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9) (히5:12~6:12)

2018. 10. 28(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설교에서 목사님은 야곱과 요셉과 욥을 예화로 거론하셨다. 야곱의 얘기에서 은혜가 되는 것은 야곱이 아무런 준비나 조건이 없이 얍복 나루에 있었는데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고 쓰는 것은,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본질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복은 아무런 준비나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다.

(2) 요셉 이야기는 오해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이런 거다. 요셉은 형들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감옥에서도 형통했으며 그런 형통 속에서 총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목사님께서는 이런 견해를 단 칼에 없애신다. 요셉은 혼비백산해서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형통을 따져 볼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설교에서는 조금 더 나아 가셨다. 요셉은 절망 정도가 아니라 원망하고 분노하고 자폭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신다. 위의 견해들과는 정반대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영광을 담으셨다. 백관을 제어하는 실력은 요셉이 훈련을 통해 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담으시자 실력은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전율이 느껴지도록 탁월한 해석이다.

(3) 욥의 얘기도 진화한다. 욥은 제가 비록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여기에 담으시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여기까지가 종전까지의 목사님 말씀이다. 이번에는 진화한다. 제가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 해도 일어나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순종이라고 못 박으신다.

2. 내용

가. 서론

(1) 오늘 본문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나는 매우 중요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고가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히브리서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러 번 얘기하듯이 초대 교회의 박해 속에서 어려운 현실을 사는 교회를 향하여 주신 권면의 말씀이고 위로의 말씀이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대로 믿음을 지켜라, 목숨을 걸어라 라고 하지 않고 지금 이 경고가 보여 주듯이 다른 식의 위로를 주는데 그것이 어렵다. 히브리서 전체를 이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드러나는 가장 위대한 인물들과도 다른 훨씬 높은 성자 하나님이며, 천사와도 구별되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인 것이다.

이 구원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 즉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오신 사건이요, 약속이요, 운명이다. 그러니 순종해라,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순종에서 실패하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한다. 순종이라는 것이 한번 잘한 선택이거나, 잘못한 선택이라는 문제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설명되고 있다.

나. 본론

(1) 예수께서 와서 우리에게 하시려는 구원은, 시편 8편을 인용한 히브리서 2장에서는, 사람이 무엇이 길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귀히 여기사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십니까? 라는 성경의 고백을 인용하여 구원의 궁극적 영광을 다시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이 현실 속에서는 욥기 7장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사람이 무엇이 길래 하나님이 오셔서 못살게 구십니까? 저 하나 잘못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습니까? 죽게 내 버려두십시오.

앞의 영광과 뒤의 한탄 사이에 순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종을 하면 영광의 자리에 갈 것이요, 순종하지 않으면 한탄에 갈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순종이 요구되는 성경의 요구가, 극심한 고난과 절망 속에 격려를 주기 위하여 한 명령이라고 이해한다. 순종할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걸 하면 되지 격려가 왜 필요한가? 모두 내 잘못 아닌가? 나하기 나름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순종을 들이 대어 격려하는 것은, 여기에는 우리가 책임질 것 보다 더 큰 어떤 신적인 도우심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일어났던 가나안 입국 거절로 인하여 벌어진 실패를 교훈삼아, 너희는 너희 선조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것 같이 실패하지 말라, 로 주어지고 있다.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이 권면에는 지금의 현실 속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는 설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출애굽으로 시작한 구원사건이 출애굽과 가나안 과정 내내 하나님이 다 하셨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기로 하는 결정과 순종은 우리가 했어야 했다. 그들은 실패했다. 그래서 광야에서 다 죽고 그 후손들이 들어간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거기서 살게 되었는데 사사기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도착한 땅에서 다시 실패한다. 그 실패의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 우상숭배였다. 우상숭배는 왜 잘못이며 그들은 왜 하나님을 진노를 불렀는가?

(2) 우상은 타협이기 때문이다. 무슨 타협인가? 하나님의 목적을 중간쯤에서 끝내려고 하는 타협이다. 우상은 전부 자신이 아는 만족, 자신이 할 수 있는 안심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상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시는 이유는, 나는 너를 그만하게 목적하지 않았다, 더 가야한다 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빛을 보고 영생을 얻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그리고 거기서 끝이라구? 너 정신이 있냐 없냐? 내가 가자는 곳이 얼마나 큰 곳이면 내가 내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겠느냐?

너희가 순종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더 가자는 것이다. 이게 왜 어려울까? 모르는 길을 가자고 하시기 때문이다.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은 왜 어려운가? (쇼생크 탈출 예화를 드심)

공포 속에 웃음이 들어오는 것이 쇼생크 탈출의 구원이었다.

자유란 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 선택한 것으로 울 수도 있고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서 인간다운 과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인간다워져야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인생을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넣으셨기 때문에, 돌아가서 과거를 회복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된 선택을 유익한 것이 되게 하는 오늘과 내일이 우리를 끌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돌아가서 후회 없는 자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후회가 일을 하라고 하신다.

폴란드 출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소개한다.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 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 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 지라도…. .

(3) 우리는 돌아서서 만회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완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도망갔던 모든 일들이 일을 한다는 것이 오늘의 깨우침이요 우리를 내일로 밀고 가는 힘이다. 살만해서도 아니고 살 실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살아야 된다는 아는 것이 순종이다. 아무런 실력도 분별도 없이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가? 중요한 성경의 인물을 예로 들겠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악착같은 사람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뺏기 위해 형을 속였고 도망갔다가 거부가 되어 돌아온다. 형이 야곱을 죽이러 나왔을 때 야곱은 얍복 나루에 선다. 절망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씨름한다. 그러나 야곱은 항복하지 않는다. 날이 새자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친다. 야곱은 가겠다는 사자를 축복하시지 않으면 못 간다고 붙잡는다. 야곱은 이름처럼 약탈자였다. 즉 자기를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신다.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라, 너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겼는가?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야곱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준비도 없는, 오직 자기 힘으로 비열하게 악착스럽게 산 것 밖에 없는 인생이었지만 결정적인 절망의 자리에서 그의 정체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은 여기에 담으셨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심는 대로 거두는 것에서 끝날 것이다. 그러한 삶은 한계가 있다. 우리의 최선까지 밖에는 못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역설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상상을 넘어 서는지, 여러분이 직면하는 분함과 절망과 실패를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여기서 보이신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고 종이 되어 종살이 하다가 감옥에 갇힌다. (시105:16~22) 요셉은 총리가 될 조건은 하나도 없었다. 말씀이 요셉을 단련한 것은 혹독한 것이었다. 요셉은 혼비백산해 있었다. 요셉은 절망 정도가 아니라 원망하고 분노하고 자폭하는 인생을 살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영광을 담아서 총리가 되게 하셨다. 그러자 희한하게 그에게 실력이 생긴다.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가 걸은 인생은 이런 것을 만들 수 없는 인생이었다. 아무런 선택도 대안도 방법도 없는 길을 걸었는데 이러한 것이 담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순종은 무엇인가? 이런 약속 속에서 살아 보라는 것이다. (롬5:7~11) 우리는 이 구절을 잘 이해 못한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거다. 너희가 죄인이었을 때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은 자리에서는 얼마나 더 많이 받겠는가? 또 병행법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죽는 방법으로 너를 구원하고 은혜를 끼쳤다면, 살아서 주시는 은혜는 얼마나 크겠는가?

목숨을 끊어서 진심을 설명하는 것보다 생명을 가지고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자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현실, 인생행로에서, 여러분이 마음속에 자책하고 비명을 지르는 모든 것은, 여러분이 자라나기 때문에 내 실력으로는 갈 수 없는 길에 인도되는 것이요, 우리가 모르는 길,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의심이요 두려움이요 난처함이다.

우리는 인도받은 자리에 아무런 준비 없이 실력 없이 가는 것 같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로운 자리로 끌고 가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 사람은 누구인가? 욥이다.

욥은 잘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시련 속에 들어간다. 친구들이 계속 잘못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계속 갔다. 나중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창조 세계를 보이신다. 모든 존재와 가치와 영광을 욥에게 설명한다. 네가 걸어온 길이 무슨 길인지 아느냐?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욥기42장에서 욥의 마지막 고백은 이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눈으로 뵈옵니다. 제가 어리석은 말을 한 것을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 하신다.

“이제 제가 알았습니다. 제가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고 해도 일어나 따라 가겠습니다.” 이것이 순종이다.

다. 결어

(1) 여러분의 신앙은 흠을 제거하고 자책하고 회개하는 데 묶이는 바람에 오늘을 살지 못하고 내일을 살 용기를 갖지 않고 원망과 자책 속에서 오그라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되는 믿음의 행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라는 증거가 있다. 부활이라는 약속이 있다. 그러니 나는 살아내겠다, 라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의 격려를 받지 충분히 받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든지 양보절이 앞에 온다.

“ 내 신앙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살아내고, 당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요 거기에 영광과 존귀가 담길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 인생을 살아야겠고 격려해야겠다. 서로 돌아보는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는 신앙 현실을 살아 이 시대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감사가 있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좋은 시들을 찾으시고 종종 설교에 인용 하실까? 매우 궁금하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 것은 잘 안다. 그리고 책을 추천하시기 위해서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신다. 그런데 시는 다른 문제다. 시집을 읽으신다고 가정해도, 좋은 시를 골라서 컴퓨터에 넣어 놓고 설교 때 뽑아서 쓰시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다. (목사님은 컴퓨터를 못하신다, 핸드폰도 최근에 와서 사용법을 제대로 익히신 것 같다.)

(2) 그런데 그 시들은 참으로 설교와 잘 어울린다. 교인들 모두의 얼굴에는 그렇다는 동의가 있다. 신앙이 자라려고 하면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잘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는데, 그 중 역시 첫째는 문학인가 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