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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전달
한국교회설교자와 설교세미나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전달
정 창 균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설교학)

들어가는 말

   박영선 목사 설교 세미나를 위하여 본 발표자에게 할당된 분야는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전달”이다. 설교의 전달 문제는 단순히 그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 설교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어떤 음성으로, 어떤 언어나 용어를 사용하는가, 혹은 어떤 수사법을 구사하는가 하는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서의 전달 문제는 더욱 근본적인 영역들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가 설교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것은 그가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가 어떤 신학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는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는 청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는 박영선의 그러한 방식의 설교 형성에 근원적 역할을 했다고 보여지는 그의 신학과 성경해석을 개괄하고 그의 설교에 나타난 몇 가지 현상들을 전달의 관점에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박영선 설교의 일반적 특성

   박영선의 설교는 믿음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핵심으로 하는 그의 확고한 신학적 체계와 그러한 신학적 체계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명쾌한 본문해석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신학과 본문해석에 대한 본인의 인격적 헌신 혹은 열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신학세계 그리고 그의 성경해석에 관한 논의는 그 분야의 다른 발표자에 의하여 심도 있고 체계 있게 다루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의 설교사역이 어떻게 그의 신학과 성경해석과 필연적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그의 설교의 일반적 특성이라는 관점에서 간략히 요약해 보고자 한다.

1.1. “성화 중심 설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한마디로 “성화중심 설교”라고 특징짓는다. 이것은 그의 설교가 특별히 신자들의 성화 즉 성숙의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설교가 성숙이라는 문제를 핵심 주제로 삼게 된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고1)에 이미 시작된 믿음에 대한 의문과 후에 깨닫게 되는 구원의 이중적 국면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온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오랜 고민의 과정을 거치면서 확립된 신학적 체계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결과인 것이다. 그의 믿음에 대한 고민은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관련하여 나타난 것인데, “어떻게 내가 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믿음”은 그가 고1때부터 시작하여 평생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연구한 주제라고 술회한다(믿음의 본질:11). 긴 고민과 고뇌에 찬 연구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믿음은 은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확신을 수반하였다. 이러한 결론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 15년 전에 그가 행했고, 후에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표제를 달고 출간된 그 설교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믿음을 말할 때 그가 붙잡고 있는 대전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었고, 당시 그가 설교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항복”이라는 사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악을 쓰며 부르짖는 설교전달의 모습이나,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거침이 없는 당당함, 그가 강단에서 전혀 두려움이나 거리낌이 없이 자유를 누리는 것 등은 그의 성격이나 화술이나 웅변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철저하게 항복한 자로서 그 설교를 하는 데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 발표자는 그것이 그의 설교가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을 나타내는 근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여러 설교자 후보생들이나 설교자들은 그의 강단에서의 설교 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하려는 시도를 하곤 하였다.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그가 얻은 성경 신학적 결론은 ‘칭의 구원’과 ‘성화 구원’이라는 구원의 이중국면에 대한 구별이다. 그는 칭의 구원을 ‘신분의 구원’으로, 성화 구원을 ‘수준의 구원’으로 풀어서 설명한다(성화중심설교:122). 여기서 성화 구원은 칭의 구원을 얻은 신자의 책임임을 밝힘으로써 믿음의 은혜와 책임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성장하는 문제(성화)에서 믿음은 언제나 우리가 져야 할 분별이요, 책임이요, 선택입니다”(성화중심설교:129). “이 은혜는 우리의 반응과 책임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은혜이면서 끝까지 책임인 것입니다”(믿음의 본질:130). 칭의 구원 즉 신분의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을 수 없고 성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성장 문제 즉 신앙 성숙의 문제는 예수 믿고 난 후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숙제거리”로 인식하고 있다(구원 그 이후:13). 성화 구원이 없는 신자는, 마치 홍해를 건너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지는 않고 홍해 옆에 죽치고 앉아서 홍해를 건넌 사실에 평생 감격만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유를 들기도 한다. 그는 성경, 특히 서신서들의 핵심 주제도 바로 신자다운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설교의 관심이 신자의 성화 혹은 성숙에 초점이 맞추어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앙의)수준”이라는 단어가 그의 설교 가운데서 중요한 용어로서 빈번히 언급되는 배경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도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설교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성화 중심설교:122). 그런데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그가 경험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구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이중적 국면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데 있어서  모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의 국면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성화 중심 설교:122-3). 이러한 현실 인식은 그로 하여금 더욱 신자의 성화, 신앙의 성숙을 강조하는 설교로 나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숙에 초점을 맞춘 그의 설교가 신선하고도 명쾌한 성경해석을 근거로 통쾌한 논리적 설득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전달될 때, “구원의 칭의라는 국면 밖에 이해하지 못하여 현실에 대하여 발언권도 없고”, “설교의 내용에서도 쩔쩔매는” 칭의 구원에 집착하는 메시지에 오랫동안 식상해 있던 기존 신자들은 그의 설교에 강한 인상을 받고 매료 당하게 되었다.  “기독교 복음 이해에 있어서 한 단계 발전된 복음의 소개”라는 인상을 갖고 그의 설교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이대원, 남포교회 성장요인으로서 박영선의 목회와 강해설교에 대한 연구:). 남포교회에 새로 등록한 교인들 가운데 여자등록교인들의 62% 그리고 남자의 65%가 박영선 목사의 말씀이 좋아서, 여자 등록교인 가운데 79%, 남자등록교인 가운데 76%가 타교회 출신(위 논문:)이라는 데서도 이러한 사실을 감지 할 수 있다.    

1. 2 독특한 관점에서의 성경해석

   박영선은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자의 음성입니까? 아니면 제스처입니까? 이런 것들이 아니라 제일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이 문제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이해와 답변이 설교를 좌지우지 합니다”(설교자의 열심:131)

   이 진술에 의하면 그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가 성경을 접근하는 시각은 그가 믿음과 구원에 대하여 고뇌하고 연구하며 얻은 신학적 결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그는 이미 자신에게 정립되어 있는 신학적 결론이나 개념, 혹은 주제들로부터 얻은 시각을 가지고 본문을 접근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그의 설교를 그가 성경을 접근하는 시각은 성경해석학이 제시하는 여러 성경해석 방법들 가운데서 어떤 방법을 채용하고 있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장 문제 즉 신앙성숙의 문제는 예수 믿고 난 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숙제거리”(구원 그 이후:13)라는 그의 말이 암시하듯이, 그의 설교적 관심은 신분의 구원을 받은 신자가 어떻게 하면 신자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성경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소위 성화 중심 혹은 성숙 중심의 시각으로 본문을 접근하게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성화중심의 본문 해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신자의 신자다운 삶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화된다. 즉 본문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신자의 신자다움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는 시각에서의 본문 해석은 그가 믿음을 주제로 하여 아브라함 등의 본문을 설교한 초창기 설교에서부터 이미 확고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는 족장들과 사사들에 대한 설교로 성경 인물설교의 새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인물설교는 종래의 일반적인 설교들과는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다루는 성경 인물의 영웅됨이나 모범됨이나 뛰어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다루고 만들고 이끌고 있는가 라는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인물 본문들을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물 설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설교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설교였던 것이다.  

   박영선은 자신의 설교를 위하여 다른 사람의 해석의 아이디어나 본문에 대한 관점을 채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을 공공연히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시각이나 관점을 그대로 다시 내놓는 법이 없다. 로이드 존스가 들어가건, 헌터가 들어가건 박영선이라는 블랙 박스를 통과하여 강단에서 다시 나올 때는 오로지 박영선이 나오는 것이다. 이점에서 박영선의 로마서 설교의 탁월한 메시지가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읽은 결과로 나온 것이라 하여 박영선을 닮기 위하여 그가 읽은 로이드 존스를 읽는 것은 별 소득이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의 사사기 설교가 각광을 받으며 행해지고 있을 때 그의 사사기 설교는 John E. Hunter의 책을 참고하여 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신학생들이 Hunter의 책을 구해서 복사를 하여 읽음으로써 자신들도 박영선 목사처럼 사사기를 설교해보겠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박영선이 읽은 Hunter를 읽고 박영선 처럼 사사기를 설교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해석이나 전달에 있어서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박영선의 설교관

   박영선의 설교를 분석하고 평가하기 전에 박영선 자신은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논의를 위하여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설교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 그러니까 날 찾아오시는 인격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 남이 안한 말, 새로운 감동, 이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인격 앞에 세워진 느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그래서 테크닉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을 해나가는 진지한 열심의 표현입니다…. 설교는 교육수단이 아님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인격 대 인격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자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며 한 영혼을 항복시키십니다. 설교자는 이 점을 명심하고, 어떤 식으로 설교를 해나가는 것이 정당한지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cf. 설교자의 열심:204-208).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인격과 인격이 마주치는 하나의 사건(event)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므로 그것은 말씀 사건(Word-event)이다. 이것은 그의 설교론이 지극히 개혁주의적인 설교관에 근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격적 관계”라는 개념은 그의 청중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믿음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인격“적 관계를 근거로 삼는다. 그에게 있어서 신자의 성숙에 있어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인격적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전달의 관점에서 본 박영선의 설교

3. 1 박영선 설교의 수사학        

   박영선의 설교 전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논리적 전개이다. 그는 설교의 전달을 회중과의 논리 싸움에서 청중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에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작전과 고도의 계산된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설교는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회중을 논리적으로 항복시켜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설교하면서 성질내지 마십시오. 물론 설교자가 먼저 흥분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전상 그러면 안됩니다. …  그렇게 때문에 회중이 ‘아’ 하고 항복지점까지 갈 동안 내가 먼저 감정적으로 흥분해버리면 회중이 논리적인 설득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도로 자제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마음에 감동이 있어도 회중이 알아먹는 표정을 보이기까지는 먼저 흥분하면 안되는 것입니다”(설교자의 열심:168).

   이러한 그의 진술은 그가 자신의 설교 전달에 있어서 논리적 전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며, 그를 위하여 얼마나 치밀한 수사학적 계획을 가지고 전달하는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그의 설교에서는 언제나 논리적인 명쾌함을 볼 수 있으며, 그의 주제나 메시지, 혹은 아이디어를 청중에게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강단에서 그가 설교하는 열정적인 모습 자체가 자기가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인격적 헌신과 열정의 표현이 되면서 그의 설교전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수사학의 기능을 한다, 청중에게 이해와 납득을 시키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듯 자신의 주제를 설명하는 일에 몰두해 있는 모습 자체가 이미 구어 커뮤니케이션(oral communication)의 상황에서는 상당한 수사학적 장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는 악을 쓰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을 더듬거나, 청중에 대하여 못알아들으니 답답하다는 노골적 표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이 청중으로 하여금 그가 하는 내용이 때로는 다분히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 강의와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강의실에서 지루한 신학 강의 듣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청중은 자신의 설교에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그렇게 선포하는 메시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는 강단에서 가끔식 쏟아내는 욕설 까지도 사실은 그렇게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청중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진실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의도로 사용한다. 실제로 그는 소리를 너무 질러서 스피커가 나간적도 있음을 술회한 적이 있고, 또 자신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이 욕 때문은 아니지만 욕을 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진심을 이해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언급한 적도 있다.

3. 2 설교의 유형

   오랜 세월 동안 설교의 전형적인 유형으로 군림해 온 설교 유형은 대지 설교이다. 그러나 박영선은 대지설교를 선호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배척한다. 물론 최근 들어서 여러 설교학자들이 전통적인 대지 설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비판의 요지는, 설교가 청중의 변화라는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청중을 설교로 끌어들여 함께 공감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대지설교는 설교의 흐름도 없고 청중이 함께 공감하는 것도 없이 설교자가 내린 결론을 3가지로 요약하여 전달해주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영선은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대지 설교를 거부한다. 그의 설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설교의 논리적 전개를 대지 설교는 방해한다는 것이다.

“첫째, 둘째, 셋째, 이렇게 대지를 나누는 방법은 그리 바랍직하지 않습니다. … 이런 방식을 취하면 논리의 흐름이 자꾸 토막지어집니다. 논리적인 흐름이 끊기면 어떤 약점이 생기는가 하면 당연한 말만 늘어놓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란 상식과 윤리성에 근거를 둔 당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첫째, 둘째, 셋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이어가는 설교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어느 한 개념이든 사건이든 한 방향으로 추적해 들어가기에 훨씬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설교자의 열심:196-7).

   박영선은 논리적 전개와 그를 통한 논리적 항복을 청중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그가 지향하는 설교의 일차적 목표임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설교 전개에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지 설교를 그가 선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논리적 전개와 논리적 설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소 다른 스타일의 설교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마태복음 18:6 이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전개하면서 “소자를 찾아가는 소자”라는 이미지를 주제로 삼고 그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청중이 자신들의 모습을 소자를 찾아가는 소자의 모습으로 기억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는 설교를 한 적이 있다(합동신학대학원 채플:2001.3.16). 사실 필자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논리적 언어의 사용에서 그림언어의 사용으로, 논쟁에서 이미지로의 변신을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는 박영선 설교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설교를 논리의 싸움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한걸음 나아가는 진전, 혹은 다양성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청중을 변화시키는 데 있으며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달의 방편들이 시도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으로 설복을 당했을 때, 통쾌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변화의 동기는 여전히 잠재우고 있을 수도 있다.

3. 3 설교의 제목

   그는 설교의 제목이 갖는 메시지 전달의 기능이나, 제목이 갖는 청중을 설교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염두에 둔 설교제목 정하기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듯하다. 그가 자신의 설교에 붙이는 제목들은 거의 다 평범하고 단순한 표현들이다. 그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렇게 제목을 정해오고 있는 것 같다. 설교의 제목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제목은 평범하게 만드십시오. 매력 있게 보이거나 궁금증을 더할 요량으로 너무 재주를 피워서는 안됩니다….너무 빗나가면 회중이 설교자의 교양과 상식, 학력을 의심합니다”(설교자의 열심:174).

3. 4 도입부

   주로 연속 강해설교이므로 때로는 다루어오고 있는 주제, 특히 지난 설교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늘 다룰 주제를 본문의 상황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제시하는 식으로 설교의 말문을 여는 방식을 취한다, 더 자주는 본문의 문맥을 설명하면서 곧바로 본론으로 진입하는 방식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전략적으로 작성하여 제시하는 그런 도입부는 박영선 설교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즉, 설교학 교과서가 흔히 제안하는 3분 이내에, 전체 분량의 10분의 1정도의 분량으로,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 성공하도록 등의 도입부 작성에 대한 원칙 등과는 관계가 없는 도입부이다.  

3. 5 전개

   “설교는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회중을 논리적으로 항복시켜나가는 과정입니다”(설교자의 열심:168)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전개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메시지를 드러내고 논증하고 납득시켜서 청중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논리적 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설교 중에 본문을 다루는 상황에서  “추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도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전개는 다분히 논리적 추적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대지 설교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앞에서 인용 하였 듯이, 설교를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논리적인 흐름이 끊기고 논리의 흐름이 토막이 져서 주제를 한 방향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설교의 논리적 전개를 설교 전달의 결정적인 요소로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설교를 논설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의 설교는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서론, 본론, 결론의 단락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설교 전개는 서론, 본론, 결론을 따른 전개라기 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내건 주제를 보완하거나, 논증거나, 확장하거나, 강화하기 위하여 단계마다 관련 성구들을 연속적으로 인용하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간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의 관련 성구의 인용에 대하여는 아래의 다른 항목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3. 6 예화와 비유의 사용

   예화의 역할 혹은 기능에 대하여 그는 나름대로의 이해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청중들이 막혀하는 부분이 생기면 그 부분을 추적해서 부연 설명을 해줘야 합니다. 그러러면 설명을 돕는 예화를 도입해야 하는 법입니다. … 예화라는 것은 ‘난 이번에는 반드시 이것을 한다’하고 정해놓지는 않습니다. 예화는 그렇게 드는 것이 아니지요. 설교를 하다가 ‘이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이해 못하는 구나’하면 번쩍 하고 뭐가 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 놀 틈이 없습니다. 예화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영화란 영화는 다 봐야하고 책도 엄청 읽어두어야 합니다”(설교자의 열심:191).

   그는 설교에서 많은 예화들을 사용한다. 일화로서의 한편의 이야기 예화도 등장하고, 특히 영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근래에는 좀 뜸하기도 하지만). 구원을 신분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성화의 구원을 수준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명쾌하게 구별지으면서 사용하는 거지왕자의 예화나(구원 그 이후:32 이하), 믿음을 하나님을 알아가는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그가 동원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 예화 등은 유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주제를 더 선명히 드러내거나 강화하거나 보완하기 위하여 혹은 그 주제를 더 확장하고 진전시키기 위하여 그가 더 자주 그리고 자연스럽게 동원하는 방편은 완성된 이야기로서의 일화들이 아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보거나 경험하거나 모두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어떤 상황들을 끌어다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면을 부각시켜서 자신의 의도에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도록 사용한다. 이것은 예화라고 하기보다는 비유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는 예화보다는 비유를 더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탁월함은 적합한 이야기(예화)를 잘 골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일들로부터 자신의 논점을 부각시키는 강력한 관심을 부각시켜서 꼼짝 못하고 그의 주장에 수궁케 하는 예리함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인용한 예화와 관련한 그의 언급은 예화 스크랩북이나 예화 모음집을 많이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일상에서 접하거나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한 설교자로서의 관심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설교의 주제 혹은 메시지 혹은 논점을 선명하게 드러내려는 끊임없는 고민과 그리하여 그것을 명쾌하게 드러내어 밝혀줄 수 있는 것과 연결시켜 드러냄으로써 답답해 할 청중을 이해시킬 수 있는 통찰력 내지는 순발력의 개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설교에서의 예화의 사용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그가 자신의 주제를 보완하거나 더 발전시키거나 강력한 지원을 얻거나 하기 위하여 더 많이 동원하는 방법은 예화나 비유라기 보다는 본문 자체를 패러프레이징 하거나 혹은 패러디 하거나 그리고는 관련된 다른 성구들을 인용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10:9-15을 본문으로하여 은혜와 동시에 책임으로서의 믿음이라는 주제로 한 설교에서 행16:31, 엡1:3-6, 사7:1-9, 빌2:5-8, 엡1:17-22, 엡4:13-16 등 6곳의 성구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롬10:9-15을 본문으로 하여 제시한 은혜임과 동시에 책임으로서의 믿음이라는 주제를 보완 혹은 강화 혹은 전개하는 강력한 자료로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는 인용한 성구에서는 자기가 필요로 한 부문만을 부각시켜서 사용하고 다음 주제 혹은 다음 성구로 넘어감으로써 인용한 본문을 또 하나의 본문으로 또 한편의 설교를 시행하여 본래의 주제를 일탈하기 쉬운 위험을 피해간다.    

3. 7 탁월한 언어 구사력

   박영선은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언어구사, 특별히 어떤 신학적 주제나 아이디어를 명쾌하게 개념화하여 구별해내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구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잘못된 개념을 “확률적 판단”이라는 용어를(성화중심의 설교:124) 사용하여 명쾌하게 구별해내는 것, 한국교회가 구원에 대하여 혼돈하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구원의 개념을 칭의 구원과 성화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명쾌하게 구별해내면서 칭의의 구원을 신분의 구원으로 성화의 구원을 수준의 구원으로 부연설명하는 것(성화중심..:122-),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할 때 행위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것은 행동(action)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과율이라는 용어로 그 뜻을 구별하는 것, “믿음은 수단이 아니라, 내용이다”는 믿음에 대한 설명, 그리고 성령 세례의 개념에 대한 용어적 구별 등등 그의 언어 구사의 탁월성은 그의 설교 도처에서 번뜩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탁월성은 단순한 그의 말재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그 주제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구, 그리고 언어학적 이해의 배경으로부터 나온 결과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의 언어 구사의 탁월성은 언어학적, 개념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그의 화술에 있어서도 그는 뛰어나다는 것이 그의 설교 전달에서 나타나는 언어구사력에 대한 정평이기도 하다. 그러한 평가, 즉 “그는 말을 잘 한다”는 일반적인 평에 대하여 그는, “내가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전달하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그의 답변에 의하면 그의 말 잘함은 화술의 문제나 달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 즉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확실함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할찌라도 그가 화술에 있어서도 남다른 탁월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8 긴문장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키려는 시도의 결과로 그는 일반적으로 긴 문장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긴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그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긴 문장으로 말하다보니 한 문장 안에서 앞뒤가 얽히게 되고, 의미하는 바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있다. (실제 테이프 청취).

3. 9 비속어의 사용

많은 사람들이 박영선의 설교 언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원색적이고 거친 단어 곧 비속어(욕설)을 서슴없이 사용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설교 중에 욕을 하는 이유를 말해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 적이 있다.

“열심있게 하나님 편을 드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편에서 열심 있게 하나님 편을 드는데, 그 대상인 성도들의 대부분이 욕먹을 수준에 있습니다. 그러니 욕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하고 인연을 맺은 대부분의 성도들은 대부분 그것 때문에 제 팬이 되었는데, 욕 때문이 아니고, 욕을 하는 그 뒤에 있는 진심을 이해했던 겁니다. 아. 이 목사님이 그냥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기울여서 하나님 편을 들고 우리 편을 드는구나 하는 것을 본인들이 감지한 것이지요”(오디오 테이프 “토크쇼, 젊은이와의 대화”,1996.816. 중에서).  

   그에 의하면 설교에서 비속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설교에 특색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재미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열성의 한 표현으로, 자신이 지금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와 있지 못하는 청중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이고, 교인들도 자신의 그러한 진심을 알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에게는 그것이 욕이냐 미사여구냐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설교 가운데서 이미 그 어휘를 동원하여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정도의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어느 여전도사는 그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욕을 해도 욕하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가 청중들에게 이미 그러한 어휘가 터져나와도 그 어휘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여건을 조성해 놓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박영선 목사가 가지고 있는 진심과 열정을 가진 설교자면 모두가 설교 가운데 비속어를 사용해도 괜찮은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필자는 80년대 초 남서울 교회에서 행해지던 박영선 목사의 설교를 처음 몇 번 들으면서 강단의 설교자로서의 그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에 대한 당당함,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넘치는 확신과 자신감, 청중의 호불호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그리고 그 메시지에 목숨을 건 사람 같다는 인상을 주는 열정 등이 그것이었다. 그때 필자는 그를 멋쟁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계속적으로 그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설교가 그러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배경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의 설교에 심취하게 되면서는 설교자로서의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의 그의 설교가 화술이나, 성격이나, 계산된 커뮤니케이션의 테크닉의 활용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설교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신학적 확신과 본문 해석의 관점, 그리고 자신의 신학적 확신에 대한 인격적 헌신의 열정이 그로 하여금 설교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동료 신학생들과 설교자들 사이에 그의 설교가 이슈가 되고, 박영선 설교의 독특성과 청중을 매료시키는 그의 설교는 그 어투와 말의 방식, 강단에서의 전달 방식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박영선의 설교 스타일 따라잡기에 나서는 설교자 후보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그러한 시도의 실패를 내다보며 염려하였었다. 박영선의 설교전달의 스타일을 모방함으로써 그와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는가? 그의 설교는 모방될 수 있는가?  

   박영선 설교의 성공은 확고한 신학체계와 그로부터 이루어진 일관성 있는 성격해석을 근거로 한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탁월한 전달의 능력이 합하여져서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민과 고통의 과정을 겪으며 정립되고 응집되어 자신에게 감동이 있고 열정이 있고 인격적 항복이 있는 신학적 체계와 그로부터 이루어진 본문해석으로 말미암아 도출된 메시지가 있어서 그의 설교는 단순히 기교에 찬 웅변이 아니고, 청중을 자유자재로 잡고 흔드는 탁월한 전달의 방편들을 구사하고 있는 설교여서 그의 설교는 강의실의 본문 주해 발표가 아니다. 우리도 설교자로서 우리의 설교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의 설교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그의 전달의 스타일에가 아니라 그러한 전달을 만들어 내는 그의 원리에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말한다. “평범한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 이런 설교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설교를 할 때는 뭘 번쩍번쩍하게 하려고 하지말고, 무디게, 그러나 길게 가는 그런 설교를 하고, 설교자 자신도 그렇게 다듬어져야 합니다(설교자의 열심:165-6).” 그러나 그의 설교를 놓고 아무도 평범한 설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비범한 설교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또 말한다. “설교하면서 성질내지 마십시오. 물론 설교자가 먼저 흥분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전상 그러면 안됩니다. … 그래서 (설교자 자신의 감정을) 고도로 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스피커가 나갈 정도로 악을 쓰고, 욕설을 쏟아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성질을 내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설교자들에게 경고한다. “경고합니다. 기발한 설교, 히트를 치려는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이 점을 평생 기억하십시오”(설교자의 열심:201). 그러나 그는 거의 매번 히트를 치는 설교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메시지는 그의 설교의 탁월함을 본받기 위해서는 그가 강단에서 보여주는 설교 전달의 어떤 스타일을 모방하여 박영선의 스타일 따라잡기를 해서는 안 될 일이고,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는 신학적, 해석학적 배경과 원리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정창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