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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적용

한국교회설교자와 설교(제1회 박영선목사와 그의 설교)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적용

                       이광희 교수 (평택대학교 실천신학)

개혁신학연구소로부터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적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에 관한 여러 각도의 신학적 평가와 적용 가능성을 찾는 일을 통해 한국교회의 강단에 뭔가 긍정적인 유익을 제공하자는 것이 본 세미나의 목적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의 삶과 신학사상 전반에 관한 내용과 그 영향에 관해서는 역사신학자 두 분과 박 목사의 친구교수께서(구약학) 다루도록 되어있고, 신약학 전공자인 김정훈 교수께서 박목사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 부문(exegesis와 hermeneutics)을 그리고 설교학 전공자이신 정창균 교수께서 박 목사의 설교에 있어서 전달부문(delivery와 communication)을 강의할 계획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적용이라는 말이 갖는 주제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한국교회의 강단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응용의 문제를 다룰 것인가, 아니면, “박영선 목사의 설교가 교회당 안에서의 예배라는 장소에 머물지 않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삶의 장소에 어떻게 적용되도록 만드는가?“하는 박 목사 설교의 특성으로서 ”말씀은 즉 삶“이라는 일원화의 문제를 다룰 것인가를 설정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만일 박 목사의 설교를 통한 유익을 한국교회의 강단에 적용시키는 응용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실상 본 세미나의 결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모든 강의와 토론이 있은 뒤에 그 결과물을 가지고 본 세미나의 주체인 개혁신학연구소가 후속적으로 해야 할 작업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 강의를 박 목사의 설교가 성도의 삶에의 적용을 위해 어떤 특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단순히 설교의 텍스트(Text)로서의 성경 해석 방법 (이것은 성경주해로서 exegesis와 eisegesis의 문제 뿐 아니라 해석학으로서의 hermeneutics의 영역을 포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또는 성경주해의 결과 또는 설교자의 해석학적 과정을 거친 내용들을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있는 교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론을 (communication methodology) 논하기 보다1) 설교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함으로 주경과 해석의 목적자체가 삶에의 적용을 위한 방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즉 설교에 대한 이해가 본문 이해로서의 Text 영역인 주해와 적용되어야 할 상황으로서의 context를 분리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적인 접근의 문제점을 박 목사의 설교분석을 통해서 지적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본문과 상황을 지나치게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접근은 언뜻 보면 말씀의 독립성과 권위를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보다 단순한 과거의 참고서적 (reference)으로 비하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 발표자는 박영선목사의 설교 속에서 성경본문과 성도들의 삶의 장이 하나님의 계명(covenant)에 대한 순종(faith)이라는 관점에서 일원론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찾아 강조함으로 한국강단에의 도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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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포교회의 부목사로 박영선 목사와 오랫동안 사역해온 이대원2)에 따르면, 기독교가정에서 자란 박영선목사는 1970년대에 대학시절중 개인적인 체험과 함께 목회에의 소명을 받고 신학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 목사의 목회지원 동기에 상당한 배경이 되었을 1970년대는 대규모집회와 기도운동 등의 정서적인 강조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급격한 양적 성장을 경험한 기간입니다. 교회성장학파들의 주장같이 대중운동(mass movement)과 구원의 단계3)중 제자화의 강조를 통한 교회성장의 전형으로 한국교회가 소개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기간 내의 교회성장의 저변에 숨겨졌던 수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문제점중의 하나는 성경이(Text) 우리의 상황에 대해 말씀하시기보다는(exegesis 또는 contextualization) 우리의 상황을(context) 뒷받침할 근거로 왕왕 성경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eisegesis 또는 indigenization). 따라서 수 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내려온 한국민의 종교적 정서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이 기독교의 모양으로 바뀌어 강조된 것이 외형적인 교회 성장을 이룬 것이 아닌가하는 조심스러운 자기 반성이 1980년대에 들어와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반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성경본문을 중시하는 강해 설교 또는 제자훈련의 이름으로 등장한 성경공부운동이었습니다. 이 움직임은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표(완전화)로 개인 경건 훈련(QT), 귀납적 성경공부 또는 목회자 강해 설교 교육 등을 통해 꾸준히 확산되었습니다.  

  1980년도에 들어서 새로운 대안으로 나타난 성경중심의 설교나 기독교교육은 신령한 양식에 기근이었던 많은 한국의 신자들에게 희망으로 나타났으나 점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모이는 숫자와 반응이 약해지다가 급기야 과거의 가슴대신 이번에는 머리가 커진 기형적 교인을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과거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상황문제(context)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성경(Text)을 이용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왜 이번에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Text)이 강조됨에도 문제는 여전했던 것일까요? 1980년대 한국교회를 도전한 완전화를 지향하는 본문중심의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의 등장은 과거의 문제가 상황중심의 일원론적 문제(비 기독교적 토착화)였음에 비추어 볼 때 상황과 본문이 각각인 이원화의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출발이 상황이 아닌 본문이라는 문제의식은 가지게 됐으나 본문과 상황의 관계 속에서 상황화(contextuali- zation) 과정인 설교와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농부에게 농사짓는 이론은 그 자체가 궁극이 아니요 벼를 심고 길러 추수하는 목적을 지향해야 하듯이4) 그리고 주부가 요리학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좋은 요리를 통해서 가족을 봉사하는 목적을 가지듯이, 성경공부의 동기나 목적이 단순히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삶을 사는데 있다는 점에서 성경공부가 반드시 실천 지향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초점을 잃은 것이 당시의 문제였습니다. 즉 성경공부의 목적은 지적인 학습 또는 토론이 아니라 순종과 실행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중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관원의 관심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29절)하는 “지식”의 문제였지만 이 질문에 답하신 예수님의 관점은 “누가 네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36-37절)는 “행함”의 문제였음을 우리는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성경공부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하나님이 뜻이 나의 삶의 문제를 이끌어 가도록 적용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의 강해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 역시 한국교회 강단과 삶의 이원화 문제를 조장해 왔다고 봅니다. 강해 설교가로 한국에 이름을 떨친 데니스 레인의 지적처럼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을 가져다가 성경 위에 걸며,” “우리는 성경을 로케트 발사대처럼 사용하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음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게 되고 성경본문에는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 되기 쉽다”5)는 것을 설교자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강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실제적인 우리의 생활에까지 가지고 와서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전했는가는 교인들의 생활에 변화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강단과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6) 로이드죤즈 역시 “사람들이 — 설교를 듣고 아무런 관심도 느끼지 않거나 스스로 반성하는 기미가 없으면, 그것은 — 설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라고 옳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국 설교의 의도는 “결심할 수 있는 지점까지  — 이끌어 가는 것” 입니다.7)

설교란 주석을 해 나가는 것이 아니요, 단순히 한 절이나 한 문구나 문단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나, 강해 설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 본문을 끝마치면 그들은 설교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 설교자들은 하나의 설교를 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다만 하나의 설교에 대한 서론만을 전했음을 말해둡니다. — 메시지의 소명은 강해로부터 떠오릅니다. 만일 구절 구절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성경자체의 한 부분인 하나의 교리를 잘 알아낸 것입니다. 그것을 영구하고 탐색해내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 이렇게 해서 본문에 나타난 원리를 뽑아내고, 그것이 아주 분명하게 부각되었으면, 그 설교를 들을 사람들에게 바로 이 원리를 어떻게 밝히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켜 전 생활 영역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8)  

1980년대에 신학을 졸업하고 (M.Div.과정) 목회의 현장에 나선 박영선 목사는 성경연구에 몰두했는데, 특히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과 복음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재조명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고 이대원은 말합니다.

그(박영선: 발표자 첨가)는 성경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성경 그 자체의 연구와 동시에 그 본문이 이해되고 해석되는 현장으로서의 맥락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연구에 집중했으며, 더 나아가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그대로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믿음으로 성경을 조명하고자 노력했다.9)

  그것이 성경공부가 되었든지 설교가 되었든지 이원화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문과 상황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상황화의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실천신학교수인 티모씨 켈러(Timothy Keller)는 “주경신학(Exegetical theology)은 성경의 개별적 본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원래의 문법적, 역사적, 문학적 배경을 발견함으로써 각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며,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개개의 가르침을 광범위한 신학적 원리와 상호 연관시키는 것으로 일단 이러한 두 가지 연구가 정확하게 성경적 진리에 이르면, 실천신학(Practical theology)이 진리들을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한다는 전통적인 실천신학의 이해가 지식과 행위를 분리하는 전형적인 이원화 문제를 목회현장에 야기 시키고 있음”을 올바로 지적했습니다.10) 그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신학)는 언약진리(covenant truth)로서, 계시된 모든 진리는 “우리로 그 모든 말씀을 행하게”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진리의 반대는 과오가 아니라 언약에 불충실한 것과 언약을 어기는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동 신학대학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간하배(Harvie Conn)교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성경을 언약의 기록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의미(meaning)’와 ‘적용(application)’ 및 ‘이론(theory)’과 ‘실제(practice)’사이의 전통적 구분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1)

        

간하배는 언약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Text)과 그 배경에 관한 지식(context)이 모두 필요함을 역설하며 성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석상의 나선(hermeneutical spiral)”12)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선은 본문(text)과 또 일정한 상황(context) 가운데서 해석자가 보이는 사랑스런 순종(실천)사이를 계속적으로 오 간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주경(exegesis)과 번역(translation)에서부터 일정한 상황에 대한 적용(이태릭은 필자의 재번역임)에 이르는 전 과정은 ‘해석(interpretation)’ 또는 ‘의미발견’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13)

  위와 같은 간하배의 실천신학 방법론을 통해서 우리는 전통적인 이원화의 문제를 극복할 관점(perspective)을 얻게 되는데 이를 성경공부(기독교 교육) 또는 설교의 이원화 문제와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은 해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성경 강해 또는 주해의 필요성과 하나님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향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와 상관 있게 성경을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회중의 견지에서 성경을 풀어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일의 중요성입니다. 이대원에 따르면, 박영선 목사의 성경강해는 “성경본문을 철저히 분석하고 해석하여 청중들에게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뜻을 이해하도록 전달할 뿐 아니라, 그 이해가 성도들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가능한 사건의 범주로 이루어지도록 적절한 적용을 제시하고 있다”14)고 함으로 그의 성경강해가 간하배의 실천신학 방법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는 1980년대의 한국교회의 성경공부운동 또는 제자훈련이 갖는 이원론적인 한계점을 극복하고 성경본문과 상황의 일원화를 목회현장에서 실현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그 적용을 박영선 목사의 “성경해석과 그것에의 순종”이라고 바꾸어서 그의 이원화 극복을 위한 노력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성경본문을 철저히 분석하고 해석하여 청중들에게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뜻을 전달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박영선 목사가 말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한 뜻”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가 의도한 바를 지원하는 근거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는 것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1982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박 목사가 설교한 내용들을 책으로 발간한 하나님의 열심15)은 창세기의 본문에 나오는 족장들의 삶을 오늘날의 일반적인 우리들의 삶과 연결시킴으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 지나치게 성경의 인물들을 영웅시하고 우리와 동일시 하고자 해왔던 관점을 바꾸는 점에서 한국교회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 “족장들의 삶을 통해 역사 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보고 또 그 하나님의 열심 속에 사로잡힌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연약한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그 연약한 자들을 부르시고 도구로 써 주셨음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데니스 레인의 지적과 같이 “성서시대의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오늘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이 기록될 그 상황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희미한 청동거울을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날의 밝은 거울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성경과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데니스 레인은 누가복음 9장 59절 이하의 사건에 나오는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동양인의 풍습을 따라 “지금은 못하겠으니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나 따르겠다”는 뜻으로 주해합니다. 즉, 서구적인 논법을 따라 “지금 죽은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을 먼저 하겠다”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의 말을 해석하고 또 “아버지 장사지내는 일보다 나를 따르는 일이 더 중요하니 지금 나를 먼저 따르라”고 예수님의 대답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내 문화적인 사고(context)에서 뛰쳐나와서 성경이 가르쳐 주는 사고(context)에 뛰어들어가 생각하는 것 즉 올바른 주해(exegesis)입니다.16)

  박영선 목사는 성경본문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정황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도록 하기 위해 성경본문에 대한 문헌학적이고 신학적인 이해를 전제로 그 본문의 해석자와 그 청중이 속한 시대정신과 이해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에 정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향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와 상관 있게 성경을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회중의 견지에서 성경을 풀어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일입니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문화, 동일한 지리적 위치에 산 사람들은 피차 이해가 용이하지만 성경기자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긴 간격이 있는 오늘날에 성경의 내용을 바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 또는 설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귀납적 성경공부를 통해서 성경기자의 생각과 현대인의 생각을 분리시키고 있는 언어적, 문화적, 지리적, 역사적 괴리를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데니스 레인은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듣지 않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사나 설교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일상용어로 해석해 주는 통역자”라고 올바로 주장했습니다. 성경을 쉽게 풀이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저들의 상황 속에서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며, 따라서 저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변화되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교사나 설교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입니다.17)

  이런 점에서, 둘째로, 박영선목사의 이원화극복 노력은 그의 설교가 “성도들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가능한 사건의 범주로 이루어지도록 적절한 적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대원은 남포교회성장은 “성경본문의 생생한 강해와 현장감 있는 적용에 하나님의 실재성을 확인한18)” 수많은 새 신자와 기성교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명희는 “설교의 뿌리는 주경신학이고 주경신학의 출발점은 ‘—으로부터 의미를 이끌어내다’는 뜻을 지닌 exegesis이다. 이것은 ‘—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다’는 뜻을 지닌 eisegesis와는 다르다”고 옳게 지적하였습니다. “설교는 성경본문이 처음 쓰여졌던 상황 속에서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그 의미가 드러내 주는 영원한 진리를 청중의 상황 속에 적용하여 실천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말하며, “성경강해란 성경주석을 통해 얻어진 사실들에 기초하여 그 사실들이 드러내 주는 일반적이고 영원한 진리를 청중들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 적용시켜주는 과업을 의미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9) 이런 점에서 박영선목사의 설교는 설교학이 지향하는바 “청중의 상황 속에 적용하여 실천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20) 해돈 로빈슨은 목사가 설교하려고 강단 앞에 설 때 그가 설교해야 하는 대상은 그 앞에 있는 독특한 사람들임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청중은 설교자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서재에서 내내 그와 함께 있습니다. 설교자는 본문 연구에 시간을 투자합니다. 종종 본문을 원어로 읽기도 합니다. 선반에서 참고서적을 꺼내고 주석을 참조합니다. 그리고 준비한 설교를 통해 그의 청중에게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설교자는 목사이지 교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강단은 신학교가 아니고 그의 청중은 성경시험을 치러야 할 학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러스킨(Ruskin)이 말한대로, 설교자는 “죽은 자를 일으키기 위한 30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설교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21)

  고전적인 설교자인 맥카트니는 주장하기를 “오늘날 설교가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설교로 주종을 이루는 것이 뚜렷한 현상”이며 “이런 설교가 국제적인 정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도움이 되는 시사적인 설교로서 현실감을 주고 현장의 삶에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니콜(Nicoll)이 말한 것처럼 “그 설교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의 설교인들 박새 한 마리도 회개(변화)시킬 수가 없었다”는 것은 복음적인 설교의 부재 현상에 대하여 새로운 자각과 자성을 일깨워준 충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합니다.22) 사실상 설교자의 강단은 단순한 강단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정치적 연설이나, 수사학적 말장난이나, 도덕적 강연 따위는 그곳에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23) 여러 종류의 설교의 방식이 있을지라도 설교의 위대한 목적과 목표는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며,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으로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24)

  이와 같이 설교와 교육이 실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교사와 설교자는 주경학자와 구별이 됩니다. 설교학과 기독교교육이 본문의 주해를 기초로 하면서도 주해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것의 전달과 실천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설교학과 기독교 교육은 성경신학이 아닌 실천신학의 영역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와 설교자는 먼저 성경본문을 올바로 주경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과 더불어 지금 나와 이 상황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을 위해 수종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사와 설교자는 과거에 주어진 객관적 계시인 성경을 매체로,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중간자이면서도 학생들이나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며 결코 자신들의 자국을 남겨서는 안 되는 이중적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25) 따라서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우리의 지혜로 전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해야 되는데,” 이를 위해서 교사와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성령께서 친히 학생들과 회중 한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 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일을 수종들어야 합니다.

  이대원은 박영선목사의 강해설교가 갖는 특징으로 “말씀의 현실적 적용”을 제시하면서 “박영선의 모든 설교는 성도들의 현실생활에 적용하도록 설득력 있는 메시지로 마무리되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박영선 역시 자신의 책 로마서 강해26)에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는 유익을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설교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만 그칠 수 없고 해석한 것이 ”지금 여기“청중들에게까지 내려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박 목사는 설교의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교회나 청중이 처한 삶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27) 박영선목사는 성경강해에 있어서 메시지의 적용을 구체적인 교회상황에서의 성도들의 이해에 맞게 제시한다고 이대원은 지적28)하며, ”교회 안에서의 다른 모든 일들은 성도들이 깨달은 신앙을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주어진 어떤 일 들일 뿐29)“이라고 박 목사 자신도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박영선 목사의 실천 지향적인 설교는 기독교 복음의 지식적 이해를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근본주의적 운동을 추구하던 한국교회의 패턴을 신앙적 삶의 실천을 통한 성화30)로 20세기말을 거쳐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교회성장의 방향을 제시하는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선교 100여년을 지나는 동안 전도와 다양한 신앙훈련을 통한 외형적 성장을 추구해 왔다면 (제자화), 이제부터는 그동안 간과해 왔던 신앙인의 내적인 성숙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신앙인 다운 태도를 드러내며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된다고 (완전화) 박영선 목사는 주장합니다.

이제는 기독교 복음의 헌신을 열심과 운동성으로 표현하기보다, 일상적이고 다양한 현실에서 신앙인의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실천을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성숙한 복음에의 헌신을 가르쳐야 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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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설교와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의 이원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박영선목사의 대안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출발됩니다. 성경은 단순한 교재(text)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분이신가를 기술할(indicative)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분의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필연적으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할(imperative) 본문(Text)32)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context) 가운데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설교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본문의 뜻을 밝혀 청중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적용함으로서 말씀을 듣는 청중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응답하여 행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3) 이런 점에서 박영선목사의 설교와 적용이 갖는 기본 신학은 개혁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죤 칼빈 (John Calvin)의 실천적 삼단논법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칼빈은 인간의 선을 행함(성화)은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표징이라고 주장합니다.34) 전통적인 가르침과 같이 지식적인 구원의 확인도 중요하지만 구원의 확인은 지식이 아닌 성도의 성화 된 삶으로 증거 된다는 점에서, 박 목사의 기성교회의 이원론적인 가르침과 삶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개혁교회의 줄기찬 흐름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개혁의 외침인 것입니다.      

  성경의 주해와 주해된 내용의 해석과 연결해 설교와 기독교 교육의 적용 문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본문의 주해가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적용이 잘못되면 올바른 삶의 변화를 이끌지 못할 것이요 아무리 바른 해석학적 원리와 교수방법을 사용한 설교라 할지라도 주해가 근본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면 헛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과 설교의 이원화 문제 해결을 위해 성경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해(exegesis)와 (이론적 주해가 아닌 실천적 주해) 이의 현재적 적용으로서의 해석학적 노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박영선 목사가 말한 “교회가 발전한다는 척도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교인들의 신앙이 성숙해 나간다는 점”이라고 말한 것과 “성경은 우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을 완성하는 것,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라35)”는 글에서 그의 목회 및 설교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의 설교는 교인들로 하여금 지금(already) 순종할 수 있는 만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만큼 그 분의 거룩하심에 이르기까지(not yet) 자라도록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는 누구에게든지 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어 거기에서 본인의 신앙이 크도록 하고 교회의 모든 책임은 성도들이 훈련의 과정을 거쳐 교회가 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36) 이와 같은 박 목사의 설교에 대한 일원론적 적용은, 간하배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회적, 교육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좀더 성숙하게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방향성 안에서 지속되는 “나선(spiral)적” 순환으로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본문과 상황” 또는 “믿음과 실천”이라는 이원화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