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히브리서(1) (히1:1~9)

2018. 7. 8(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대망의 히브리서가 시작되었다. 성경이 어디가 더 좋고 어디가 덜 좋은 부분이 있을 수 없겠지만 신약성경 후반부에서 특별히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를 좋아한다. 히브리서는 요절이 엄청 많다. 예를 들면 (히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그러나 히브리서의 중요성은 히브리서가 구원에 대해 명백하게 써 놓았다는 것이다. (히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런 구절은 이단들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이단은 우리가 끝없이 죄를 회개하고 사함 받지 못하면 구원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이 구절을 말하면 얼굴이 빨개지거나 다른 뜻이라고 한다.

목사님께서는 30대에 이 내용을 명쾌히 정리하시고 용어도 정리하셨다.
우리가 처음에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신분의 구원이라 하시고 구원 후 성화 과정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수준의 구원이라고 하셨다.

명쾌하지 않은가? 미안하다. 아니라면 당신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3) 내가 처음 남포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에도 히브리서를 하고 계셨다. (1996년의 일이다.) (히6:4~6)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흔히 얘기되는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이다.

목사님은, 이건 실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저자가 독자를 경고하거나 교육적인 목적으로 한 말이라고 간단히 잘라 말하셨다.

(4) 예배가 끝나고 초면인 박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지금도 얼굴이 기억나는 장로님들과 이대원 목사님도 계셨다. 내용을 말씀드리고 달리 설교하는 목회자도 있다고 했더니 대답이 너무나도 간결했다.

“ 무식해서 그렇지요.”

2. 내용

가. 서론

(1)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신앙 공동체는 1세기 중엽쯤에 모였던 공동체 인데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에서는 유대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 즉 제사에 대한 이야기나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편지를 써야 했던 이유는 이들이 신앙의 큰 위협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2) 초대교회는 정치적 사회적 위협 아래 있었다. 로마제국은 여러 신을 섬겼고 황제를 신으로 받들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위협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뿐만 아니라 예수를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유대인에게는 신성모독이요 유일신을 거부하는 것이며 민족성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바울은 지중해 연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 때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과 유력인사들이 바울을 몹시 핍박했다. 히브리서가 쓰인 목적은 당시 곤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쓰여 졌다. 히브리서는 고난을 겪는 성도들에게 명분을 말하거나 의지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답을 제시하고 있다.

고린도 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고 심지어는 인신공격을 하는 자들에 대해 그들의 질문에 답을 직접 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 그들의 질문과 오해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설명하는 식으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이해를 보여줌으로써 답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3)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신앙고백에 대한 주인공인 예수에 대한 이해를 히브리서에서 해 나아갈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이 공허한 추상명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는 예수라는 대상에 그 모든 열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거기에 초점을 맞춘 뒤 예수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음이라는 행위를 미화시키거나 명분화 시키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약속에 관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나. 예수는 누구인가?

(1) 히브리서는 예수가 천사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왜 천사가 예수를 설명하는 일에 등장을 하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현실적으로는 천사에게 더 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천사의 무엇을 기대하는가? 천사의 초월성과 도덕성이다. 천사의 도덕성은 당연하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이니까 당연히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초월성은 무엇일까? 이것은 신과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초월성이 아니다. 우리는 천사가 진흙탕에 발 담구고 있지 않는 존재로서의 초월성이 있다고 믿고 그 초월성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쉽게 한다. 천사는 걱정도 없겠다. 자식도 없겠다. 일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것은 믿는 우리가 신앙에 대해 거는 어떤 기대감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히브리서는 여기에 예수를 대비시킴으로써 기독교가 우리의 기대와 상상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을 얘기하려고 한다.

(2) 궁극적으로 예수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고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설명과 우리에 대한 뜻을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져서 알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념을 극복하게 해준다. 좋은 시를 하나 소개하겠다. 박목월 시인의 장맛이라는 시다.

어둑한 얼굴로 어른들은 일만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어린 것들은 자라지만
종일 햇볕 바른 양지쪽에 장독대만 환했다.

진정 즐거운 것도 없는 구질구질한 살림
진정 고무신짝 끌며 지루한 하루하루를
어린 것들은 보내지만
종일 장독대만 환했다.

누구는 재미가 나서 사는 건가
누구는 낙을 바라고 사는 건가
살다 보니 사는 거지 그렁저렁 사는 거지

그런대도 해마다 장맛은 꿀보다 달다.
장맛이 왜 좋을까, 누가 알건데.
그렁그렁 사는 대로 살맛도 씀씀하고
그렁저렁 자라는 대로 아이들도 쓸모 있고
종일 햇볕 바른 장독대에 장맛은 꿀보다 달다.
이 시를 읽으면 여러분 마음이 공감이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여러분의 현실과 같기 때문이다. 공감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누구는 살고 싶어 사나, 살다보니 사는 거지 이 부분에 우리 모두는 공감한다.

박목월 시인은 이렇게 기대할 것 없고 상상할 것 없는 너무나 작고 감추인 현실 속에 우리가 있지만 환한 장독대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위로를 받는다고 설득한다. 이 시가 우리의 공감을 끌어내는 기본적인 배경은 체념이다. 시인은 장독대를 그렸지만 그 배경은 사는 것에 낙이 없는 우리의 삶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체념이다. 그래도 우리는 꿀맛보다 단 장맛 때문에 잠시 위로를 받으며 우리의 시간을 지나갈 수 있다.

(3) 우리는 기독교인임에도 이러한 체념에 익숙하다. 그냥 죽어서 천국가면 되겠지, 아휴 저것들도 어떻게 되겠지, 라는 체념 속에서 산다. 이 체념은 이 시를 빨리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문제에 부닥쳤을 때 이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살이 전체에 대한 어떤 가치, 나의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떤 명예를 확인해야만 하고, 그때에야 우리가 신자라는 이름으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내용을 그렇다고 인정하신다. 인정하셔서 하신 일이 바로 성육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곳에 오셨으나 오히려 역사와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버리셨다.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에게 잡혀 채찍을 맞고 수난을 당했으며 배반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이 죽음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어느 자리에서도 부족할 것 없다는 훌륭한 증언이 되고 있다.

(4) 여러분에게는 여러분만이 알고 있는 마음 속 깊은 상처가 있다. 또 불만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오히려 일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다. 믿음이란 이러한 도약이다. 그렇다, 내가 예수님에게서 봤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산을 넘게 하고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위대한 신비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신비가 우리의 자책하고 자조하고 타협하고 돌아가는 인생을 세워 일으킨다. 이것이야 말로 성경의 도전이다. 여러분의 인생을 타협하며 살아가는 건 여러분에게 손해이다. 주어진 하루에서 하루만큼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5) 예수는 누구인가를 제일 잘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요1:1~3이다. (요1:1~3) 모든 인간은 예수 안에서 지어진다. 이 말은 누가 누구의 자식이다 라는 말과 같으며 후손은 선조의 유전자를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다. 요1:14을 보면 예수의 영광과 충만은 아버지의 영광인데 예수가 육체로 오셔서 우리도 그러한 영광과 충만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고 증언하신다.

이때 인간은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광은 이런 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실존으로 증언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능력을 가지시고도 이 모든 것을 감수하셨다. 이것은 양보가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드라마의 한 장면에 불과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 그러나 이 비바람이 드라마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며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극적 효과를 높일 뿐이다. 요3:16을 다 같이 암송해 보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은 창조를 하실 때와 똑같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선언을 하고 계실 뿐이다. 빛이 있으라 하셨던 것과 같다. 내가 내 아들을 보내노라. 내가 구원을 선포하노라.

이것은 우리의 반응이나 선택에 좌우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선언일 뿐이었다. 이 일은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았으며 어떤 것도 이 일을 제한하지 못했다.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 인가?

믿으면 자신의 인생이 명예로워진다. 안 믿으면 자신의 인생은 헛된 것이 된다.

다시 묻고 싶을 것 이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지옥에 갑니까?

그건 모르겠다, (필자주: 박목사님께서는 정말 모른다고 하신 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그걸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문제에 여러분의 관심이 훨씬 더 많겠지만, 하나님은 구원을 하시자는 분이다. 그러니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라는 말로 자기 증명은 하지 말라. 너는 믿는다는데 무엇이 우리와 다른 거야 라는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하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여 자기를 증명하려는 방법을 율법적 판단이라고 한다. 이러한 판단에는 적극적인 대안이 없게 마련이다.

다. 구원의 선포

(1) (롬3:19~24) 복음은 율법과는 다른 것이다. 율법이 잘 한 일과 잘못한 일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했다면 예수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편에 있는 영광으로 가는 문제인 것이다. 결국 죄란 옳고 그름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영광의 문제이다. 죄란 영광에 못 미치는 것이며 영광을 비껴가는 것이요 영광이 왜곡되는 것이다.
율법은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해서 우리를 영광으로 밀어야 하지만 율법에는 이런 영광자체를 위한 적극적인 기능이 없다. 인류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비로소 영광을 보게 되었고 영광이 허락이 되었고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영광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목적을 두셨고 예수를 통해 이루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간다. 보통 공포의 반대말은 평화이거나 안심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가 없는 상태일 뿐이다. 우리에게 있어 공포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정직이 거짓말 안하는 것에 불과하면 안 된다. 정직은 가장 부정적인 데에서 나와서 영광으로 가는 방법이다. 좋은 말 하는 사람이 되는 것,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정직이다. 기쁨을 들어내는 것, 이것이 정직이다.

거짓말과 정직의 구분은 기독교에서 하는 것과 세상에서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님도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도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모두가 폭력을 휘두르는 자리에서 우리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롬12:14~20) 악을 감동시키거나 악을 감동시킬 생각을 하지 말고 너는 선한 역할을 하라. 악하고 무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과 달리 너는 선하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라.

이것은 명분도 강요도 아니다. 깨끗한 옷과 더러운 옷을 꺼내놓고 이 깨끗한 옷 입어라 라고 말하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명예이고 복이고 기쁨이다. 우리는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

(2) 롬12:21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20절에서는 그리하므로 내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설명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했다.
그들로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뭐야?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 폭력과 증오와 보복과 원망이 난무하는 비열한 세상에서 마치 한줄기 빛이 비취듯,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빛같이 우리는 다른 존재로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회개한다고 생각 하지 말라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예수가 다른 존재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듯이 우리도 다른 존재로 보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편들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신 구원의 능력으로, 그 손길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를 보내셨다. 그런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방법이 없다. 세상은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데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 하면 결국 우리의 기도는 원망에서 그치게 된다.

라. 결어

(1) (엡1:3~6) 이 구절을 외우시기 바란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요가 아니다. 방법론도 아니다. 위협도 아니다. 어떻게 확신하는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어찌 강요이겠는가?

우리 인생은 우리의 이웃 앞에서 그런 존재이다.
이 사람은 뭐야? 이 사람은 왜 이래?

(2) 그러나 이것이 보상일수는 없다. 예수를 죽인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항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영과 기쁨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자랑할 수 있는 일이 충만해 질 것이다.
4. 에필로그

(1) 우리가 박목월 시인을 모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분의 나그네라는 시가 너무 유명하여 다른 시로 갈 여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2) 나도 오늘 들은 장맛이라는 시는 처음 듣는다. 역시 좋다. 박목월 시인의 좋은 작품 중 하나에 “하관” 이라는 작품이 있다. 자기 친동생이 사망했을 때 의 애통함을 쓴 시이다.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 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중략)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들리는 세상.

(3) 이 시를 읽으면 정말 줄이 내 가슴에 달려 나도 관과 함께 달아 내려지는듯한 착각이 든다. 박목월 시인은 이 시에서 허무와 비통을 견디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슴에 통증이 되 살아나 시인은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랬던 시인이 오늘 소개된 장맛에서는 어느덧 인생을 편안히 관조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삶의 통증이 조금도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가슴에 전달되는가? 아니면 이제는 천천히 통증의 친구가 되어 가는가?
(4) 평생을 목사님을 괴롭혀왔던 불면증을 목사님은 언제나 털어 내실 수 있을까? 문득 문득 잠이 안와서 성경을 더 읽었다고 말씀은 하시지만 말이다. 이제는 잠을 못 자게 괴롭히는 그것들과 친구가 되어 가시는 걸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