목표이고 잘 사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목적은 결국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오래 버티려니까 쌀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연관하여, 박형은 워치만 니에 대해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워치만 니는 진지하고 성결하고 신령하지만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그는 믿음을 오해했습니다 (마11:28-30 참조).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모든 것을 바치면 그 보상으로 하나님이 나머지는 다 해주신다고 이해합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이런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에는  결벽증이 나타납니다. 신앙이 활동적이지 못하고 대단히 관조적으로 흐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앉아서 다 합니다. 그는 허구헌날 ‘내려 놓으라’고 말하고, 내려 놓았는지 안 내려 놓았는지 진지하게 회개하자고 하는 데, 이게 완전히 육갑 떠는 것입니다.”(<설교자의 열심> p.177).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박형의 “믿음론”을 볼 때, 박형은 이 분야에 있어서 분명히 일가견을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박형의 내면적인 고민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저의 의문점은 대표적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런 믿음이 생깁니까? 그것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선물입니까,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연습하고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인가가 큰 숙제였습니다.” (<믿음의 본질>).

박형은 이 숙제를 이미 <구원, 그 이후>와 <하나님의 열심>에서 풀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두 책에서 박형은 “믿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전환의 출발점은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박형이 볼 때,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에 가서 비로소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하며 알며 믿게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44). 즉,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이런 논리로 박형은 믿음의 인물들을 평가절하 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형 손에만 잡히기만 하면, 아브라함 뿐 아니라, 여호수아 (“모세의 따까리”)나 다윗 등 누구나 모가지가 잘려 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박형의 평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과 인도함을 몇 십년 동안 경험하여 15장에서 드디어 ‘나, 하나님 믿습니다’하고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48).

이런 구도에 근거하여 박형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반응과 책임과 결단, 이런 것을 믿음의 요소로 채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부름 받았을 때 결과를 모르고 순종했습니다, 여기만 믿음의 요소가 있는 것으로 생각 마십시오. 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부른 하나님의 부름도 말하자면 믿음의 부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 p.41).

동일한 맥락 속에서 이와 비슷한 박형의 입장을 하나만 더 들어봅시다. “구원에 관한 믿음에 있어서, 그 믿음은 신뢰나 결단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따라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원인 없이 주신 것입니다. 이 믿음은 결단이나 선택, 책임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초점은 ‘예수’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을 내 선택이나 결단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 왜 믿음이란 용어를 썼습니까? 그것은 행위가 아니며, 또한 예수를 보낸 하나님이 인격자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박형, 이런 글을 보면, 박형도 “유한한 역사적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왜 “아브라함의 반응과 책임과 결단”을 우리가 “믿음의 요소”에서 배제해야 합니까? 믿음은 우리편에서 보면 “반응과 책임과 결단”이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은혜요 선물”입니다. 저는 이 둘이 대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박형이 이것을 대립시킨 이유는, 물론 저의 추측입니다만, 박형이 빌리 그래햄 식의  “결단”에 대한 알레르기적인 반응과 또한 박형이 몇 대째 “모태신앙” 교인이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박형처럼 진골의 반열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동정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과 결단은 믿음의 요소에 들어가도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들어갔다고 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반응”과 “결단”이 너무나 하잘 것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제가 박형과 의견을 약간 달리하지만, 믿음의 본질 부분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제는 박형의 믿음론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박형이 볼 때,

“믿음이란 일차적으로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뢰이며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입니다. 즉, 믿음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고 인격에 대한 신뢰인데 성경에서의 믿음은 사실에 관한 것보다는 인격에 관한 신뢰 쪽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만 만들어지는 관계입니다” (<믿음의 본질> p.12).

박형은 믿음의 인격성과 삶의 문제에 대한 정의에 근거하여,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 하면 모두가, 저 깊은 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분출되는 용암일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합니다. 너무 하고 싶어서 못 참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건 누구나 하기 싫습니다.” (<구원이후> p.256).

같은 맥락에서 박형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문제를 어떤 신앙적인 열심과 환상 속에 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이후> p.266). 한 마디만 더 들어봅시다. “신앙은 어느 날 약 한 첩 먹는다고 쑥쑥 크지 않습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는 것입니다.” (<설교자의열심> p.158).

이렇게 믿음을 단지 영적인 열정으로 보는 입장 뿐 아니라, “초월적이고, 신비적이고, 획기적이고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 신비한 방법으로서” 믿음을 이해하는 것도 박형은 가차없이 산산조각나고 있습니다.

끝으로 박형이 볼 때, 믿음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과 삶”을 지향하는 태도요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들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요,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아량과 배려와 베풂에 있어서 그리고 용서와 관용과 사랑에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이런 것들이 최우선의 원리와 특색과 특징과 또는 풍습과 분위기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선착순 경쟁 때문에 어디에도 양보나 용서가 없고 희생도 섬김도 없고, 같이 가기 위한 노력도 없고, 남을 돕기 위해서 내가 저주는 그런 여유도 없습니다”(<믿음의 본질> p.170).

끝으로 박형은 믿음에서 “균형”을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푸시는 은혜와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나의 책임의 균형을, 질서를, 조합을 이해하신다면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좋은 신앙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347). 제가 “균형”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3. 성화지향적 구원론

박형은 “믿음론”에 근거하여 “구원론”과 “성화론”을 잘 통합하고 있습니다. 즉, 박형의 구원론과 성화론은 박형의 뿌리를 형성하는 믿음관에 근거한 두 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글을 봅시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에 관하여 가장 혼동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생기는 믿음과 책임져야 하는 믿음의 구별이 모두에게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받는 믿음이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복시키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성품과 인격에 대한 우리의 책임 있는 반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그리고 바울을 닮는 것에서 본바와 같이 성품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250).

여기에서 박형은 믿음을 “생기는 믿음”과 “책임져야 하는 믿음”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자는 “구원받는 믿음”이고, 후자는 자라가야 하는 “성화의 믿음”입니다. 박형은 또 다른 부분에서는 전자를 “신분의 구원”으로, 후자를 “수준의 구원”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 p.294).

박형이 볼 때, “생기는 믿음”은 우리 속에서 자생적인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으로 하나님과 나를 알게 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신분과 운명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라서 이 인격적 항복이 당연히 결과가 되는 것이고, 구원의 조건이기 보다 결과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는 인격적 항복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135).

이 “구원받는 은총”(Saving grace)은 거저 주신 믿음이므로, 그것은 박형의 신학틀 속에서 “예정론”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도 기계적인 것이 아님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박형이 볼 때, 예정론은 “우리가 빼도박도 못하게 구원받았다’는 식의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인격적으로 계획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 때부터 계획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설교자의열심> p.18). 즉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결단을 구원의 원인으로 밀고 나가지만,

“’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에게 그 분의 은혜를 확인시켜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내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원의 원인은 창세 전으로 돌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때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동)

그러므로 박형이 볼 때, 구원은 믿음에 선행합니다. “믿음이란 인격과 인격 사이의 가장 고급한 신뢰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구원 얻은 백성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를 믿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진 것이며, 그래서 믿음이 시작되려면 하나님이 먼저 구원을 베푸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99).

따라서, 박형은 기독교적 구원에 대해 명료한 정의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그 구원은 즉각적이며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구원은 서서히 얻지 않습니다. 구원은 단번에 얻습니다. 한번 믿은 것에 더 붙일 것이 없습니다. 즉 신분의 구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출생하였습니다.” (<믿음의 본질> p.294).

박형의 초기 글들을 보면, 구원의 확실성을 강조하려고 노력한 적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신분에 관한 한, 우리의 인격과 상관없이 확신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뻔뻔스러워야 함”을 주문하였습니다. 상상이 넘치는 박형의 설교를 들어봅시다. “어떻게 구원은 받았는데, 어쩌면 나는 팬티도 못 입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몇 년을 믿어도 그게 그것입니다.” 박형은 <바람불어 좋은 날>이란 영화를 가져오면서, “오늘은 내가 개판 친 은혜의 날, 오늘은 내가 주의 품 안에서 몹시 보챈 은혜의 날, 오늘은 내가 하나님의 가슴을 몹시 상케 한 감사의 날, 오늘은 감히 주의 얼굴을 뵙기 낮 간지러운 감사한 날”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의 설교로 넘어오시면, “구원”이 성화론적 지향성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이라 하면, 나라는 인격이 바뀌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면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설교자열심> p.141). 이와 연관하여 박형은 아주 독특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인격의 본질에서 다릅니다(엡 4:21-24).” (<믿음의 본질> p.154). 또한 “우리가 믿으면 우리의 영이 살아난다” (<에베소서 강해> II).

4. 성화론

      

박형, 박형의 데뷰 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 그 이후>는 “구원론” 보다는 “성화론”을 중심으로 다루는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후, 그 이후의 삶이 그의 “신자로서의 신분”을 뒷받침해 주지 못해 좌절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분발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거지 왕자> 이야기를 봅시다. 원래 왕자였는데, 거지가 되었다가 다시 왕자의 신분으로 돌아온 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자 마마, 아침 진지는 드셨나이까?”라고 인사를 받으면, “그래 편히 잤다. 이 새끼들아”라고 대답합니다.

<거지 왕자>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난 이야기를 통해 더욱 실감나게 만들어집니다. “강화도령 철종은 일자무식쟁이였습니다. 혈통을 따라 철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의 혈통으로 태어난 것과 왕답게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구원이후> p.254). 그리고 박형은 박형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를 성화론의 중심 구절로 인용합니다.

이와 같이 박형은 “출발선(start line)과 결승선(goal line)의 갈등, 목적지와 현재 위치 사이에 큰 거리, 이 둘 사이에 있는 긴장과 이율배반과 불연속성”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결승선까지 나아가려고 애쓰지 않고, “십일조 내어주고, 주일성수 하는 정도”의 선에서 타협하고 살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출발선으로 만 돌아와 “구원”만 확인하는 데서 벗어나 더 확실한 결승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구원”과 “성화”의 통일성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출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자라나는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수준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본질> p.294). 박형은 시제의 관점에서 새로운 분석의 틀을 제공합니다. 즉, “구원받았다는 완료형은 신분의 구원이며, 구원을 받는 중이라는 진행형은 성화의 수준에 관한 것이며, 구원받을 것이라는 미래형은 하늘나라에서의 영화의 상태를 말합니다.” (상동). 여기에서 박형은 “구원”의 틀로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모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은 “성화”에 있습니다.

실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형은 “자존심”을 성화의 주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우월감을 누리고 싶은 싸움을 걸어놓고 하나님보고 도와달라고, 제가 이웃을 사랑했노라고, 양보했노라고… 우기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이기에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후> p.139). 최근에 나온 말씀을 하나 더 봅시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제일 아프게 부딪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최악의 죄성은 자신을 증명하기에 바쁘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일에 바쁘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내가 영광을 받아서 그것의 일부분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좋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내가 죽고 손해보는 일이라면 본성적으로 ‘못한다’고 자빠지게 돼 있습니다.” (<독설> p.210).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박형은 개혁신학의 칭의론적인 강조가 성화론적인 삶을 약화시켰다고 봅니다.

“우리는 신분의 구원을 자라나야 되고 연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 성화의 과정에 대입시켜 버리곤 합니다. 우리가 ‘칭의’라고 하는 이 ‘신분의 구원’을 한번에 영원히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받아버리는 것 같이, 성화의 내용들도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초월적인 방법으로 단번에 영원히 완전하게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294).

이런 치우친 성화의 극단적인 형태를 박형은 구원파 계통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구원파에도 여러 유파가 있습니다. 구원파라 지칭되는 집단이 있고, 베레아파, 레마파, 다락방 운동, 워치만 니가 이 파에 속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된 구원 같이 믿음의 선택, 신앙의 고급한 경지도 은혜로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매달려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로 믿음의 고급한 경지를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때 제일 먼저 은혜를 받아가기 위해서 늘 하나님 앞에서의 일들을 강조합니다. 늘 기도하고 세상을 등지고 가능한 하나님 옆에 붙어 있고자 합니다. 언제 하나님이 은혜를 던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 때 제일 먼저 받아 가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295).  

따라서 박형은 “초월적이고, 획기적이고,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 신비한 방법”을 기대하지 말고 (<믿음의 본질> p.347), “책임지는 믿음”으로서의 “성화”는 우리가 애써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오늘 마땅히 왕으로 살아야 할 부름을 받은 것과 왕으로서 완성되어 있다는 것은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형은 인격적인 성화론을 참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사무실에 있으면 “몸성한 불구자들”이 찾아오고 “지혜로운 거지들”이 찾아오며, 너무나 “경건한 모습”을 가진 사기꾼들이 찾아오는 장면을 포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속아라. ‘참 수고가 많습니다. 그 지혜 가지고 나가서 벌어먹으시면 재벌이 되셨을 텐데 그걸 가지고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거짓말을 하시는군요.’라는 말을 속으로 하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뒤에서 욕하십시오. 앞에서 욕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앞에서 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무례하고 무식한 것입니다. 뒤에서 욕하는 것은 그나마 양심이 있고 상식이 있습니다. 치사한 것은 아닙니다. 앞에 대놓고 욕하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박형, 도데체 이런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박형, 박형의 성화론에 있어서 “열심”과 “노력”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잘 아시지요? 조치훈에 대한 박형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조치훈은 가장 열심히 바둑 두는 사람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둔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루는 그에게 ‘어떤 기사가 제일 무서운가?’라고 묻자, ‘천재는 겁나지 않는다.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은 겁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의 본질> p.241). 저는 이 부분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볼 때 박형에게는 천재성이 있고, 저는 노력형이니까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노력”의 중요성에 대한 박형의 이야기 하나만 더 듣고 갑시다.

“탁구선수들의 탁구공은 2.5그람입니다. 그 탁구공에 힘을 싣기 위해서 역기를 들고 매일 육상 선수들 이상으로 뛰고 줄을 탑니다. 그렇게 애를 쓰고 2.5그람짜리 탁구공을 라켓으로 힘껏 때려도 공이 안깨지니 희한합니다. 우리 신앙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 불러 거룩하고 영광된 자리로 부르시는 그 과정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쉽겠습니까? 아무 연습 없이 하루 아침에 ‘열려라 참깨!’ 하고 외치면 문이 열리듯 그렇게 될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믿음의 본질> p.345).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형, 박형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아세요? 사람들은 모르지만, 저는 싸늘한 눈빛과 냉정한 듯이 보이는 얼굴 배후에 있는, 박형의 진심어린 따뜻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똑똑해 봤자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잘났다는 거지 따뜻하지가 않습니다. 똑똑함과 따뜻함을 겸비한 사람은 정말 흔치 않습니다.” (<독설> p.277). 즉, 기독교적인 성화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처럼 혼자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성화론적 교회론

박형, 사람들은 박형이 “새벽기도도 안하는 게으름뱅이 목사요, 당구장에서 부목사들과 돈 따먹기하고 논다”고 험담도 하지만, 박형의 가슴은 오직 교회에만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박형의 목숨도, 가정도 교회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내어놓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는 대학1학년 때 선교단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어, 도무지 교회에 대해 감도 없었고 열정도 없었는데, 박형의 그 열정을 볼 때마다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박형은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꾸짖는 데 명수입니다. 이 버릇은 최근에 생긴 것도 아니고, 사역의 초기 때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교인들을 마조키스트적으로 죽으라고 치는 것은 습관적입니다.

“사실 우리는 8세의 10세, 혹은 8세의 40세,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햇수만 갔지 영적인 나이가 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세를 40년 유급하고 계시다던가 아홉살을 50년째 유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의 가장 아픈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반발을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교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 오면 혼나는 말씀을 듣는 데 저쪽 교회만 가도 여러분 편을 들어 줍니다.” (<구원, 그이후> p.67).

최근에 나온 <독설>에도 “교회론”에 대한 반성이 많습니다. “오늘 날 교회의 제일 큰 병은 교인 수는 늘어가는 데 교회 본연의 영향력은 감소되는 데 있습니다.” (p.33). 또한 오늘날 사회가 “물질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는 정황에서 “큰 일”을 벌리는 목회자들과 “대형교회”의 시험에 대해 박형은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형은 “사업 중심”의 교회론에서 “교인들의 신앙이 성숙해 가는 교회”(<독설> p.53)로 우리를 계속 끌어가고 있습니다. “지엽적인 부분의 싸움이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많습니다. 교회에 생명에서만 풍겨나오는 부요함, 융통성, 따뜻함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일하기 위해 정해놓은 원칙이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생명과 인격을 다룬다는 개념이 없이 ‘맞느냐, 틀리느냐? 괜찮다 죽이자”의 원칙만 있습니다.” (<독설> p.189).

박형이 볼 때, 교회는 “군대나 학교와 다른 곳입니다. 그런 곳보다는 가정에 훨씬 가깝습니다.” (<설교자열심> 51). 그러므로, 교회는 “그 존재와 목적에서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의 공동체나 단체들의 존재목적은 그들 스스로 살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최고의 사람을 기용하고 그런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남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독설> p.238).

결론적으로, 박형이 볼 때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며, 또한 하나님의 교회됨의 자태를 충분히 드러낼 때 모든 일들은 자연스럽게 열매로 맺힐 것입니다.”(<독설> p.303). 따라서 박형은 온갖 운동과 사업으로 분주한 교회에서 성도의 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교회로 방향 전환을 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5. 성화론적 성령론

      

박형, 박형의 성령론은 약간 바람을 타면서 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이 시점에서 박형의 <성령론>과 <사도행전 강해>를 못읽었는 데, <에베소서> 강해를 보니까 박형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족하다”고 여기는 보수주의자와 “성령의 부어주심에 관한 기쁨과 특별한 체험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는 오순절파를 대립시키면서, “나는 중용의 도를 취하고자 합니다. 내 태도가 이렇게 된 이유는 우선 내가 분명하게 정의를 내릴 만큼 실력이 일단 없고, 양쪽 주장이 너무 팽팽하고 다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강해> I: 252. “성령의 인침”).

이어서 “이전의 <성령론>과 <사도행전강해>에서는 전통적 입장을, <에베소서 강해>에서는 로이드 존스를 따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p.253). 아마 박형은 차영배 교수의 성령론적 시각을 따르다가, “보수주의자로서 드물게도 오순절파적 성령론 개념을 수용하는 분”인 로이드 존스의 글을 접하면서, 오순절적인 입장을 상당히 수용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박형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성령께서 신자 모두의 내면 속에, 존재 속에 함께 하시는 곧 내주하시는 성령 말고 밖에서 직접적이고 주권적으로 그를 충만케 하고 넘치게 하는 성령의,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 같이 성령충만, 혹은 성령세례라는 것이 실제로 있으며 그것이 성령이 요구하는 내용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있는 것’으로 봅니다”라고 답합니다 (<에베소서 강해> I: p.269).

그렇지만, 박형 저는 그동안 한국교회 신학계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 문제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으며,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내주하는 성령” 개념과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세례”를 넘어 훨씬 풍부하고 다양한 성령의 사역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던 <에베소서 강해>에 나타난 박형의 성령론은 다른 곳에 나타난 성령론과는 색다르며, 이 부분에서는 일관성을 찾기 힘듭니다. 또한 박형의 최근 글로 넘어 가보면, 박형이 원래의 성령론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이 나를 장악해서 나로 하여금 내가 연습하고 노력하고 애쓴 것이 아닌 것들로 하늘로부터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고 지키고 노력해서 가야 하는 책임 있는 시간과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p,327).

6. 성화론적 목회론과 직분론

      

박형, 박형이 “왕따”인 것을 아시나요? 저도 사실은 왕따입니다. 나는 선한 사람 같은데 왜 사람들이 나를 왕따 시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박형은 왕따당할 만한 독한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목회도 성공 위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목회성공비결’ 같은 세미나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데, 그런 세미나는 거의 99%가 사기입니다. 목회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충성만 있을 뿐입니다.” (<독설> p.270).    

“세상에 성공 비결이 어디있습니까? 이렇게 교계가 성공에 미친 집단이 되어버렸으니 참 슬픕니다.” (<설교자열심> p.30).

“물양주의적 자세가 설교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다 놓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분의 심정은 안 보이고, 내가 지금 이루려는 욕심과 계획이 우선이 됩니다.” (<설교자열심> p.38).  

이런 독설의 배후에는 박형 특유의 “목사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형의 초기 글을 보면, 목사는 “분명히 어떤 경우에는 신자들 앞에 하나님의 대표자입니다. 신성한 일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훨씬 완성과 완벽한 일의 상징이어야 됩니다.” (<구원, 그 이후> pp.23-24). 박형은 그 때, 얼마나 큰 안타까움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감당을 못해서 어제 밤 같은 경우에도 잠을 설치고 말았다. 말은 해야겠는 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몰라서 쩔쩔 매는 것을 보십시오. 이 안타까움을 아십니까? 울어서 전달이 된다면 울겠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시키시는 그의 뜨거우심과 그가 우리에게 갖고 계시는 안타까움들을 어떻게 대변해야 될지 이 약한 심성과 이 약한 역량을 갖고는 담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 그 이후> p.23).

박형은 “소모품”으로서의 목사직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본질> p.192). 목사는 “양들을 위한 목자”이며, 따라서 “늑대 떼를 물리치다가 팔을 잘리고 다리도 잘립니다. 그러나 영웅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동안 먹지 않고 여러분 위해 이렇게 고생했는 데, 이제 설교 못한다고 쫓아내깁니까?’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동정마십시오.”라는 혹독한 말도 아끼지 않습니다.  

목사직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엄격하지만, 박형은 다른 직분자들에 대해서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장로”에 대해서는 “경험과 분별력과 지혜와 긴 안목의 기다림과 관용이 있는 교회의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칼이 아니라 뒤에서 손든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독설> p.60). 또한 “장로들”에게 참 좋은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생명을 다룬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맞고 틀리는 것이 언제나 전부가 아니며,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바른 원칙에 서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며,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융통성이란 변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좀 더 깊은 이해심을 갖자는 것입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이 대원칙을 모르면 그릇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설> p.186).

“무서운 장로가 되지 마십시오. 진리를 지켜내는 일에는 무서운 투사가 되어야하지만, 교회에서는 따뜻한 분으로 통해야 합니다.” (<독설> p.192).

제직론에 대해서도 박형의 성화적 관심은 특별합니다.

“제직들은 교회의 일꾼으로서 모든 일에 흔들리지 않는 무게를 지닌 사역자로 존재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언비어, 혼란, 불온한 흐름, 바람직하지 못한 여러가지 일들이 생깁니다. 이럴 때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 때는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하고 흔들리지 않는 무게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 무게 중심이 제직의 역할이지 스피커가 제직의 역할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는 데 말 안하고 문제로 삼지 않으며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가만히 있는 것, 이것을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말을 함부로, 가볍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해킬 위험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독설> p.232).

7. 성화론적 그리스도인의 삶

          

박형, 박형의 가르침 가운데, “옳은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의 옳은 것이 남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는 말씀은 제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 형제와 동료의 그릇됨을 드러내는 데 목숨을 걸고 있는 현실 속에 살면서, “진정한 옳음은 남을 옳게 하는 것”이라는 박형의 명제가 진정한 삶의 원리요, 성경적인 “의”라고 생각합니다. 박형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이런 삶의 원리가 신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양한 차원을 포함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도와 선교 및 사회정의와 아디아포라 문제 및 박형의 여성관까지만 보고자 합니다. “전도와 선교”를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이 두 영역도 성도의 삶과 연관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두 영역은 그동안 종교적인 사역의 영역으로 여겨져 많은 오해가 생겼으므로, 우리는 삶의 영역으로 가져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두 영역에 대해 박형이 호의적이지 않고, 어쩌면 적대적이라는 느낌을 사람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시각의 교정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도”를 “복음의 습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형의 묘사를 하나 들어 봅시다. “예수 믿으십시오.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이렇게 소리지르고는 싹 돌아와서는 ‘오늘도 수고했다’고 축배를 나눕니다. 이건 순 악당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전도하시면 이것은 사기요 기만입니다. 전도란 그것 보다 훨씬 지독한 집념과 주를 사랑하는 기가막힌 정열에서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화가 안될 것을 각오하고, 경멸과 오해를 각오하고 나가는 행위입니다.”  

또 다른 곳을 보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하고 전도지를 들고 이야기를 할 때 상대방이 ‘살모사’ 눈을 뜨면 이쪽은 ‘코부라’ 눈이 되는 그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는 데 어디다 대고 눈에 힘을 주고 쳐다봅니까? 그러나 이런 괄시를 당하고 사는 것이 ‘나’이기 전에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 그 이후> p.184).

최근에 나온 <독설>을 보면, 박형이 전도와 선교 자체에 대해 어떤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교단체와는 달리 교회 자체가 가져야 할 선교적 시각을 올바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란 세상적 집단의 욕구를 그대로 따라 대규모 인원을 모으는 데 기술과 방법을 동원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과 초대 교회 신자들의 선교적 섦에서 나타난 신자 각 개인의 성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는 증거자를 만드는 것으로 그 원리가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가 그 선교적 사명의 우선적 목표를 행함의 차원에서 설정하며, 그에 따른 능력과 기술을 교육의 목표로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도전략, 전도훈련 등은 그 교회의 교인으로 인식되어, 어느새 보이지 않게 요구되는 자격 요건이 되어 버린다. 신자됨의 기준과 평가에서 벗어납니다.” (<독설> p.291).

즉, 교회가 전도나 선교를 가르치고 실천함에 있어서 “전인격적”이어야 함을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육적 사명의 목표는 인격적인 완성, 전인적인 완성입니다. 즉 교회의 교육적 사명은 기술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라남과 성숙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의 보수교회는 전도와 선교는 열심히 하였지만,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방관적이었고,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영역에 대한 박형의 생각은 일차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 같습니다. “사회정의를 설교하는 것은 그리 녹녹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제, 선행, 사회정의를 위한 우리들의 역할 등을 설교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동안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 송사리 때려잡는 식으로 그동안 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설교자열심> p.96).

“사회정의”에 대한 박형의 생각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국민이 각자의 책임을 제대로 시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지금 제일 급한 것이 교회의 정상화, 목회자의 자기 갱신입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기 전에 먼저 신자다워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 사회변혁 이전에 거룩한 싸움을 해야 한다.” (<설교자열심> pp.100-1).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공연에 대한 박형의 생각에 저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마이클 잭슨 공연을 반대하기 전에 교회가 제 역할을 하고 목사가 목사 다워지는 일을 서둘러야 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오느냐 안오느냐, 우리 사회의 문제가 이런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열심> p.100).

“주초론”에 대한 박형의 생각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특히 몰래 담배를 피워 위기에 빠진 고신 선교사에 대한 박형의 해석은 우리가 귀 기울일만 합니다. 사람들은 그 선교사가 담배를 피운 죄 위에 “몰래 피웠다”며 비양심적인 인간으로까지 몰고 갔는데, 박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선교사가 속인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교인들의 신앙양심을 위하여 본인이 권리를 사양한 것이었습니다. 몰래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행사할 때에라도 우리 양심에 저촉되지 않게 숨어서 해준 것입니다. 대단한 수준인데도 우리는 그런 것을 속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발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독설> p.189).

“결혼”과 “이혼”에 대해 박형은 “성화론적” 관점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결혼 생활”에 있어서 박형은 “아내가 순종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참 여유 있게 설명하십니다.

“왜 밤낮 여자들보고 순종하라고 합니까? 남자들은 안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상징이 그렇다는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맡은 배역이 그런 것입니다. 남자는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신부는 교회의 상징이 아닙니까? 자기가 맡은 배역이 그렇다는 것이지,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맡은 역이 억울할 때도 많습니다.” (<독설> p.182).

즉, 순종하기 어려운 역할이라도 주님의 성품을 우리 속에 이루기 위해서 성경의 말씀대로 잘 감당하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 원리는 “이혼”에도 적용됩니다. “기독교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책임이 부부됨의 첫번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독설> p.180).    

그런데, 박형, 박형이 여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성차별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아시는지요? “우리나라는 대체로 여성들이 셉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보통 여성들이 좌우하고 있고 실제로 교회들의 실세가 대부분 여전도회 회장입니다. 어느 교회나 가보면 여전도회 회장은 안 알려 주어도 누구인지 척 보면 알수 있습니다. 남대문 시장 골목길의 암달러 장수 아줌마같이 생겼습니다. 일을 해서, 거칠어진 것입니다. 수십년 신앙생활을 했는 대도 교회 일에만 익숙하고 예수를 닮아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본질> p.152).

아주 독특한 “여전도회장관”입니다. 그러나 “권사관”에 있어서도 비슷한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권사는 어머니 노릇하는 것입니다. 권사 뽑히는 데 생사라도 달린 일인 양 요란을 떠는 사람이 많습니다. ‘안되면 나는 죽는다.’부터 시작해서 ‘창피하다.’는 둥 안된 사람들은 울고 야단법석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내가 삐치면 절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이렇게 자신을 증명합니다. ‘난 몰랐어’하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대단히 분노하는 표현입니다.” (<독설> p.211).  

박형만큼 인간을 잘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박형, 박형의 “여전도회장”이나 “권사”에 대한 묘사는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이것은 “장로”나 “제직”에 대한 신중하고 고상한 묘사와는 대조적입니다. 박형, 여성들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시고,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온전한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 성도임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8. 신학론

박형, 요즈음 신학생들을 보면, 솔직히 말해서 좀 화가 나지요? 요즈음 친구들은 도무지 책을 읽지 않네요. 박형 말씀처럼 온갖 잡된 세미나에만 좇아다니고 있군요. “신학생들은 신학교만 오면 그냥 병든 닭새끼들 마냥 축 쳐져 앉아 있습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상한 집회, 세미나, 심포지엄에 좇아다니다가 나중에 욕을 먹습니다.” (<설교자열심> p.70).

이들은 아직도 “신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경조차도, “쓰윽 한번 읽으면 깨달아지는 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열심> p.54). 또한 “이상하게도 ‘신학’ 하게 되면 노력하거나 연습해서 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꾸 위에서 뭔가 뚝 떨어지는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본질> p.141).

사실 이 친구들은 신학을 너무 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갖고 있는 “사고의 경직성”이 참 우려됩니다. 그들의 “사고”는 이미 다 짜여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신학함에는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데, 이런 건 미리 배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왔으도 신학을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 서로 견해가 다르면 다 퉁겨냅니다. 결사각오를 가지고 덤비기 때문에 교수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반대할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채 반대하는 것은 학문적인 비판이 아니라 정신적인 경직입니다. 사고도 분별도 텍스트도 없습니다. 신학생의 논쟁은 열심이 아니라 집착, 광신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설교자열심> p.112-14).

이들이 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평생 고생할 것 같고, 특히 설교에서는 더욱 고생할 것 같습니다. 박형은 설교와 신학의 관계에 대해 참 잘 지적하셨습니다. “결국 설교는 신학의 싸움입니다. 옛날 같이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렇게 간단한 신학을 가지고 설교하려면 안됩니다. 지금도 그것 밖에 없다면 이게 무슨 신학입니까? 이런 신학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입니다.” (<설교자열심> p.73).

사실 “신학이 깊으면 설교가 익는다”는 박형의 말은 참 적절합니다. 박형은 정말 깊은 신학을 갖고 있는 설교를 좋아하시는 것을 아시지요? “삼손을 자서전적으로 평가하면 삼손 메시지의 가치가 손상됩니다. 신학적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삼손을 개인 윤리 차원에서 해체시키면, ‘하나님의 사람은 실패하면서도 목적지에 가고야 한다.”는 신앙의 중요한 층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설교자열심> p.62).  

그렇지만, 우리는 어쨌던 이 아이들을 올바로 키워야겠는 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의 신학교들이 진정한 “학문과 경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텐데, 저도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교계는 1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설교에 신학이 배어 있는 수준은 유지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렇게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설교를 하려면 성경학교가 아니라 신학교를 세워서 목회자 후보생들을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이런 것들을 차근히 가르쳐주려면 제 주제도 모르면서 서둘러 칼부터 뽑으려고 합니다.” (<설교자열심> p.70).

어떻게 우리가 우리 학생들의 도식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보다 창의적이며, 더욱 폭넓게 사고하고 추론하는 훈련을 시켜갈 수 있을까요? 어쨌던 이 아이들도 우리의 자식들이고, 다음 세대를 책임져야 할 주의 귀한 일꾼들이니, 그들이 우리의 어깨를 딛고 더 높이, 더 멀리 보도록 키워 보아야겠지요?

<나가면서>

박형, 이번에 제가 박형의 여러 설교들을 보면서, 박형이 얼마나 독특한 신학적 세계를 이루고 있는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박형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격적인 성화의 삶”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기본적인 출발점인 “칭의론”에서 일단 벗어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물론 박형이 개혁신학의 칭의론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약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점이 박형의 강점이요 기여입니다. 즉, 칭의론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성화론으로 중심적인 축을 옮겼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교회가 “구원의 봉우리”를 너무 높이 세워, 그 이후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더 높은 봉우리들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버린 정황 속에서, 박형은 “구원의 봉우리” 보다 더 높은 “성화의 봉우리”를 세워, “구원” 이후에 나아 가야할 방향을 뚜렷이 제시하였습니다.

사실 “구원”과 “성화”는 우리 신앙의 두 중심 축이지만, 우리들은 한쪽으로 늘 치우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구원파는 “구원”과 “성화”를 한 봉우리로 만들어 버려, 성화가 잘 안된 사람을 보면 마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쳐버렸습니다. 성결 운동파와 오순절 은사 운동파는 “구원은 일단 받지만,” 이후에 소위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며 “구원”과 “성화”의 봉우리를 이중구도로 분리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박형은 “구원”에서 시작하여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는 길을 성경적으로 통합하여 목회의 현장에서 뚜렷이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봉우리들이 단지 “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삶”의 자리들이며,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서 이루어 가야할 “인격의 봉우리”임을 시간이 갈 수록 뚜렷하게 제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박형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볼 때, 박형은 진정한 “개혁주의 목회 신학자”입니다. 박형은 개혁신학의 “하나님 주권 사상”과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가장 잘 설파하였고, 개혁신학에서 늘 양날의 칼로 갖고 있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도 완벽하게 소화하고 적용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박형은 개혁신학에 입각한 설교와 목회의 진수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박형, 늘 건강하시고 남은 목회의 삶이 이전의 삶 보다 더 풍성하길 빕니다.

                                                       주 안에서

                                                김정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