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1) (히7:11~28)

2018. 11. 2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일 설교는 로마서 강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로마서 8장을 여러 번 인용하시면서 설교하셨는데 핵심은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있는 가였다. 물론 성경을 향한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현실이 지금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몹시 괴롭지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가, 이다.

먼저 로마서 8장28절이 대답한다.
해 봐라, 걱정 말고 해 봐라. 승리를 내가 보증한다.

의심 많은 우리는 그래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더 확실한 말씀은 없어요? 라고 묻는다.

로마서 8장30절이 다음으로 대답한다.
얘야, 영화롭다는 말은 승리할 때 쓰는 말이니 패배했을 때 쓰는 말이니? 물론 승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렇지? 너의 영화로운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어. 그러니 승리도 함께 정해져 있는 거지.

우리가 아직도 머뭇거릴 때 로마서 8장32절이 또 대답한다. 내가 아들도 너에게 내주었지 않니? 내가 무엇인들 너에게 주지 못할 것이 있겠니?

(2) 갑자기 어떤 교회, 어떤 목사님의 3박자 축복이 생각난다. 성경은 그 복과는 정말로 다른 것이 우리의 복이라고 하신다.

걱정 말고 해봐, 이미 승리는 네 것이야. 그 길을 가는 동안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내가 줄게.

갑자기 이름을 붙이고 싶다. 로마서의 3박자 축복.

2. 내 용

가. 서 론

(1) 히브리서 7장에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긴 설명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설명은, 구약에 있었던 제사장 제도는 해마다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해마다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 피의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고, 그 제사장이 죽으면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제사장을 세우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죄를 속하는 일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서 그 일을 단번에,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를 바침으로써 하셨다. 그 효력은 해마다 반복할 필요 없이 영원하며 단 한 번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제사장 직이 수명에 따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오늘 본문 27절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번에 하늘 보좌에 올라가셨고 죄는 끝장이 났으니까 우리를 당장 천국으로 불러야 하는데 아직 이 땅에서 살게 하고 계신다. 그러면 남아 있는 날은 무슨 의미인가? 더욱 확인해야 할 중요한 선언은 25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신다고 한다. 그러면 단번에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신 분이 아직 살아서 제사장 역할을 하는 건 설마 죄가 반복되는 것을 씻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3) 우리 모두가 기독교의 내용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오해되고 있느냐 하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으나 또 다시 짓는 죄로 인하여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에 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는데 이 땅에 남아 있는 기간,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여전히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약속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가지는 영광된, 명예로운, 인생을 못살고, 다만 반복되는 자책, 회개로 돌아가는 일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본 론

(1) 히브리서는 성도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 예수를 믿었으나 현실적으로 세상의 핍박을 받아야 하고, 좋은 믿음을 가졌으나 이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현실은 무엇인가 하는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이다. 그 위로는 단순히 잘 견디어라, 하는 얘기가 아니라, 이 어려움을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고 격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 어려움을 왜 주시는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편을 드시는데 고난과 어려움이 왜 있는가? 그 문제에 대한 당연한 질문이 나와야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가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면서,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부한 것 같이 불순종의 죄를 짓지 마라, 순종하라 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순종이었는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순종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고 광야에서 죽었다. 지금 예수께서 약속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18절에 있는 것처럼,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는 것이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이래야 된다, 이러지는 마라, 라는 권면 속에서, 법적인 요구 속에서 조상들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제 예수를 보내어 그 실패를 승리로 바꾸기로 하셨다. 율법이 다만 잘 잘못에 대한 기준이고, 잘 잘못에 대한 판단에 불과했다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더 좋은 소망, 더 좋은 어떤 새로운 방도를 가지고 오신 것이며 22절처럼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놔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대제사장 직이라는 것의 의미이다.

왜 하필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어 기왕에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셨으면 우리를 당장 데려가시지 왜 고난에 찬 인생을 살게 하는가? 실패해서 자책하고 슬퍼해야 되는 과정을 허락하시는가? 예수님께서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새삼스럽게 고생하실 필요가 있는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벌어지는 고난에 찬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탕자의 비유를 보자.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기쁘게 받아 주신다. 이걸 본 큰 아들은 화를 낸다. 아버지는 말한다. 얘는 나갔다가 들어왔으니 어찌 아니 기쁠 수가 있느냐? 그러나 너는, 내 모든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우리에게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이 끝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도 아들다워지는 훈련을 시킬 것이다. 큰 아들은 인감도장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의 한도 무제한인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 큰 아들은 자기의 신분과 지위와 영광된 책임을 모르고 있다. 작은 아들도 물론 돌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길을 갈 것이다. 우리도 구원을 받아서 그 길을 가야하는데, 우리는 나갔다가 들어오는 일만 반복하고 있다.
달란트의 비유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종들에게 맡기고 주인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 동안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살아서 이익을 남겼으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주인은 화를 낸다. 너는 나와의 관계가 이것뿐이냐?

두 충성된 종은 주인이 자기네들에게 주인의 기업과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여 힘을 다해 봉사했다. 무슨 유익이 있는가? 주인이 가진 어떤 경지에 동참하며 주인이 가진 책임에 동료가 되는 귀한 기회를 받게 된 것이다. 마지막 종은 죄 안진 게 다였다. 말아먹지 않는 게 다였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렇지 않은 인생을 살게 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그리하여 주인의 마음을 나누어 갖는 일에 우리 인생을 부르고 있다.

이것이 인생을 왜 남겨 두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성경이 달란트 비유를 들어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롬5:1~11) 성경은 우리의 미래가 소망을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약속한다. 우리는 질문한다. 그럼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5절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소망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원래부터 구원은 우리가 필요를 알지 못했을 때, 요청하지 않았을 때, 자격이 없을 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후 8절과 9절과 10절로 온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더욱 유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준 것으로 편을 들었다면, 살아있는 권좌에서는 얼마나 더 편을 들겠는가?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장하는 지를 보여준다.

(11절) 여러분들이 받는 모든 실패와 고난들이,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의 사역 안에서는 절망이나 실패가 될 수 없도록 묶어 놓고 있다고 말한다.

(3) (롬8:15~17) 이 본문은 공포를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의 확증은 공포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기회는 어떻게 하나를 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익하게 쓰이기 위해서 허락된 것이다. 우리의 잘 잘못을 심사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가 아니며 우리에게 넉넉하게 이기도록 주신 기회이다. 넉넉하게 라는 것은 우리가 겪는 고통, 후회, 무력감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커다란 하나님의 요구라는 뜻이다.

8장 17절처럼 말하자면, 고난이 주는 공포 때문에 실패하는 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에 대한 성경의 답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널리 인용하는 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능력과 지혜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니까 고난을 고통이라는 차원에서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우리의 유익을 위한 최고의 지혜이며, 최고의 권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하는데 까지는 16년이 걸린다. 그 후 대학원을 가고 박사학위 받는 것이 영광이 아닌가? 물론 길수록 고되다.

우리가 어려웠을 때 누나들이 우리를 학교에 보내려고 공장에 갔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출근할 때 책가방 들고 다니는 아이를 보는 것이 제일 부러웠다는 누나들의 말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긴 시간에 걸쳐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매면서까지,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가장 웅변적으로 증언하신다.

신이 그 구원하려는 대상을 위하여, 신을 모욕하고 배반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셔서 대신 죽는데, 배반한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는 방식을 택한다는 것은 어떤 문학도, 역사도, 철학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인생의 난제와 곡절과 말이 안 되는 비극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십자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여러분의 고난에 찬 인생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들기 위해 유학 보내고 장학금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자신 만만한 투자요, 주어진 기회가 분명하다면 우리 인생은 좀 더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개입하시고 요구하셔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고난에 찬 현실이 승리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약속이 성경에 있는가? 당연히 있다.

(롬8:24~28) 여기서 성령의 탄식은 왜 나왔을까? 우리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 주시든가 아니면 죽여주시옵소서. 이러니 성령이 혀를 찬다.

28절을 보자. 성경은 말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해보라고 하신다. 걱정 말고 해봐라. 승리를 내가 보증한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잘사는 부잣집이 있었다. 넝쿨장미가 심겨져 대문위에까지 넘치는 집이었다. 하루는 친구들끼리 제기차기를 하고 놀다가 그 집 아들이 어느 집 굴뚝을 붙잡고 차던 중 굴뚝이 무너졌다. 우리는 경악했다. 우리는 그 아들이 이제는 죽었다, 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나와서 두들겨 팰 테니까. 애가 그 집에 들어가 그 집 아버지에게 말하자 그 아버지는 애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시멘트와 기와와 굴뚝재료를 싣고 인부와 함께 오더니 그 굴뚝을 고쳤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런 아버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아버지를 여기에 비교하겠는가? 산타클로스나 드나드는 굴뚝에 비길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진다. 우리는 이런 보장과 권능 속에서 살고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더욱 자신 있는 성경을 보자.

(롬8:31~30)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물론 미래의 일이지만 그러한 우리의 운명은 이미 완료형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도 잘 못 믿는 우리를 위해 계속한다.

(롬8:31~34) 34절에 보면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잘못을 회개하고 지우고 돌아오고, 또 그렇게 하고, 하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에 오늘 일어난 일을 유익으로 삼아 내일을 그러지 않겠다는 실천이 없다. 이 일에 자신을 격려하거나 기대하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주일에 오시는 표정을 보면, 성경에 마치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것 같다. 그건 아니다.

하나님, 오늘 제 예배를 기쁘게 받으심을 믿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 찬송을 받으시며 주의 약속 속에서 힘을 얻어 이번 주는 더 잘 살겠습니다. 이런 진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강요할 필요도 없고 윽박지를 것도 없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허락된 복음이다. 새 사람으로 새 기회를 가져 보는 것. 명예와 영광을 위해 주어진 실제적인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늘 와서 잘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돌아가기에 바쁘다. 그러지 말라고 로마서 8장 전체는 권면한다.

(롬8:35~39)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여러분의 현실에서 고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이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잘못한 일을 통해서 더 훌륭하게 된다. 사람의 이해력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더 많이 생긴다. 못난 사람들은 잘못한 것을 우기지만 우리들은 잘못한 것으로도 유익이 생긴다. 이 신비는 히브리서 8장에서 더 얘기하겠다.

교회에 오면 웃는 얼굴을 할 수 있는 복음을 소유한 자의 자랑이 여러분을 승리하게 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12월 7일은 (음력 11월 1일) 박 목사님의 70회 생신이었다. 나는 생신 전에 우리 교회의 어떤 모임에서 함께 생신을 축하드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벌써 일흔이시라고? 아유 큰일 났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나는 목사님 설교가 끝도 없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이기주의자인가 보다.

(2) 교회가 시끄러울 때 목사님은 조기 (만 70세 이전에) 은퇴를 하시겠다고 했다. 아니 어떤 목사님은 정년을 10년 연장하기도 하신다는데. 그러나 목사님 말씀은 단호했다. 담임 목사라는 자리는 권력이 아니야, 더구나 이런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어. 그리고는 정말 조기 은퇴를 하셨다. 그 때는 몹시 섭섭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정말 감사하게도 아직 우리와 가까운 곳에 계신다. 손을 뻗어 닿을 만 한 거리에. 내가 진심을 다해 감사하는 일이며 나의 기도제목 1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