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38) (왕상1:28~31)

2018. 5. 13(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최근 나는 내가 같이 하고 있는 교회 모임의 단톡방(단체 카톡방 – 이 설명은 순전히 박목사님을 위한 것이다.)에 짧은 글을 올렸다.

“ 박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우리는 늘 견디어야 하고 좌절에서는 일어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박목사님께서도 힘들면 우시고 아직도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같지요. 힘들면 울고 더 힘들면 기도하면서 같이 가시지요, 언젠가 밝게 한번 웃는 날이 있겠지요.”

이 짧은 글을 쓰는데 눈물이 났다. 눈물이 흔하고 남자답지 못하며 눈물로 때우려고 한다고 야단치시는가? 사실이 그렇다.

(2)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이 언제 이렇게 울었겠는가? 요즘 우리가 공부하는 일이 있던 그때 아니었겠는가? 다윗을 왜 은혜의 대표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2 내 용

가. 서 론

(1) 다윗은 나이가 들고 정무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때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먼저 치고 나왔는데 이 세력에는 군대 장관 요압과 대제사장인 아비아달도 있었다. 나달이 묻는다. 아도니야를 왕으로 지명하셨습니까? 그렇지 않다. 누구를 왕으로 하시겠습니까? 밧세바를 불러라. 내가 솔로몬을 왕으로 지명하겠다. 솔로몬 쪽에는 나단 선지자와 대제사장 사독이 있었다.

(2) 밧세바의 아들이 왕권을 이어 간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밧세바와 의 사이에서 낳은 첫아들은 하나님이 죽이셨다. 그때 다윗은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애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듣지 않으셨다.

나. 본 론

(1) 우리는 다윗의 실패를 보면서 흠 없이 실수 없이 살자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다윗의 후반기 인생은 다윗이 잘하다가 실수하여 망신을 당했다는 정도의 문제를 벗어난다. 다윗이 후반기에서 어물어물 살다가 생을 끝냈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놓치는 것이다.

(2) (시23:1~6)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일으켜서 회개하고 용서받은 게 전부라면 이 시에서 보이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구절과는 맞지 않는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기름부음 받는 세 가지 경우는 왕, 선지자, 제사장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고급한 지위를 주셨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아니라고 한다. 다윗은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라고 한다. 이런 해석은 밧세바 때문에 다윗의 인생이 헛것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시편 23편은 아마도 다윗이 자신의 생애 막바지에 쓴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곤란하게 하셨다 거나 시험을 당했다 거나 용서를 받았다는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생애를 영광되게 뒤 돌아보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관점을 어떻게 받아 들이일 것인가? 이 둘을 묶을 수 있는 비유가 탕자의 비유다.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탕진하고 죽게 돼서야 돌아온다. 큰 아들은 이런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열었다는 것이 못마땅하다. 아버지는 말한다. 얘야, 작은 애는 잃었다가 찾지 않았느냐? 너는 항상 나와 있어서 내 지위와 권세를 나누고 있지 않느냐? 나갔다 돌아온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집에서 아버지의 자식으로 배우고 가업을 잇고 명예와 책임을 지는 것은 진정으로 훌륭한 일이다.

다윗의 생애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만 우리의 인생을 잘했다, 못했다 라고 판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절망과 체념 속에 찾아 오셔서 우리의 최선과 우리의 기대보다 큰 것을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며 이렇게 우리를 완성하고 채우신다는 것이 다윗의 생애를 통해 보여 주시는 일이다.

(3) 우리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원색적인 경우가 많다. 이사야를 할 때 3차적 세계관에 대해서 말했다. 1차적 세계관은 율법이었다. 여기서는 인과응보의 법칙이 적용된다. 2차적 세계관은 은혜이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3차적 세계관은 은혜를 받은 개인이 자유와 책임을 지는 세계관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필자 주: 이해를 돕기 위해 3차적 세계관에서 언급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는 은혜를 말한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신앙관으로 생각해 보자. 물론 이 신앙관은 개인적인 실존과 개성의 자리에서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1차 신앙관은 도덕과 규칙이다. 잘했다, 잘못했다의 신앙이다.

2차 신앙관은 실천과 헌신으로 보여주는 능력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쓸모 있기를 바라게 된다.

3차 신앙관은 위와 같은 신앙관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계까지 오게 하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격이다. 존재 자체의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엡1:3~6)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일을 하게 하려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하신다. 내가 기능적이고 헌신적인 존재에 그치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보자. 다윗이 훌륭한 사람으로 훌륭하게 생애를 마치도록 하실 것이었으면 밧세바 사건은 있어서는 안 되고 다윗은 승승장구 했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깨버리셨다. 이런 성경적인 설명은 많이 있다. 우리는 1, 2차 신앙관에 붙잡혀 있어서 이것을 잘 못 본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보내시고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는 경천동지할 사실에 붙잡혀서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 목적에 대하여는 생각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욥7:17~21) 욥기는 욥이 완전한 의인으로 시작한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은 사탄과 내기를 하신다. 처음에 욥은 굴하지 않는다. 다음 사탄이 욥의 몸에 손을 대자 욥은 원망을 하기 시작한다. 욥은 말한다. 저를 잊어 주십시오. 저도 죽어 버리겠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매일 하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대하는 식으로 대답하시지 않는다. 그러자 우리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서서히 잊기 시작한다. 하나님 탓이라고 원망을 하는 것이다.

다윗은 사고를 쳐서 고난을 당한다. 그러면 사고도 치지 않은 욥은 왜 고난을 당하는가?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다만 그 고난이 한 일은 있다. 그 고난은 욥이 알고 있는 완전함의 세계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최선의 세계에서 끌려올라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창조의 세계에 들어가게 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보았느냐? 그 터가 무엇인지를 보았느냐? 하마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았느냐? 내가 만들었단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너는 저것들 하고 다르다. 아들아 너는 아비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2분법을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한다. 안심, 만족, 형통이라는 이름으로 이대로 살게 놔 두십시오 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다. 이에 대하여 불만인가?

요셉을 보자. 요셉은 야곱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던 열 한번 째 아들이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다. 종으로 고생하다 무고를 당하여 감옥에 간다. 시편 105편은 이것을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기술하여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요셉이 믿음을 가지고 견디어 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요셉은 억울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이루시려는 일을 다 이루실 때까지 그는 벗어나거나 해결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총리가 되어 7년 흉년을 대비하여 7년 풍년 동안 양식을 비축하는 실력을 보인다. 세상을 구하고 자기 가족을 구한다.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을 구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분이 다윗에게 불평하고 있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이런 대화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요셉, 네가 먼저 형들을 죽였어야지. 생각 없이 살아서 팔려 나왔잖아 형들 밥에다 독을 타란 말이야.”

어떤가?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밧세바 사건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도 틀린 것이다.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노년에 다윗은 정신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매우 놀랐을 것이다. 다윗은 어떻게 할 바를 몰랐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기를 묶는다. 드디어 다윗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된 것이다. 죄의 용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와 나의 운명을 하나님 앞에 묻게 된다. 이것이 다윗이다.

밧세바 사건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는 다윗이 걸려 넘어져 만신창이가 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일은 우리 모든 신자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다만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나지 않고 매일 매일 부딪치는 현실 속에서 할 말 없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난 뭐야?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시나? 내 기도를 듣고 계실까? 내가 잘해도 칭찬이 없으시고 못해도 아무 일도 없다. 우리가 사고를 일부러 쳐봐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아니구나 하고 체념한다.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지도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는 1차, 2차의 신앙관을 거쳐 우리가 겪게 되는 2분법이나 우리가 가진 정성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지만 더 나아가게 하신다. 거기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깨고 들어오신다. 이것이 우리의 막막한 인생이 계속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적극적인 기도와 기대와 믿음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분별을 가져야 한다.

(딤전1:12~15) 바울은 자신이야 말로 자신이 맡은 일을 할 수 없는 가장 반대적인 조건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바울 보다는 나은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못난 자리에 바울과 다윗이 있는 셈이다. 여러분은 그에 비하면 안심할 수 있지 않는가?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고 스데반을 죽였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죽이시고 그 대신 바울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이해가 안가는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최고나 최선이라고 우기고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 갈 때 우리를 끌어 당겨서 그것을 못하게 하시고 너는 벌레가, 짐승이, 한갓 물건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십자가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선조들의 기록이다.
너의 확인, 너의 가치에 붙잡혀 하나님께서 너에게 하려는 일을 놓치지 말라. 우리의 생애는 다만 잘했다, 못했다에 있는 것인가? 우리의 생애가 다만 최선을 다 했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왜 필요한가? 신앙은 어디에 쓰려고 가지는 것인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보다 우월한 존재, 그래서 우리를 돕는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을 감동시켜 보상을 받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나를 납득시키고 만족시키고 탄복시키는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대로 체념을 하는가? 하나님은 쉬거나 방심하시는 날이 없다. 지나간 40년 동안 무얼 하셨습니까? 라고 대드는 모세에게 그 40년 동안 나는 너의 혈기와 고집이 꺾이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꺾지 않고 너에게 시간을 주고 꺾이는 만큼 너를 채워갔다. 그래서 지금의 네가 되었단다. 결국 모세는 땅 위에서 가장 온유한 자가 되었다. 전능한 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매일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시는 줄을 모르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당장 요구하는 결론을 주시지 않고 여러분이 그 결론을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도록 하신다. 물건으로 주시지도 않는다.

솔로몬이 대를 잇는 것은 어떤 약속의 성취인가? 다윗아, 네가 성전을 짓겠다고 하지만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냐? 네가 성전을 짓겠다고 해서 그 보상으로 너의 왕권을 영원하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왕좌에 앉히고 영원토록 지키겠다. 그런데 이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다. 다윗에게는 그럴 수 없는 불륜의 자식이 아닌가? 그러니 솔로몬은 이삭과 같은 존재이다.

이삭은 누구인가? 낳을 수 없는 아들이었다. 하나님은 말씀 하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은 네 능력과 정성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이삭을 잡도록 시켰고 아브라함은 잡았다. 됐다. 이젠 네가 알아들었구나. 그럼 살려 두어라. 이삭은 이렇게 죽은 자요 없는 자인 것이다.

없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며 이삭은 이것을 증언하는, 다시 말해 없는 것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기 위해 있는 자이다.

솔로몬도 그렇다 솔로몬은 왕이 될 수 없는 자이었으나 (솔로몬의 형이 죽은 것을 보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인물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삭을 믿는 것도 다윗을 믿는 것도 솔로몬을 믿는 것도 아니다. 창조주 성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물론 힘이 든다. 그러나 힘이 드는 것과 체념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여러분 생애가 무엇을 만드는지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생애를 살아 내는 기적과 감격이 있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강대상에서 박목사님께서는 잘 우시지 않는다. 잘이 아니라 거의 우시지 않는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어떤 장면에서 가끔 목이 메시는 걸 느낄 수 있다. 설교에서 가끔, 그리고 기도에서도 가끔이다. 언제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크다는 걸 말씀하실 때나 아니면 당신께서 그런 은혜를 받고 있다고 고백하실 때이다.

(2) 사무엘 설교가 끝나간다. 언제나 그렇지만 너무 아쉽다. 사무엘 설교를 정리하다 보면 결국은 한 단어 밖에는 안 남는다. 하나님의 은혜.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다윗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한 없이 부어주셨으며 지금도 부어주시는 그 은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