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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성경해석
한국교회설교자와 설교(제1회 박영선목사와 그의 설교)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성경해석
                        김 정훈교수(천안대학교 신약학)

   들어가는 말

   한 설교자의 설교가 어떤 유(類)의 설교이냐 하는 문제는 설교자가 어떤 사람이며 그의 설교의 중심적 국면들이 무엇이냐 하는 종합적 질문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자는 그의 배경을 묻는 질문이다. 설교자의 배경을 알 때 그의 설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기대이다.  후자는 설교자의 설교 자체를 놓고 그 성격과 특징과 강조점 등을 묻는 질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탐구는 설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 세미나가 설교자 박영선의 다양한 측면들을 몇 개의 주제로 구분하고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적절한 일로 보인다. 제시된 주제들은, 박영선을 지금과 같은 설교자로 만든 배경은 무엇인가, 그의 설교를 자극하는 신학적 모티프(motif)는 무엇인가, 그의 설교의 강조점은 무엇이며 전달 기법은 무엇인가, 그의 설교 본문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것들에 대한 그의 해석은 무엇인가, 그의 설교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신학적 구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의 설교가 한국교회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이슈들을 포함하고 있다.

   본 발표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박영선의 설교와 성경해석”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본인은 먼저 박영선의 설교의 본문 어프로치(approach)를 총괄적으로 개관해 보고, 다음으로 그의 성경해석의 특징들을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그의 설교에 대한 성경신학적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  

   1. 본문 어프로치(approach)에 대한 총괄적 개관

    1) 설교의 메카니즘

   “박영선의 설교와 성경해석”은 단순히 그의 성경해석 기법을 살피는 일에 의해 조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성경해석은 그의 설교의 전체 메카니즘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성경해석은 일찍이 그를 자극했던 신학적 문제에 답하고자 하는 투쟁 가운데 확립된 신학적 아이디어들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러한 그의 개인적 경험은 지금도 계속해서 그의 설교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 아브라함의 “믿음”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1) 그러나 이 감명은 곧 심각한 고뇌로 이어진다: 그럼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런 믿음이 생기는가… 그것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선물인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연습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인지…”2) 박영선은 아무리 어느 성경 인물의 믿음이 출중하다 하여도 그 믿음이 오늘의 나의 믿음이 될 수 없다면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박영선은 “믿음”의 문제를 중심으로3) 신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성화론,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의지를 강조하는 구원론, 성령 세례와 성령의 내주를 구분하는 이중구조적(?) 성령론, 신자들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천국론적 교회론4)을 확립해 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주론이라든지, 신론이라든지, 윤리론이라든지, 그 외 기독교인의 삶과 관련된 수많은 이슈들도 그의 설교에 두루 포진되어 있다.

   본 발표자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박영선의 설교의 전체 메카니즘은 “믿음”에 대한 성경신학적 질문에 의해 확립된 자신의 신학체계를 골간으로 설교 본문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많은 경우에 본문에 대한 성경신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되기보다 조직신학적 아이디어에 의해 본문이 조망되는 방식으로 작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피상적으로 볼 때 그의 설교는 성경신학적 방식에 의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의 많은 설교가 성경신학적 작업에5) 의해 탄력과 활력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의 전체 메카니즘은 조직신학적 아이디어들이 본문 해석을 주도하는 방식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이드 존스의 에베소서 강해를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자기 설교화한 거룩과 영광에의 초대6)는 그 전체 스타일이 성경신학적이지만 설교의 강조점들은 박영선 자신의 조직신학적 아이디어들에 의해 콘트롤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그 자신만의 독특한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에 대한 성경신학적 접근이 조직신학적 진술방식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 전자는 그 자체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 설교의 착상

   박영선의 설교의 착상은 한 두 가지 단순한 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이고 다양한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몇 가지 중요한 예들을 들어보기로 하자.

   첫째, 그는 신자의 지식과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이 왜곡될 때 그것을 교정해 주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갖는다. 신자 일반은 관습적으로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오해하기 쉬우며 이러한 오해는 텍스트의 본 뜻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박영선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다른 설교가들보다도 예민한 감지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청중들의 관습화되고 빗나간 신앙 지식에 대해 도전적 문제를 제기하며 설교를 시작할 때 청중들은 의미심장한 충격과 자극을 받게 된다.

   둘째, 그는 신자의 지식과 삶에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주제를 정해 놓고 일정기간 집중적으로 설교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한다. 이때 그의 설교는 다소 강의적이 되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설교가 되게 하는 일에 결코 실패하는 적이 없다. 심지어 강의를 하는 경우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그의 해설과 풍부한 예화를 곁들인 적용은 성경 본문을 메마른 강의노트로 만들지 않는다.

   셋째, 그는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히브리서 등 특정 성경을 정해 놓고 첫 장부터 계속 강해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도 그는 자신의 강해가 갇힌 공간의 강의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터득한 해석 방식과 신학체계를 최대한 활용한다. 이는 그 자신만의 강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러한 방법이 지속될 경우 메시지가 도식화할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바울의 경우도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대상을 달리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전할 때 언어사용과 진술방식과 메시지의 방향과 강조점들 모두에 크게 혹은 작게 변화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지교회에서 계속 설교를 해야하는 오늘날의 목회자는 어쩌면 바울보다도 더 어려운 입장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교자의 원칙은 항상 새로운 대상을 만나 듯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넷째, 그는 세계의 명설교가(주로 강해 설교가. 예를 들면, 로이드 존스, 존 E. 헌터)의 설교 텍스트를 자신의 주제로 삼아 설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경우 그는 반드시 자신의 설교의 출처를 밝히며, 이렇게 준비된 그의 설교는 각색의 수준을 넘어 재창조된 형태로 나타난다.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방식은 비난을 사기 쉽고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그의 설교가 호평을 받는 것은 반드시 자기화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일 것이다. 적극적으로 볼 때 이러한 설교 방식은 설교의 내용을 양질의 수준으로 유지시켜 주며, 지나친 에너지 낭비 없이 설교 본문과 주제를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또한 설교자를 게으름에 빠지게 하고 청중의 가슴으로부터 멀어지는 설교를 하게 할 위험성도 있다.

   다섯째, 그는 다년간의 목회와 설교를 통해 확보한 그 자신만의 본문들을 다수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한 본문들은 직접 설교 텍스트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설교 때마다 자유자재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반복 사용되는 그의 본문들은 성경의 맥(脈)에 속한 것들로 신학의 확립과 설교를 위해 사용가치가(?) 매우 높은 본문들이다. 본 발표자는 그에게 현재보다도 더 많은 본문들을 확보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 이 뿐 아니라 이미 확보된 본문들에 대해 보다 더 깊은 연구를 시도할 것을 주문하고 싶다.

   2. 성경해석의 다양한 특징들

   박영선의 설교에는 다양한 성경해석의 기법들이 유연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다양하고 개혁주의적인 성경해석의 기법들은 그의 설교를 고급화할 뿐 아니라 설교의 내용을 윤택하게 하며 또한 설교의 신학적 온건성을 확보해 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면 그가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 해석 기법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관련성구의 연쇄적 인용에 의한 해석

   박영선의 설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많은 경우에 단 한 편의 설교에서도 수많은 관련 성구들을 연쇄적으로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설교 본문으로부터 끌어낸 자신의 메시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텍스트들을 불러오고 또 이것들을 보강하거나 메시지의 논지를 확대하기 위해 또 다른 텍스트들을 끌어들인다. 이것은 그의 성경해석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의 텍스트가 정해지고 그것을 근거로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설정되면 박 영선은 자신의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뛰어난 솜씨로 관련 성구들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의 사용은 그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개혁주의적 해석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고 하는 반증이다. 그러나 한 두 가지 아쉬운 것은, 첫째, 그가 인용하는 구절들 대부분이 정밀한 신학적 설명을 요하는 어려운 것들이며, 그럼에도 그것들에 대한 해설이 지나치게 간명한 경우가 많고 심지어 생략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 점과, 둘째, 인용, 낭독되는 구절들의 분량이 지나칠 만큼 큰 경우가 많다고 하는 점이다. 큰 덩어리의 어려운 내용들이 순식간에 낭독될 때 청중들은 소화해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물론 어떤 본문들을 미완의 해석과 모호성 속에 남겨두는 것이 역설적 효과를 거두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청중들이 인용되는 본문의 뜻을 보다 자세히 알고싶어 할 때, 이 욕구가 외면당하게 되면 메시지의 효과가 반감될 가능성이 있다.

    2) 전후 문맥의 통찰에 의한 해석

   박영선은 종종 본문에 대한 전후 문맥적 이해의 결여가 그릇된 해석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본문을 둘러싼 전후 문맥의 흐름을 설명하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그가 한 작은 본문을 텍스트로 하여 설교할 때도 장(章)을 뛰어넘는 상당 분량의 전후 문맥을 통찰함으로써 성경진리를 꿰뚫는 메시지를 생산해 낸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설교자로서 본문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를 기본 해석법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은 기본적으로 어떤 본문을 해석하고자 할 때 그것의 전후 문맥은 물론 보다 확대된 범위의 문맥에 비추어 그것을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박영선에게는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이러한 소위 문법적 해석 방식이 몸에 밴 듯하다. 하지만 본 발표자는, 그가 이미 이 방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이 방법을 활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이 해석법은 그의 설교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한 주요 요인일 뿐 아니라 그의 설교 요소 요소에서 이것을 더 요구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문맥 연구는 설교자의 기본작업에 속한 것이지만 대다수 설교자들이 실패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작업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는 설교는 그 질과 깊이에 있어서 생태적 결함을 갖게 되므로 좋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3) 특정한 신학적 아이디어의 강조를 통한 해석

   박영선의 설교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미 자신의 내면에 정립되어 있는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본문 해석과 메시지의 전개를 위해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조직신학적인 해석 원리를 그의 설교에 적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성화론 위주의 설교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 발표자는, 그의 설교가 “성화론-지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7) 이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신학체계 안에 확립되어 있는 많은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필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그의 설교의 중심축이 신학적으로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본인은 오히려 “믿음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믿음론”을 중심으로 그는 다양한 다른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체계화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다. 그의 설교가 신자의 성숙 혹은 성화를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신자의 삶 자체가 이 주제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성화”는 성경자체의 강조이기도 하다. 아무튼 박영선은 “성화”만이 아니라, 자신의 메시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다른 신학적 주제들도 강도있게 다룬다.  

   한편, 그의 설교의 강조점이 성화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많은 설교에서 자신의 성경신학적 감각에 조직신학적 열정의 불을 붙임으로써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자기의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더 깊고 풍요하게 함으로써 청중의 영적 욕구를 넉넉히 채워줄 뿐 아니라 강조하고자 하는 테마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메시지를 보다 강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신학화 작업이 없는 성경신학적 탐구는 설교를 지리멸렬하고 저급한 수준의 강의로 전락시키기 쉬우며 성경신학적 탐구가 없는 신학화 작업은 설교를 속빈 강정으로 만들기 쉽다. 이 두 요소의 적절한 결합 문제와 관련하여 박 영선의 설교에 대해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종종 그가 본문을 신학적으로 의도된 방향을 따라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즉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적 테마를 미리 설정해 놓고 이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본문을 다소 인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본문이 내포하고 있는 풍부한 성경신학적 재료들을 간과하기 쉬우며 또한 해석상의 무리를 초래하기 쉽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발표자는 성경신학적 재료들이 특정한 신학적 아이디어에 의해 컨트롤되는 메시지보다는 성경신학적 탐구 위에서 신학화 작업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메시지를 주문하고 싶다.  

  4) 배경 연구에 의한 해석

  박영선의 설교에는 본문의 배경에 대한 언급이 자세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대한 설명을 할 때라든지, 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설명을 할 때라든지,8) 혹은 율법에 대한 설명을 할 때라든지,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할 때라든지, “구원”에 대한 설명을 할 때라든지… 그는 본문의 배경 설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와 관련된 언어의 배경이라든지, 유대인들의 종교적 배경이라든지, 1세기 사람들의 삶의 배경이라든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라든지… 그는 나름대로의 연구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본문 뒤에 서있는 역사적 배경들을 설명하는 데 열심을 낸다. 이는 그가 본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사실 역사적 해석 방식은 루터와 칼빈을 비롯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전통적 해석 방식으로 이 전통을 잇는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오늘날에도 요긴하게 사용하는 해석 방식이다. 이 역사적 해석 방식은, 소위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유럽과 서방 신학계를 풍미했던 역사 비평적 해석 방식과 구별된 것으로, 모든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설교자들이 수용할 만한 해석법이다. 개혁주의적인 역사적 해석 방법과 자유주의적 역사 비평적 해석 방법이 그 작업 방식과 내용에 있어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러나 이 두 해석 방식은 성경 텍스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 아니면 일반 종교문서 중의 하나로 보느냐 하는 전제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많은 부분에서 큰 차이를 나타낸다. 텍스트 연구와 관련하여 모종의 신학적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개혁주의적 역사 연구가 “계시-의존적” 사유를 따른다면, 역사 비평적 연구는 “이성-의존적” 추론에 맹종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역사 비평적 연구는 성경의 텍스트를 종교사적 관점에서 보는 반개혁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설교자로서 박영선이 본문을 다룰 때 배경연구를 시도하는 점과 신약 본문을 다룰 때 그 배경을 구약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점은 그가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의 전통에 서 있는 설교가임을 반증한다. 청중의 입장에서 단지 더 바라는 것은 그의 배경 연구가 더 풍부하고, 더 깊고, 더 정확하게 되는 것이다.  

   5) 언어 분석과 그 의미 추적에 의한 해석

   박영선의 설교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본문의 핵심언어를 분석해내고 그 언어와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유사 언어들과 다른 관련된 언어들을 분별해 내어 그것들의 의미를 추적하는 데 탁월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설교의 본문 해석을 위해 언어분석적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박영선은 그의 성령론에서 – 신학적으로 토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 “성령과 불로써의 세례”,9)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서의 성령세례,”10)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서의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내주,” “성령 충만,”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의 은사” 등의 개념들을 구분하고 각각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한다. “믿음”에 관해서도 그는 자신의 설교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의 본질11)에서 성경의 “믿음-언어들”을 심도있게 추적하면서 믿음의 다양한 측면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예들은 그가 텍스트의 언어 하나 하나를 매우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경 언어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각은 그의 설교를 양질화하고 청중에 대한 설득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언어의 미묘한 차이들에 대해 감지력이 약하고 언어 연구가 불비한 설교자는 청중에게 혼동을 주는 설교를 하기가 쉽다.  명쾌하지 않은 모호한 설교는 청중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설교자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다. 그러나 박영선은 꾸준한 언어 연구로 이러한 위험성들을 극복해내고 있다. 아니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설교의 순간에 더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비상한 언어처리 능력은 그로 때로 신학적으로 꼬투리가 잡히기 쉬운 선(線)을 넘나들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대목에서도 메시지 전체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의 진술이 그 특유의 게릴라성 언어구사인지 아니면 신학적 언어구사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설교하는 순간에도 샘물이 솟아나듯 참신한 언어들이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경험을 하는 것 같다. 이 때문에 그는 가끔 선(線)을 넘고싶은 유혹을 받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사유의 샘에서 솟아나는 그 수많은 언어들을 종전과 같이 최대한 활용하되 어느 정도 제어력(制御力)을 가지고 언어의 적정성(適正性)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준비되고 연구된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들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싶다.

   3. 성경신학적 평가

   성경신학이 성경 본문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즉 문법적, 역사적, 문학적, 언어적 연구 및 계시사적 고찰 등을 통한 신학적 연구를 주요 과제로 삼는 학문이라면, 박영선의 설교는 성경신학적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설교는 곧 그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신학이 성경의 텍스트를 근거로 메시지화 될 때 그것이 곧 그의 설교가 되는 것이다.

   박영선의 설교가 대다수 청중들에게 만족감을 주며 감동과 결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메시지에서 풍부한 성경신학적 요소들이 묻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한 텍스트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텍스트들을 동원하고, 본문의 위치와 의미를 밝히기 위해 전후 문맥을 철저히 살피며, 메시지의 강조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확보된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활용하고, 텍스트의 일차적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 역사적 연구를 시도하며, 또한 본문의 뜻을 명징화(明徵化)하기 위해 언어 분석을 시도하는 일은 설교자에게 말할 수 없는 노력과 고통을 요구한다. 박영선의 설교에 이러한 작업의 흔적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러한 작업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적극적인 반응은 뛰어난 설교의 기술이 이루어낸 결과라기보다 본문과의 고통스런 투쟁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청중 일반이 그의 설교에 대해 신학적 논평을 가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박영선으로부터 풍성한 메시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의 설교에 설교자의 담즙이 녹아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박영선의 설교가 이러한 성경신학적 강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의 설교가 종종 성경신학적 요소들이 체계화된 조직신학적 아이디어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설교 본문이 특정한 조직신학적 아이디어(들)에 의해 미리 재단(裁斷)됨으로써 그 안에 내포된 성경신학적 요소들 – 풍성한 메시지 재료들이 되는 – 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는 것이다. 본문을 미리 재단(裁斷)하고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정해 놓으면 설교자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쉽게 메지지의 포인트를 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 방식을 취하는 경우 설교자는 조직신학적 체계가 성경신학적 체계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신학체계 간의 관계가 결코 상반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역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둘을 동일하게 존중할 필요가 있다. 양대 체계가 설교에서 균형있게 활용될 때, 설교는 부요함을 갖게 되고 튼튼한 기반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박영선의 설교의 전체 메카니즘과 설교의 착상 그리고 그의 설교에 나타난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살펴보는 일에 집중하였다. 우리는 그의 성경해석이 전반으로 개혁주의 성경 해석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우리는 그가 “믿음”에 대한 자신의 성경신학적 질문에서 비롯된 신학적 자기 체계화 과정을 통해 나름대로의 독창적 해석 기법을 개발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가 설교 현장에서 사용하는 성경해석 기법은 성경 해석학계의 한 유행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경신학적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한 투쟁 과정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본문 해석을 할 때 일반적으로 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성경해석 방법론들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을 기계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유롭게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구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의 성경해석이 시중의 것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해석이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실 그것들과 만나거나 중첩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의 해석이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주 알이 뭉치듯 아픈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독특하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본문 해석의 독특성은 거의 모든 설교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자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자기만의 독특성 곧 자기만의 체계, 자기만의 방법론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문가들과 동료 목회자들과 청중들에 의해 보편성과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성경 자체에 의해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 발표자는 직접 목회 설교를 하는 가운데 확립된 박영선의 성경해석이 다른 설교자들에게 성경해석의 중요한 지침들과 암시들을 제공해 준다고 믿는다.  
(김정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