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3) (히2:5~9)

2018. 8. 5(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다시 보는 히브리서(2) 의 정리가 늦어져 8/8(수)에 정리된 리포트를 박 목사님께 드렸다. 직접 못 드리고 교회 사무실로 보내서 직원이 전달해 드렸다. 그리고 목사님을 8/9(목) 수련회장에서 뵈었다. 뜻밖에 칭찬을 하셨다. “아주 잘 정리 했어 우리는 글로 하면 그렇게는 못하겠어.”

당연히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 속담에 “용장 밑에 약졸 없다.” 라는 속담이 있다. 물론 리더십이 강조된 말이지만 나 같은 약졸들에게 힘이 되는 속담이다. 위 속담을 그대로 인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좋은 본문 설교가 없이 어찌 좋은 정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2) 목사님께서는 부인하실지 모르지만, 수련회 첫날(8/9) 오후 특강 시에 목사님께서 약 1시간30분 정도 특강을 하셨는데 처음 1부 강의 50분 동안 좀 엉기셨다. (이 부분 목사님 생각엔 부인하실 수도 있겠다.)

목사님은 그 동안 Text와 Context에 대하여 미진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제 정리가 되어서 말씀하신다고 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나중에 별도의 리포트를 드리겠다. 그러나 이 정리가 오히려 여러 사람에게 혼란을 주었다.

잠시 쉬고 2부 특강을 한 30분 정도 하셨다. 위의 주제는 조금만 언급하신 뒤 강의는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목사님은 다시 날라 다니셨다. (독자들께서 이 표현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우리 믿음 적은 집사들끼리 얘기할 때 은혜 받은 설교나 강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3) 와, 어떻게 저러실 수가 있지? (당신은 경험을 못해 본 얼굴 표정이다.) 목사님 설교에 대한 내 경험은 이렇다.

설교가 밋밋하게 시작해서 그저 그렇게 끝났던 날.
잘 모르게 시작해서 알아듣고 은혜가 넘쳤던 날.
처음부터 은혜가 되기 시작하여 은혜의 빗속에서 끝났던 날.
(다만, 알아듣게 시작해서 못 알아듣게 끝난 날은 없다.)

이번 경우는 꼭 찾자면 두 번째 경우인데, 나중에 리포트를 보시고 동의 하면 회신 메일로 저에게 답을 하시면 된다.

박 목사님 설교에 대한 필자의 한 줄 평.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나는 하나님 말씀 전하기”

2. 내 용

가. 서론

(1) 히브리서 전체는 당시의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편지다. 히브리서는 너희 힘들겠다는 말로 위로하지 않는다. 너희가 겪는 고난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고난은 예수와 관계되는, 예수로 인한 구원이라고 이해하라고 한다. 그 구원이 너무 크고 그 큰 데로 가기 위해서는 너희가 고난이라고 여기는 이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한다. 고난을 쉽게 해 주거나 해결해 주지 않는다.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2) 우선 구원의 크기는 천사를 보내거나, 모세를 보내거나 하셨던 하나님의 이전 역사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성자 하나님이 직접 오셨다. 그리고 직접 오신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십자가를 지시고 그것으로 구원을 만드신다. 그러니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기억하고 구원을 이루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과 그 길이 죽음도 불사한 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여 더욱 큰 것임을 생각하라, 라고 한다.

(3) 구원이 크다는 것은 당연히 그 구원의 대상이 어떤 운명과 가치를 지녔는가? 하는 것과 연결된다. 오늘 본문은 시작하기를,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에게 복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한다. 즉 천사들이 하나님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하나님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나. 후계자라는 말이 지닌 의미

(1) 하나님의 통치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위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구원이 지위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구원이 다만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간다, 행복하게 산다, 눈물이 없다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본문 6절을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 시나이까 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놀랍다. 이렇게 크게 나를 대접하시다니, 내가 그렇게 큰 존재인가 하는 충격에 빠질만한 약속이다.

인간이란 창조와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예의바르고 똑똑하고 남에게 시비 거리를 주지 않는 도덕성이나 유용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건 놀라운 일이다. 놀랍기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 부분은 뜬 구름 잡는 것 같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2) 오늘 본문이 인용한 이 시편 8:4의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른 것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욥기 7장이다. (욥7:17~21) 이 내용은 여러분이 한 번씩 다 해본 것 아닌가? 철이 없을 때, 누가 낳아 달랬어? 나 집 나갈 거야, 찾지 마, 라고 했던 말이다. 안 해보신 얼굴을 한다. 혹시 여러분의 자녀는 안 그러는가? 이게 바로 우리가 하는 얘기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 않고 살게 해 주십시오 이다. 이 때 생각은 고민이나 고통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한다. 고통 없이 살게 해 주십시오. 나는 그냥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위가 되기를 원합니다.

유치환 시인의 바위라는 시가 있다.

“두드려도 소리하지 않고 깨져도 침묵하는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물론 이것은 문학적으로 다른 내용을 표현한 것이지만 우리가 원망할 때보면 우리 모두는, 왜 저를 인간으로 만드셨어요? 왜 생각은 하게 하셨어요? 이 일은 무엇이란 말이에요? 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고 늘 경험하는 일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놀란 나머지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겁하게 우리라는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3)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가장 적극적인 약속으로 구원을 가르친다. 너희는 신과 방불한 존재이다. 너희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서 조금은 차이를 나타내는 조금이 아니다. 거의 같은, 별 차이가 없는 이라는 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지위와 신분에서 그렇다. 존재론적으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같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목적을 우리에 대해서 가지셨다. 이것이 그렇게 굉장한 것이라는 건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그 아들이 우리를 직접 찾아왔고 그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아들이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을 감수한다는 것에서 확인한다.

다. 성경의 가르침
(1) (롬8:15~17) 이 말씀에서 우리는 고난이 따라오는 것이 문제이지 영광이나 사랑에 대해서는 모두가 환영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공포가 없는 것이다. 부모는 때려도 죽으라고 때리지 않는다. 욕을 해도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얘기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공포가 들어오지 않는다. 진정성과 공포는 다른 것이다. 무게가 있는 것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성을 삭발이나 혈서 쓰기가 있어야 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진정성이 공포인 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진정성을 이야기 하면 화를 낸다. 또는 진정성을 이야기할 때 마치 자폭을 염두에 둔 사람처럼 보인다.

(2) 저의 음식에 대한 불만은 냉면에 있다. 냉면은 육수가 좋아야 하는데 그 실력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종종 비빔냉면을 주문하는데 우리 주변의 비빔냉면은 매우면 그만이다. 맵기 때문에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고 땀만 흘리는 것인데 잘 먹었다는 기분은 든다. 우리의 진정성이 이와 같다. 내용은 없고 감사도 없고 항복도 없고 무서운 것만 있다. 그러면서도 무서우니까 계속해서 안심을 구하려고 찾아 헤맨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단호히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그런 공포를 사랑으로 제거한 것이고, 그런 공포를 사랑이 삼켜 버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라는 말들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라고 히브리서는 권면한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가면 성경은 심지어 이렇게 까지 말한다. (엡1:17~23) 부모와 자식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내 몸이다, 라고 얘기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니 머리와 몸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자의 충만 이니라, 라고 한다.

하나님의 충만은 우리의 충만으로 만족하고 우리의 충만으로만 완성이 된다, 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홀로 충만하시거나 홀로 만족하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건 자식을 키워 보면 모두 알 수 있지 않은가? 자식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손해라도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부모다.

성경이 그렇게 얘기하는 데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우리 믿음은 늘 아슬아슬하다. 하나님은 안심을 주시지 않는다. 왜 일까? 우리를 바보로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이 온다.

(3)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승리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아 하늘 보좌 위에 앉았으나, 세상이 신자들에게 항복하지 않는 현실을 살고 있다. 왜 그런가?

예수의 승리가 지닌 의미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승리하셔서 인류 모두의 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도매금으로 묶어 가시지 않고 이 승리가 각각의 경우와, 각각의 존재와 내용과 승리가 되도록 하셨다. 이 일을 고난이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어렵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라는 말부터가 어렵다. 고난 속에서는 외적인 불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불만도 그만큼 있다. 자책, 후회, 연민, 원망 같은 것들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쓰신다. 왜 쓰시는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를 하나 찾았다.

함 민 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이해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건 현실이다. 섬은 물 때문에 육지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아무도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모두가 갈 수 있는 곳이다. 구별하자고 만든 울타리가 모두가 드나드는 길이 된 것이다. 이런 걸 보고 배울 수 있다면 대단한 신앙인이다.

성경이 하는 얘기가 위 시와 같다.

죽음은 끝이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며 가치의 실패이며 소망과의 단절이다.
(물이 육지와 섬을 단절시킨 것과 같다.)

죽음이 가장 낮다.
죽음은 모두에게 길이다.
(육지에 있는 길보다 더 많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음에 들어가 모든 사람에게 길을 여시고 죽음을 영광과 부활의 길로 만드셨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겪는 모든 고난과 고통은 사실은 세상이 죽음으로 여러분을 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말한다.
너는 쓸데없어.
너는 희망이 없어. 그래봐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세상이 여러분을 이렇게 짓누른다는 사실이 바로 여러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문을 달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지만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그 문을 열고 나가는 시작이 된다.

인생은 뭐야?
나는 누구야?

하나님이 대답 하신다.
나는 네 아버지다.

고아와 자녀는 근거가 다르다. 소망이 다르고 자신감이 다르다. 이런 내용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껏 약속을 한다.

(롬8:1~2) 성경은 어떤 고통 속에 있든 간에 더 크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고 힘써 강조한다. 위협과 공포와 절망이 쳐들어오지만 그것들이 승리하지 못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너는 생각하게 되고, 각성하게 되고, 더 크고 유익해 질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긴다, 라고 말씀하신 건 바로 이 뜻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라. 결 어

(1) (롬8:26) 성경은 신이 그 경배자들을 위해 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신은 없다. 우리는 다 안다. 부모이면 다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빈다. 부모가 고함만 지르는가? 자식에게 빌지 않는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도 이와 같이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부르신다. 사랑을 받고 혜택을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섬기고 사랑하는 부모의 자리까지 부르신다.

(롬8:38) 사랑이란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는 정열, 조건 없는 의지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의 내용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영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랑하고 계신다. 내 자식이다. 봐라.

(2) 하나님은 영광받기 위해 우리를 무릎 꿇리거나 써먹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를 영광되게 하신다. 이를 위해 기꺼이 우리에게 비시고 우리 손에 죽으셨다. 이것을 제대로 안다면 어떻게 방심하겠는가? 또한 사소한 것에 질 수도 없다. 이 위대함을 살아가는 귀한 인생이 되시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목사님은 이번 설교에서 두 편의 시를 제공하셨다. 한편은 함민복의 섬이고 다른 한편은 박영선의 죽음 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유치환 선생을 좋아하지만 말이다.)

위에서 썼듯이 이 두 편의 시는 절묘하게 댓구를 이루며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이끌고 간다.

단절되었던 섬이 모두에게 길이 되듯이 단절되었던 죽음이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된 것이다.

(2) 구태여 독자들에게 이 얼마나 감탄할 일인가 하고 말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설교를 이보다 더 잘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다면 단 한가지뿐이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목사님께 내리시면 가능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