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2) (히8:1~13)

2018. 12. 9(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 목사님의 설교집이나 저서 등을 잘 정리하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모두 없을 때에도 그 책들이 우리의 후배들과 자손들에게 등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목사님의 설교를 한번 주의 깊게 들어 보라. 목사님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인데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젠가 강의를 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이해력, 온유, 겸손 같은 것은 자신이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질 수 없다.”

왜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하고 실패도 어떻게 일을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게 해 주시는 말씀이다. 사실은 위의 얘기를 하시면서 한 말씀 더 하셨다.

“실패해 본 사람의 온유가 아니라면 그냥 동정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다.

(3) 이번에 다시 보는 히브리서(12) 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신자답게 못했다는 회개기도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래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은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열과 성을 다해 우리를 불러내시고 자식교육을 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늘 저 혹시 주워온 아이 아닌가요,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이러고 있다고 야단을 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어디에 좀 써 놓아야겠다.

2. 내용

가. 서론

(1) 예수님은 이제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고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더 좋은,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약속, 그것의 중보자라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히브리서 전체가 다루는 주제, 신앙생활을 하는 현실이 왜 이렇게 고단하냐는 물음에 답하고 있다. 당시는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지만 어느 시대에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다 어렵다. 히브리서는 거기에 대한 답을 뜻밖에도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2) 우리는 신앙에 대한 점검을 할 때에는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에 익숙하다. 히브리에서는 십자가로 돌아가지 않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높으신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대제사장직의 직분을 지금 수행하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 인생의 고단한 신앙 현실에 대하여 격려를 한다. 이 문제는 8장 1절처럼 지금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 된다. 즉, 예수님이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서 지금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신앙현실에서 우리가 점검하거나 격려하는 기준이 십자가이기보다, 대제사장직 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다. 십자가가 약화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 본론
(1) (롬5:9~11) 여러 번 인용 했지만 여기는 이중적 대조가 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셨다면 화목 된 이후에는 얼마나 더 잘해 줄 것인가, 하는 대조가 하나 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끼쳤다면 살아나셔서는 얼마나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가 하는 대조가 있다.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한 것이 그 구원 후에는 어떻게 더 큰 목적을 가지는가 알아라. 그러나 우리는 뒷부분이 약하다. 십자가에서 다 멈추어 섰고, 바라는 것은 내세적이다. 천국 가는 것이 연기되어 있으니까, 다시 말해 예수 믿자마자 데려 가셨어야 되는데 안 데려 가셨으니까, 남아 있는 동안 쓸모 있는 신자가 되자는 쪽으로 간다. 이것은 매우 모호하고 막연하다. 게다가 고달프다. 기대와 다르고 소원과 다르고 하나님은 답을 안 하신다. 이 문제는 롬5:17~19에서 대조로 표현된다. 여기에서는 인류 대표 둘을 비교한다.

첫 대표였던 아담이 범죄 해서 그 후손인 우리는 자기가 죄짓지 않고도 죄인이 되고 자기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죽는 운명에 처해진다.

이와 똑같이 우리는 예수의 승리로 인하여 의인이 되었고,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의 결국은 부활과 영광이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뒷부분은 성경으로 읽기만 했지 현실 속에서는 성도들에게 그다지 위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리로 가는 것 같지도 않고, 거룩으로 가지도 않고 나아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2) (엡1:3~14) 우리의 운명은 성경의 약속에 의하면 영광이고 찬송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지만 현실적으로는 힘이 되지 않는 것은 영광과 찬송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까지 보증으로 보내셨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런데 시원치 않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내가 얼마나 못났는가를 떠나서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시는데 성령께서 우리가 가진 소원과 우리가 가진 간절함에 답을 하시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로마서 8장26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성령이 와 계시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면 현실이 어떻다는 것인가? 신자의 현실이 한심하다는 거다. 소원이 있는데 열매와 결과가 없다. 그런데 성령은 이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여기가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실패가 있는 것을 성경은 어떻게 이해시키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몽땅 빼버렸다.

(히6:1~6) 이 부분은 너는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지 못한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거다,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출애굽사건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선조들이 저 광야에서 거역한 것 같이 하지 말고 순종해라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실패했는가?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 실패한다. 애굽에서 나올 때 광야 길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다.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는 것, 반석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시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가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만은 저들이 자발적으로 결심을 해야 했다. 이것을 거절하자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니 이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 한 번 구원을 받고 타락하면 다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보자.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많이 하는 기도가 무엇인가? 회개기도이다. 왜 회개기도를 하는가?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되어서 한다. 여러분들이 회개기도를 할 때 이런 관점에서 하는 것은 옳다. 즉, 내가 신자답지 못했다는 기도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래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은 안 된다. 이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것을 히 10:11~18을 통해서보자.

본문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라는 말을 바꾸어서 쓰면, 다시 죄를 위하여 회개할 것이 없느니라는 말로 쓸 수 있다. 끝났다는 것이다. 무엇이 끝났을까? 죄는 계속 되는데 어떻게 끝났을까?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십자가로 그 신분과 운명이 영원히 고정된다.

그럼 무엇이 남았는가? 지금 예수님께서 제사장 일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 남았다. 십자가로 구원한 자기 백성들을 영광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이 남은 것이다.

(3) 아까의 출애굽 사건을 잘 보자.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는 무엇이었는가? 계속적으로 무엇인가를 반대했던 것이다. 허락된 자유가 가지는 결정과 책임을 외면하고 돌아가자 라고 했다. 왜 돌아가자고 했을까? 그들은 자유가 뜻밖이었고 자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랄드 싯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서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미래를 알고 미래에 대해 책임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다음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 제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대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다. 우리 보고 해보라고 하신다.

틀리면 어떻게 하나? 욕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욕을 먹으면 십자가로 도망간다. 그리고 기도한다. 죄인이 왔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서 자식 교육을 하고 있는데, 버리지 마세요, 저는 주워온 아이지요, 라고 한다. 아니라면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이 말을 하려고 십자가로 돌아간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로 불러서 하고 있는 일을 모른다. 영광을 만드는 일인데 그걸 모른다. 영광을 만드는 일의 핵심은 자유이다. 네가 결정하고 네가 책임을 지는 길을 걸어라, 그리고 훌륭해져라. 아이를 낳으면 학교에 보내야 한다. 키우는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도 이렇게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식 스스로가 자기의 인성과 실력을 쌓아야 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매질을 하기도 하고 꾸중도 하지만, 되어야 되는 것은 당사자이다.

이러한 이해가 부족하면 신앙생활에서 겁밖에 나는 것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잣대는 유일하게 죄의 용서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도덕적인, 종교적인,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완벽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더 배워라. 하나님은 신자 각각에게 필요한 단계를 거치게 하신다. 너무 빨리 학년을 올라가는 것은 좋지 않다. 자기 학년을 꽉 채워야 한다. 우리 각각은 이렇게 완성되어 간다. 여기를 모르니까 십자가로 돌아가서 우는 것으로 끝이 난다.

(4) 기도를 시키면 제일 답답한 것이 회개하는 기도이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낱낱이 나열하느라고 본론에 가지 못하고 자기가 부족하다고 얘기를 하느라 제대로 된 기도를 못한다. 이런 자세는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교회에 와서 누가 나에게 생각 이상으로 기대할 까봐 겁을 내는 정도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또 실제로 기대 이상이 안 된다는 것에도 겁을 낸다. 심지어는 누가 그런걸 알아 볼까봐 겁을 낸다. 그러니까 아무도 여유 있거나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지 못한다. 그리고 누가 조금 잘난 척한다 싶으면, 너 교만 한 거 알아? 라고 핀잔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격려와 모험과 적극적인 자랑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히브리서가 말한다. 너희 고단 하구나, 이게 십자가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방법이야,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거야. 이게 우리에게 일을 하는 거야, 유익한 거야, 흠이 없으려고 하지 말고 일어난 일마다 유익을 찾아야 한다. 어떤 유익인가?

(롬6:1~4) 은혜를 얘기하면 이런 반론이 항상 나온다. 그럼 책임은 왜져? 왜 열심히 살아?

예수께서 오셔서 너를 죄인의 자리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셔서 새 생명과 영광의 길을 가라고 했는데, 공짜로 얻는다며? 내가 왜 열심히 살아? 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이다.

세상은 우리가 현실에서 기대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거기에 고통이 따른다.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할래? 라고 묻는 것이다. 모든 인생이 이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할래?

(5) 우리는 자기 실력만큼 한다. 그 실력이 부족한 만큼 후회하는 결과를 보게 된다. 거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한 수 배우는 것이다. 넘어질 때 마다, 실패할 때마다, 울 때마다, 답이 없을 때마다 하나씩 배워간다. 나는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롬6:8~11) 본문은 너희가 은혜로 얻은 구원이 너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보다 하는 걱정은 던져 버리고,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결정하며 도망가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책임이 나온다.

(롬6:15~21) 우리는 영광으로 부름을 받았다. 세상은 그 부름이 없기 때문에 끝이 사망일 수밖에 없다. 헛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 일어난다. 정답을 외우게 하시지 않는다. 나보고 해보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게 무섭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안 생기는 결정을 하고 싶고 그러한 선택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니까 지금 실력으로 부딪쳐 벌을 받고 커 나가는 일은 못하는 것이다.

다. 결어

(1) 하나님은 우리를 끌고 가신다. 우리는 싫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열어 놓으신 영광의 길이다. 십자가가 교회의 최고의 표지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잘난 길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권력이나 잔꾀로 우리를 유혹해도 우리는 지지 않겠다.

이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해보자고 유혹하는 것을 우리는 한 번씩 다 해본다.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가 늘 나쁘다. 결과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이러한 결과에는 의미가 없다. 여기에는 인격과 존재와 가치와 영광이 없다. 폭력과 거짓과 원한과 어려움과 비겁함 뿐이다.

우리가 가지는 온유와 용서와 감사와 자랑이 없는 것이다.

(2) 이 길로 서둘러 오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주신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빌2:5~11) 십자가의 길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택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이 자녀로 커라.

(빌2:12~13) 여러분의 현실, 현재의 조건 속에서 실력을 쌓아 나가야 한다. 그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 핑계대고 도망가서도 안 된다. 해보고 울어라. 가슴을 쳐라. 그러나 자책하는 것이, 무릎을 꿇은 것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욕을 먹고 나아져라.

성경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3. 에필로그

(1) 초등3부에는 이번 주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12월 14일(금)에는 교사이신 천기분 선생님이 쌍둥이를 분만했는데 누나(하은)와 남동생(하랑) 쌍둥이었다. 물론 초등 3부 단톡은 불이 났다. 축하. 축하. 축하.

(2) 같은 날 초등3부 강한빛 전도사님 할머니께서 소천 하셨다. 할 수 없었다. 축하와 위로가 동시에 전해졌다. 강 전도사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분이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는 엄마가 너무 좋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 전도사님 어머님과 통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 얘기를 드렸더니 많이 웃으셨다. 할머님에 대한 사랑도 많이 깊었을 텐데. 성령님의 위로가 온 집안에 있기를 기도했다.

(3) 12월 15일(토)에는 초등3부 부장이신 이상범 집사님 작은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안 알려 주셔서 우리는 나중에 알았다. 축하드린다.

(4) 박 목사님의 다시 보는 히브리서(12) 설교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해 보고 울어라”이다. 냉정하게 들리는가? 아니다. 이 말은 매우 따뜻하다. 도망가지 말고 울라고 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 때문이다.

설교 정리를 끝내고 나는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앞으로 10년 더 건강하게 살게 해 주세요, 천기분 선생님 쌍둥이 아이들이 초등 3부에 올 때까지요. 아이들이 와도 제가 건강해야 교사를 하면서 가르칠 수 있답니다. (순전히 떼를 썼다.)

그리고 아버지, 전도사님 가정에는 위로를 주시고 부장님 댁 신랑 신부에게는 복을 내려 주세요.

뿐만 아니라 초등3부 모든 식구들이, 아니 모든 우리 남포 교인들이 해보고 우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한 아름 받게 해 주세요.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