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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회와 설교
한국교회설교자와 설교(제1회 박영선목사와 그의 설교)
                                                                박영선 목사(남포교회)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도 설교가 무엇이며 목회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설교가로서, 목회자로서 어떤 목표나 master plan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에 대한 짧은 안목이 있다면 목회를 하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만나게 된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자 생각한 때는 아마도 고등학교 1 학년 무렵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성장하면서 한국 교회의 보수적이고 내세적인, 그리고 결사 각오의 신앙을 갈등 없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쯤에 교회가 왜 현실에 대한 발언이 없는가, 그것은 기독교의 가난함 때문인가 아니면 가르친 사람들이 못다 가르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때에는 교회에 일년 중 몇 차례씩 부흥회가 있어서 이름 있는 분들, 설교를 잘 하시는 분들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이 분들이 하시는 설교 내용을 듣더라도 대부분이 내세적이고 결정론적이지 그 방법과 과정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같은 신앙을 갖자는 데, 어떻게 하면 그런 신앙을 갖게 되는지, 그 방법적인 접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성경의 본문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설교하면 그 분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소명에 대한 것도 일차적으로 목사, 하나님의 종, 이런 커다란 것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아휴, 내가 하는 게 낫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언제나 가졌던 가장 큰 숙제거리들은 “신앙의 현실성” 문제였습니다. 즉 내세적이고 종말적이기 때문에 외면되어 있는 ‘지금’이라는 삶과 인생의 가치에 관한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화’라는 차원을 이해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어서 ‘지금’이라는 시간이 다만 내세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완성되는 시간이며 기회로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인격적 특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제게 아주 중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저의 설교에 있어서나 목회에 있어서 이것이 하나의 큰 요소가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통해 발견한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일반 은총’에 관한 것입니다. ‘은혜’와 ‘초월’에 관한 것만이 하나님의 영역이거나 하나님의 복이 아니고 ‘일반’과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하나님의 복 주심들이 있다는 것, 다만 문제는 죄가 들어와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형태를 가진 것만이 아니고 보다 폭넓은 영역 속에 허락된 책임이며 특권임을 깨달은 것이 저에게 귀한 깨우침으로 설교에 배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몇 가지 깨우침으로 인해서 알게 된 것은 성경 속에 이 내용들이 다 있는데 한국교회의 설교는 이런 부분들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어떻다고 얘기하는 것은 좀 주제넘지만 제가 그 동안 교회에서 크면서 듣고 경험했던 모든 설교들은 이런 내용들은 손을 못 대고 오직 구원과 종말에 관한 것에 치중되었고, 성경의 어떤 구절이든 이 주제로만 끌고 갔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성경 전체를 말씀대로 한 번 추적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 스스로도 성경의 내용을 차근차근 확인하고 싶고, 또 교인들한테도 정확하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해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설교의 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한 얘기와 내용을 제대로 추적을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강해 설교를 통해서 배운, 깨우치게 된 아주 중요한 내용은 교회의 가치입니다.  물론 조직 신학에서 교회에 대해서 배웠지만, 성경을 강해하면서 배우게 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교회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거의 다 교회론 입니다. 교회 앞에 보낸 편지이고, 교회에 준 내용들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알다시피 유형 교회를 의미하는 것 이전에 무형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들이고 그 편지들은 내용상 ‘성화’에 주제를 두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성화를 위해서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게 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도가 실패치 않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설교와 목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어떤 방향을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설교의 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커다란 주제나 목적을 제시하기는 곤란합니다. 처음부터 이제까지 제 목표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차근차근 파헤쳐 나가 보자”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우선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성경 안에 있는 풍성한 내용들을 충분하게 나타내고 있지 못하므로 제대로 추적해서 그 내용을 제대로 한 번 파악해보자 하는 것이 설교에 있어서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물려받은 내세신앙 위에 전도운동과 성령운동에 몰두하고 있어 보입니다. 운동이 신앙의 균형을 놓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전체 내용 속에서 어떤 내용을 자신의 특기와 전공으로 삼는 것과, 그것만이 신앙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이런 신앙의 충만한 내용이 먼저 정리되고 소개되는 것이 시급합니다. 신학이 정립되지 않는 운동은 획일화되고 다양성과 충만함을 오해하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제 설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초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주권자이시라고 해서 인간이 꼭 은혜만 구하고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대등한 관계를 요구합니다. 사랑은 한 쪽이 상대방을 종으로 부리거나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가 하나님 앞에 책임 있게 반응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은혜로 입어야 됩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정하시고, 그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도 하나님 쪽에서만 하시며 우리는 생산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을 인식할 때 ‘죄’가 강조되어야 됩니다. 죄가 충분히 지적되지 않아서 필요의 가치가 인간으로 옮겨지거나 또는 필요의 내용을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같은 인본주의적인 발상이 개입되면 기독교 신앙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서 죽으실 필요가 없어집니다. 전적인 은혜가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전적인 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책임한 핑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입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서야하는 책임을 수반합니다.

저에게 목회는 “교회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성경을 추적해서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된다, 교회는 뭘 해야 된다”가 아니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하는 한, 성공한 목회라든가 성공한 교회라든가 하는 식의 평가나 발상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설교가 목회 성공의 한 방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틀린 말입니다.  늘 같은 얘기만 있고, 현실적인 필요에 답하지 못하는 교회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다수는 아니지만.) 설교의 방법이 아니라 설교의 내용에 있어서 충분한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갈증을 느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를 목회 성공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넌센스’입니다. 달리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이 내용을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저한테 ‘성공’이라는 외형적인 성과를 주시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한국 교회가 지금만큼 제 설교를 열심히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이가 성공한 목사의 설교라고 해서 들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굳이 제 목회의 방향을 말하라면 “성화”로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성화는 거룩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아직 되지 않은 것이지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까지 가도록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 목적지가 장소적인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내용과 수준의 문제이기에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가져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한 자가 되야 하는 것이지 거룩이라는 외부에 있는 어떤 물질을 내 안에다가 이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거룩해져야 됩니다. 생각과 책임과 노력과 성품과 실천에 있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쪽에서는 각자의 책임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 누구는 세 번 연습해서 되고 누구는 삼백 번 연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에 대해서 은혜와 책임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편을 들고 신앙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세상과 타협할 것이냐 하는 결정과 결정한 것을 내 것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인생이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인생 속에서 이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 번만에 어떤 부분을 통과하고 깨우치고 자기한테 채워 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평생을 걸쳐 싸워야 하기도 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이 부분을 교인들에게 제일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명분 있는 어떤 사업보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현장과 일상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  목회에 있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와 목회에 있어 제가 초점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입니다. 교회란 무엇을 ‘하는’ 곳이기 보다 ‘되게’ 만드는 곳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신앙의 내용들과 성취에 과정이 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행착오가 있다는 것, 단숨에 되지 않는다는 것, 열심만으로 되지 않고 진지함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 소원해야 되지만 소원 위에 노력하고 연습해서야 도달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모두가 인정해서 시행착오를 감수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아쉽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에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완전주의적 명분에 근거한 비평으로 실패한 자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사람이 ‘되도록’ 기다려 주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맞다 틀리다, 너는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것은 못할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박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