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39) (왕상2:10~12)

2018. 5. 27(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목사님은 당구를 좋아하신다. 요즘에야 당구가 정식 스포츠 종목이 되었고 아시안 게임에도 포함이 되며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등 대우를 받고 있지만 1960년대~1970년대 까지 당구는 성인들의 오락이었다. 당연히 미성년자들 에게는 허용이 안 되었다. 목사님께서 당구에 어떻게 입문하셨는지 어떻게 고수가 되었는지 등에 대하여 가장 잘 아실 수 있는 분은 이대원 목사님이시다. 그러나 지금은 제주도에 계시니 자세히 물어보기 어렵다.

(2) 나는 목사님의 당구 입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떻게 고수가 되었는지는 조금 알고 있다. 목사님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당구를 같이 쳐 왔기 때문이다. 물론 내 실력이 목사님을 상대할 만한 수준에 있지는 않지만.

(3) 목사님의 당구는 한마디로 창조적인 당구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이나 길을 시작하시고 조금 지나면 마치 그 길이 교과서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기존의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당구를 그냥 시간 때우기로 여기지 않고 좀 더 잘 치게 좀 더 멋지게 갈 수 있는 길을 늘 찾으신다.

(4) 요즘도 그렇게 하시는가? 옛날 보다는 아니어도 요즘은 전설의 천재 선수로 명성을 누리던 4구(당구의 종류)에서 3구로 전환하셨기 때문에 최고수가 당연히 아니시다. 그래도 3구를 치는 방법에 있어서 여전히 천재적이고 아직도 전설이다.
2. 설교내용

가. 서론

(1) 다윗은 죽는다. 신선이 되지 않는다. 뒤를 이은 솔로몬은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률보다 더 철저한 기준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원한 왕권이 다윗의 실패를 통한 아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기독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말로 선포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과 그 결과들이 다윗의 순종과 기대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보이고 싶어 하신다.

(2) 구원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구원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가 4장에서 시편32편을 인용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한 것은 잘 잘못이라는 잣대를 하나님이 깨시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잘 잘못의 결과에 따른 보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있다는 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나. 본 론

(1) 다윗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저지른 사고에 대하여 벌을 받아 추락하고 망하는 것도 아닌, 다윗 스스로가 이유와 원인이 될 수 없는 결과의 대표자가 된다.

(마7:15~20)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열매에 있지 않다. 나무에 있다. 열매를 모으는 것, 다시 말해 업적을 쌓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열매를 생산할 수 있는 나무 자체,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요12:20~24) 예수님은 여기서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나무보다는 예수님이 맺는 열매를 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희망에 답을 하신다. 나의 열매, 즉 내가 메시아 인 것을 보이겠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열매는 권력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력에 진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가 메시아인 증거이다. 메시아에게 달리는 열매는 죽음인데 이 죽음은 생명을 만드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2) (마13:10~16)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자. 예수님은 여기서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제자들은 선생님 왜 이런 정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옥토가 되자, 많은 열매를 맺자고 다짐한다.

예수님은 이사야 6:9~10에서 이사야가 했던 예언이 이 비유에서 성취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말씀을 사람들은 못 깨닫게 되어 있다. 그에 비하여 너희의 복은 내가 왔기 때문에 나를 직접 보게 된 것이다. 나는 보게 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듣게 하러 오지도 않았다. 설명하러 오지도 않았다. 너희가 깨닫지 못하는 그것을 나는 이루려고 왔다. 이것이 바로 죽는 방법으로 나타난 부활이고 구원이다.

따라서 씨 뿌리는 비유는 좀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밭에 찾아와 심겨진 씨앗이다. 이 씨앗은 밭이 만든 것도 아니고 밭이 키운 것도 아니다. 씨앗은 마치 죽음에 삼켜지듯 땅 속에 심겨진 것이다. 그러나 그 씨앗은 스스로 일어나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열매를 맺은 나무는 결국 열매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는 밭은 꽃밭이라 불린다. 결국 밭의 이름은 꽃의 이름과 같이 불리게 된다. 꽃과 밭은 분리되지 않는다. 커피 한잔을 건네 줄 때 우리는 커피가 담긴 컵을 주면서 커피 한잔 하시지요, 라고 말한다. 컵 안에 내용물을 담아 그 컵을 내용물의 이름으로 만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인 것이다.

우리라는 잡초 밭에 예수가 오셔서, 죽음 밖에 없는 밭에 스스로 들어와 죽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내용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결국 씨 뿌리는 비유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밭에 주께서 들어와 열매가 되심으로써 그 이름으로 우리를 불리게 했다는 비유인 것이다.

(3) 기독교에서는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신앙을 논할 수 없다. 다윗이 가졌던 종교성과 종교적 덕목이 밧세바 사건으로 그 가치가 무효화 된 후에 오히려 그가 저지른 잘못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실하며 인간이 그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없고 방해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하나님을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은 계속된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나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자랑이다, 라고 하시는 하나님 등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변함없이 일관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바가지가 깨져도 우리의 접시가 작아도 그 문제를 넘어 설 수 있다. 그리고 그 용기 안에 담기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4) (고후 12:7~10)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바울아,너 전지전능할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성과 도덕성을 우리가 받아야 할 보상과 연계하기 때문에 늘 공포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 기도를 제일 많이 한다. 적극적인 신앙행위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부정적인 신앙행위 밖에는 자신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일단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게 아니라 잘 해야 한다.

어떻게 잘 해야 하는가? 여러분의 실력만큼 잘 하면 된다.

여러분의 일상, 현장, 현실에서 세상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한번 웃고 한번 참아야 한다. 한번 눌러야 한다. 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라. 매일 만나는 여러분의 가족, 이웃들 사이에서 신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지금 못 볼꼴을 보고 있지만 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심겨지겠다. 그런 자세로 하루를 살아야 한다.

(요21:15~22) 여기도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베드로야, 너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주님 제가 진심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어떤 진심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진심인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답하신다.

그거면 됐다. 네 실력만큼만 해라. 나머지는 내게 맡겨라.

너의 사역도 고난으로 가득하며 승승장구하지 않고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기가 막혀서 묻는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내가 할 일이다. 너는 네 일을 잘해라.,
하나님은 여러분 각각을 사랑하시고 각각을 통해 일하신다. 다른 사람과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보혈로, 사랑으로, 능력으로 준비하셔서 허락한 기회이다. 아무렇게나 일하라는 게 아니다. 우리의 조건, 한계, 막막함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려야 한다.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은 죽음이 있는 현장에서 피어나는 부활이며, 웃을 수 없는 곳에서 웃게 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게 하시며,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리게 하시며 보상이 없는 헌신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각각의 단어만이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와 인생은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우리의 하루는 창조이며, 기적이며, 부활이며, 순종이며, 때로는 잘난 척 이며, 사랑이며, 늠름함이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알아주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니 서로 눈을 마주치며 멋진 얼굴이 되어 가자. 그런 인생을 살아가자.

3. 에필로그

(1) 언제부턴가 목사님 설교에서 비록 키 워드는 아니지만 놓치면 아쉬운 것 중 하나가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 또는 재해석이다. 먼저 재해석을 보자. 목사님께서는 로마서 7장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에서 “나” 가 자연인 이라고 다시 보는 로마서를 할 때 말씀하셨다.

그러나 작년 여름 로마서7장 특강을 하실 때에는 이 “나”가 신앙인 이라고 생각한다고 정정하셨다. (그 이유는 특강을 들어보시면 안다.) 갑자기 저자가 불친절해졌다고 생각되시는가? 아니다. 로마서 특강(7장~8장)도 정리 했다. 곧 보내드리겠다.

(2) 이번 설교의 해석이다.

(고후12:7~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울아, 너 전지전능할 필요 없다.

(요21:15~22)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그러면 됐다. 네 실력만큼만 해라 나머지는 내게 맡겨라.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기가 막혀 묻는다.

눈치를 채셨겠지만 박목사님의 본문 해석은 어떠한 주석서보다도 더 날카롭다. (주석서에 대해 저자가 무식한 것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이 말이 무슨 뜻이지 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목사님의 해석을 듣게 되면 귀에 쏙 쏙 들어온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진다.

(3) 너무 진부한 비유이기는 하나 여전히 진리인 한 가지 비유가 있다. 우리는 공기 중에 산소가 늘 있어서 살고 있음에도 산소의 고마움을 잘 모른다는 비유 말이다. 산소 얘기니까 그렇지, 박목사님 얘기로 넘어오면 정말 심각해진다. 우리는 박목사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박목사님을 통해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른다. 정말 모르고 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