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8) (히4:14~5:11)

2018. 10. 14(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나는 유진 피터슨을 잘 모른다. 그가 쓴 메시지 성경은 다 읽어 보았고 그의 책 중 “한 길 가는 순례자” 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정도를 읽어 보았다.

(2) 목사님은 9월 추천도서로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이라는 설교 집을 추천해 주셨다. 그 한줄 평이 대단했다. “이 책만큼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까워서 아껴 읽는 책입니다.” 여태껏 하셨던 책에 대한 칭찬 중 최고의 칭찬 이었다. 그리고 10월까지 추천을 한 달 연장하셨다.

죄송하지만 처음 읽을 때는 페이지를 그렇게 까지는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읽을수록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았다. 야, 이 목사님이 이런 설교자였어? 그는 자기 교인들을 대단히 대접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알아듣는가 하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설교자가 교인들을 대접하고, 교인들이 설교자를 대접하는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남포교회의 설교는 어떤가? 나는 답이 있다. 문자 주시기 바란다.

(3) 물총새는 영어로 kingfisher이고 “물총새에 불이 붙듯”은 “as kingfishers catch fire”이다. 물총새가 물을 차고 날아갈 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시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인의 이름은 Gerard Manley Hopkins 이다.)

2. 본론

가. 서론

(1) 히브리서는 결국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 어떤 현실 속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난 속에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고난이 필요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오늘 등장하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신다.

순종을 배워야 하고 순종이 있어야 온전하게 된다고 한다. 출애굽사건을 지난 번에도 상기했는데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보내어 인도해 내신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은 다 하셨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나는 샘물 등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입국하는 것만은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 저들이 선택해야했고 순종해야 했다. 쉬워 보이는데 왜 못했을까 라고 우리는 생각 하지만 그것은 더 나은 길을 가는 문제보다 크게, 더 나은 것을 알아야 되고 항복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

우리 인생에서도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아는 데에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것과 같다.

(2)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등장은, 그가 구원을 이루실 때에도 어떤 선포, 어떤 기적에 의한 순간적인 일로 우리에게 결과물을 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걸려서 당신이 걸어온 작품으로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에게 준 구원도 그 얻은바 구원이 목적하는 내용을 우리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구원은 이제 시작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나. 본론

(1) (히5:8~9) 순종은 쉽게 선택하는 정도는 아니다. 선택보다 더 큰 내용이 있다. 순종을 이해하려면 고난을 이해해야 한다. 고난은 단순히 고통이 아니다.

(마16:21~24) 예수님이 죽는다고 선언하신 것은 굉장히 충격적이고 모순적인 것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 바닷물을 잠잠케 하고, 모든 병마를 물리친 하나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베드로가 당연히 우리의 성정을 대변해서, 그런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제가 주님을 보호하겠습니다, 라고 한 것이다. 사실은 의리 있고 책임 있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를 꾸짖으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고 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인류에게 목적하시는 일을 타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타협하게 하고 쉽게 만들려고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문둥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하는 것들이 구원이 아니다. 내 길을 이해하고 나를 따르려면, 아니 내가 하려는 일은, 너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무엇인가? 자기의 소원, 자기의 기대에 제한되는 문제이다. 여러분이 늘 하는 기도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양보해서 기도제목을 내어 놓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제 아들을 대학에 합격시켜 주시면 저는 평생 립스틱도 안 바르고 파마도 안하고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으시면 이렇게 답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그 조그만 것을 줄려고 너희를 만든 줄 아느냐? 내가 내 아들을 보내고 그 모욕을 당하고 그렇게 죽게 했단 말이냐? 너는 내가 너희를 구하기 위해 쓴 방법만 보아도 도대체 이게 뭐 길래 하나님이 이렇게 긴 역사와 많은 비극 속에 그 아들을 보내어 그 짐을 지게 하시고 그 수모와 오해를 받게 하셨는가? 하는 이런 생각이 안 든단 말이냐? 한번 생각해 봐라 이 질문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을 만들려고 하신다. 나 스스로를 넘어서야한다. 무아지경에 간다거나, 객관적이고 정의롭고 사심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영광의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는 존재로,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존재로 되는 것,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거짓말 안하고, 욕심 안내고 하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요구이다. 십자가는 여러분 각자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명분이고 구호이고 고백이고가 아니라 존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손바닥에 못이 박히신 것처럼.

예수는 인간이 되신다. 죽음 아래의 수치와 고통을 몸에 지니신다. 부활 하시고도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으나 인간인 것을 영원히 가지기로 하셨다. 굉장하지 않은가? 창 자국과 못 자국이 예수님에게 무슨 흠이 될 리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패로도 손해 보지 않는다고 하신다. 나를 따르려면, 이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권능을 보았다. 바로가 깨지는 것을 보았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길에 하나님이 하시려는 모든 것을 주신다.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신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다. 그러나 마음만은 안 잡아주신다. 스스로 해 보라고 하신다. 틀리면 꾸중을 들어야 하고 민망하다. 이건 아닌데, 이런 경험을 가지게 하신다. 이런 기회를 가지게 하신다.

(2) (갈5:16~23)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왜 대조시키는가? 여러분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고 여러분이 만족해서 자존심을 지켰을 때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나이가 들면 두 부류로 나뉜다. 원망하는 자와 감사하는 자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나이 들어 죽음 앞에 서서 감사할 수가 없다. 세상에도 감사하는 자가 있다구요? 그들은 체념하는 것이다. 어차피 다 죽을 거, 그만하면 됐다. 신자가 감사하는 것은 나이가 들고 죽음 앞에 서서 하나님이 날 무엇으로 만들었는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인격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나열해 놓으니까 이것이 하나의 명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속성들이 몸에 배인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최선이고,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랑은 상대적이고 경쟁에 불과한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 안에서 만들어 지는 성령의 열매들은 값진 것이다. 모든 걸 잃어 버려도 이것만은 뺏길 수 없다.

그런데 사탄은 언제나 여기서 타협을 하라고 한다. 위협하기도 하고 미혹하기도 한다. 그것이 고난이다. 뻔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지 말라고 하시고, 소원을 가지고 순종하려고 하면 고난이 덮친다. 내가 잘하려고 할 때가 더 어렵다. 쉬운 길로 가보면 결과가 예수 믿는 사람처럼 나오지 않는다. 고난은 여기에 내내 붙잡혀 있는 것이다. 순종을 이루려면 이 둘 사이에서 어느 것이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항복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종이 일어나지 않는다.

순종은 안목이고 분별이고 그의 실력이다. 순종을 했더니 보상으로 가나안을 갈 수 있었다거나 보상으로 행복이 왔다거나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

무엇을 순종하는가? 애굽에서 꺼내서 가나안에 들여보내려고 내가 너희에게 구원을 주었다. 그런데 가나안은 거기에 들어갈 실력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 항복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인데 안식이란 예수 안에서 약속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복하고, 선택하고, 기뻐하는 것, 그것이 순종이다.

너희가 분명히 변명을 할 것이다. 이럴 바에는 왜 구원은 주었을까? 애굽에 있었던 때가 더 낫지 않았는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들려는 지를 모르니까 돌아가자는 말이 자꾸 나오는 것이다.

히브리서 6장에 가면 한번 빛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후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가 나온다. 이것은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다. 너희를 저기에 보내려고 꺼내었는데 돌아온다는 것이 말이 되냐, 돌아올 수 없다, 라는 뜻이다.

여러분의 소원을 모두 말해보라, 여러분의 소원은 결국 안심 밖에는 없다. 그만하자는 것이다. 하나님 뭘 더 원하십니까? 할거 다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더 가자고 하신다. 더 가려면 이해되지 않는 고난이 있다. 왜 이 길을 가야 합니까? 왜 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나에게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나는 더 바란다. 내가 너희를 구원할 때 내 아들을 보내서 뭘 했는지 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십자가이다.

아니 우리를 구원하는데 무슨 그런 방법까지 쓰셨습니까?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 많은 기적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들 손에 의해서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야만 했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신파조로만 이해하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진정성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겪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우리를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나는 무엇을 대면해야 되는가?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은데. 그러나 죽을 것 같은 그 실패가 우리를 만들어 간다. 어떤 일을 잘하는 건 좋다. 그러나 잘하면 잘 못하는 것만큼 우리를 만들어 가지는 못한다.

이것이 신비다. 그러면 잘못해야 잘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잘한 건 명예로 남는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여러분이 심판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피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 괜히 피 흘려 죽으신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고 영혼에 진정한 능력이 된다. 우리의 고난은 이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성경의 말씀은 겁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 같으므로, 그러니 나를 속일 수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 너의 신앙을 만들어라.

(3) (히4:12~13) 14절이 “그러므로”로 시작되는 것에 주목하자. 14절 앞에서는 하나님은 속지 않는다, 너희는 피할 수 없다, 이 길을 가야 한다, 라고 얘기 하는데 이건 겁을 주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겁을 주려고 했다면 말 안 들으면 너희는 다 죽는다,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므로”로 시작하면서 14절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을 거론하고 있다.

이 길은 하나님이 포기하시지 않는다. 중단할 수 없다. 가야한다. 딴 길은 없다. 네 인생을 살아라.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보좌 우편에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넌 못 죽는다. 넌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잘못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 보이는 자리, 거기서 기도하라.

“하나님 맞습니다. 이걸로 끝날 리 없습니다. 하나님 이 정도로 끝낼 것이었으면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이란 인간을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항복하고 기뻐하고 자랑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작정 하셨다는 소식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이기고 통과해서 십자가를 지듯이 우리가, 저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롬8:29~30) 본문의 일이 시간상으로는 안 일어났지만 운명적으로는 이미 일어나 확정되었다. 그러니 여러분은 도망갈 수 없다. 도망가면 나중에 와서 밀린 숙제를 다 해야 한다.

(롬8:31~34)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은혜가 다 이기니까 안심하고 살아도 된다에 써먹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고자 하는 것을 만들기 까지는 하나님이 그 일을 쉬지도 않을 것이요, 우리를 가만 놔두지도 않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감사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의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가, 구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고 계시는가, 내 실력은 무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 실력은 어디에 와 있는가?

있는 듯 마는 듯. 특별한 위인이 될 마음은 없사오니 요 정도에서 자존심 지키고 비명 지를 일 없는 수준에서,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그 정도를 위해 십자가를 세운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여러분의 모든 실패와 당장의 현실이 여러분이 얼마나 못났는가를 지적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뒤집어야 한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될 때까지 하실 것이다.

시편을 보라. 다윗의 모든 기도는 다 비명이다. 몰랐을 때 지은 죄에 대한 비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난 다음에도 비명이 있다. 왜 그런가? 죄를 씻고 잘못을 지워버리는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 못났던 데서부터 잘나고 위대하고 거룩해져야 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자리까지 목이 졸린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지금 하시는 일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라. 적어도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이쯤 해야 돼, 하는 것을 도덕적 명분으로 나열하지 말라. 여러분의 실력을 보라. 세상의 위협과 유혹과 자신이 져야하는 짐과 억울함에 대하여 얼만 큼의 실력이 있는가? 거기서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 같은 사랑과 헌신과 섬김과 기다림과 용서를 할 수 있는가?

한 번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도해야 한다. 어쩌다 한번이라도 해야 된다. 그리고 결국은 그 실력으로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완성될 때까지 여러분은 죽을 수도 없다. 변명하거나 도망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훌륭해지고 놀라워진다. 그리고 먼 훗날 영광의 보좌 앞에서 찬송과 감사와 면류관을 드리게 된다.

3. 에필로그

(1) 목사님께서 이번 설교에서, 순종은 안목이고 분별이고 그의 실력이다, 라고 정의 내리셨다. 그리고 설명하시기를 순종이란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항복하고, 선택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순종이 복잡해졌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2) 순종은 물론 항복하니까 하는 거다. 그런데 순종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안목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신다. 무슨 안목일까? 나는 지금 어디에서 있는데 지금 누구에게 순종하는 것인가를 알고 하라는 말씀 아닐까?

(3)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가자고 하신다. 물론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이럴 때 나에게 어떤 안목이 필요할까? 하나님께서는 답을 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할 때 내 아들을 보내서 뭘 했는지 봐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