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37) (삼하24:1~10)

2018. 4. 29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시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좋아하는 시편의 구절이 정말 많이 있지만 한 구절을 택하라고 하면 시37:23~24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 인생의 날을 돌아보면 안 넘어진 날 보다 넘어진 날이 훨씬 더 많다. 그래도 그때마다 시편의 이 말씀으로 위로받고 일어서고 일어서고 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수술과 시술을 적지 않게 했다 큰 수술은 가슴의 갈비뼈를 모두 절단하고 시행하는 관상동맥 우회술 부터 작은 수술은 편도선 수술까지 5~6번의 수술을 했으며 관상동맥이나 경동맥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시술 등은 거의 10번 정도 한 것 같다.

(2) 시술은 간단하고 편안히 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동맥을 절개하고 그 동맥 속으로 기계를 넣고 그 기계 끝에 스텐트를 매달고 갔다가 풍선으로 압력을 넣어 막힌 동맥을 넓힌 후 그곳에 스텐트를 놓고 기계만 다시 나오는 시술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시술을 할 때보다 준비하고 시술 장소로 실려 갈 때가 훨씬 더 두렵고 긴장된다.

(3) 이 때 내 입에서 항상 터져 나오는 성경 구절은 시23:1~2이다. 아, 주문이 되었건, 암송이 되었건, 진통제나 진정제로 쓰던 이 말씀을 쉴 새 없이 반복함으로 견디거나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4) 다윗은 그의 생애에서 언제 쯤 이 시편 23편을 썼으며 어떤 환경이었을까? 물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쓰지 않았을까 싶다. 살아남으려고 미친 체 하면서 까지 견디었으니까.

신기한 것은 이 말씀을 외우고 있노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두려워한들 도망갈 수 없어서 일까? 아니, 말씀의 힘이다. 아픈 건 그대로 다 아픈데 두렵지는 않다. 그리고 긴장으로 잔뜩 부풀려졌던 어깨가 내려오고 나는 평안의 항구에 도착한다. 한 가지 알려드린다. 사람은 몇 초 만에 전신마취가 가능할까? (의식이 없어질까?) 단 몇 초이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편히 주무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는 2~3초 밖에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2. 내 용

가. 서론

(1) 다윗은 인구조사로 가장 큰 벌을 받는다. 이 사건은 다윗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골리앗 사건이나 밧세바 사건을 넘는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7만 명이나 죽는다. 이 사건은 잘 잘못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4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격동 시키사, 이렇게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도전하셨다 라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옳다. 무엇을 도전 하셨을까?
(2) 다윗은 후반부 생애에 와서 약간 타협하고 약간 체념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저앉은 다윗을 불을 질러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이 가르치는 다윗의 교훈이 어느 구절이든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3) (롬3:23~24) 구원은 왜 필요한가? 이 본문에서는 칭의가 강조되는 바람에 무엇으로 부터의 의 인가? 하는 문제가 간과되었다. 죄인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미흡한 상태의 사람을 말하며 구원이란 이것을 회복하여 영광을 완성하자는 것이다. 이 영광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 보다 더 큰 어떤 것이다. 죄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는 미흡한 것, 빗나간 것, 왜곡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영광에 미흡한 것이다.

나. 환난은 왜 필요한가?

(1) (롬5:1~4)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약속해 놓았고 그 기대와 소망 속에 있는 우리에게 환난이 현실로 들어온다. 영광으로 나아갈 신자들에게 왜 환난이 필요한가? (롬8:14~26)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받아야한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즉 영광의 내용을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환난이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을 잘 잘못에 대한 보응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환난의 개념을 잘 잘못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를 가장 크게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우리에게 환난은 다만 견디어야 한다는 차원뿐 아니라, 그 환난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로마서 이 본문을 봐도 앞뒤로 성령의 기도가 있고 그 가운데에 영광과 고난이 있다. 그렇다면 고난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요15:~12)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다. 우리 스스로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목적하신 것을 우리 안에 주셔야 한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안에 붙어 있어야 한다. 다윗이 어떤 타협이나 어떤 안심에 머물러 있을 때 그가 가장 잘못한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공급이 필요 없어진 것이다. 여기를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고 깨워 일으키신 것이 이 마지막 사건이다.

(3)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으면 평안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놔두시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를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어떠한 만족도 그것은 우상이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까지 얘기했다. “최고의 우상은 안심이다.”

안심이란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지까지 따라가지 않고 어느 정도에서 포기하는 것을 의미 한다. 환난이 도입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하루하루 중 어떤 날도 개입하시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힘써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도 과목은 점점 많아지고 숙제는 늘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우리는 순종이나, 많은 열매가 맺는 문제 등을 성실성의 문제로 이해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없는 평가만 남게 되고, 하나님이 직접 우리 현실에서 일하시는 가치를 모르게 된다.

(빌3:4~11) 예수를 믿는다는 가장 뚜렷한 구별은 거룩이다. 그것은 종교성과 도덕성의 지극함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세상에는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기준으로 전반부의 삶과 후반부의 삶으로 나누어진다. 전반기는 후반기와 전혀 연속성이 없다. 그러나 전반기의 생애도 의미가 있다. 사도바울의 사역과 전도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것이다 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기독교 복음을 이렇게 이해했다. 즉, 나는 다메섹으로 갈 때에도 진심이었고 세상적 으로도 최고 수준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3) 다윗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반부에서는 잘 했는데 후반부에서는 틀렸다로 되지 않고, 다윗의 도덕성을 허물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신앙이란 도덕성을 누적해서 될 일이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니 다윗을 도덕성과 종교성에서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고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안에서 나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되었다.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한다. 그전의 나는 다만 비교에 불과했다. 우열의 싸움과 승부를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썩은 가지에서 줄기에 붙은 가지로 나아가겠다. 이것이 기독교다. 여기에는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다.

다. 결어

(1) (요17:21~23)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인 것처럼 자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려고 오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목적하시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알리고 하나님의 진심과 자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씀한다. 예수님은 이것이야 말로 영광된 일이며 이 영광을 우리와 나누겠다고 하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서로 사랑하라 이다. 사랑이란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최상의 거룩함이다.

(2) 잘 잘못에 대한 회개는 우리가 더 옳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 사랑은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안심은 주변과 나를 격리시킨다. 나도 너한테 아쉬운 소리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나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마. 나는 너희들이 볼 때만 잘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있을 때에도 잘해.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없으면 공허해지고 추상명사가 되고 만다. 환상이 되거나 공상이 된다.

(3) 하나님이 다윗이 편안한 속에 있는 것을 그냥 두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늘 초등학생의 수준에 있으면 안 된다. 한국교회는 이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갈 때가 됐다. 이제부터는 약간의 전문성이 시작된다. 여기를 피해갈 것인가? 사람은 이렇게 해서 깊어지고 놀라워진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흔드시고 채우시고 목적하신 자리까지 이끌기 위해 성실히 일하고 계신다. 다윗에게 하셨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인생을 살아내는 복을 누리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요즘 나는 박목사님께서 작년 6월 7일(수)에 하셨던 로마서 7장 특강을 열심히 듣고 있다. 네 번 들었으니 여섯 번은 더 들을 생각이다. 이 특강은 도입 부분이 어려워서 초반에 말씀을 놓칠 수 있어 더 긴장하여 듣고 있다. 목사님께서는 평소와 다르게 설교 중에 두 번이나 열심히 따라오라고 독려하신다. “알아듣기 표정 짓기” “따라 오셔야 됩니다.”

곧 정리해서 올리겠지만, 요지는 영원한 영광의 길로 가도록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는 우리에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는 정반대의 국면이 왜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 하실 때 작정하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의 수준까지 우리를 끌고 가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2) 접근 방법은 달랐지만 오늘 설교와 핵심은 같다. 다윗은 노년에 평안 했는가? 큰 상처를 안고 살았지만 다윗도 인간이었다. 모든 반란을 제압하고 주변 국가들과 전쟁이 없었기에 다윗은 다시 안심하며 살았다. 이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인구조사를 통해 격동시키셨고 결과는 7만 명이나 백성들이 죽었다. 성경에는 다윗의 마음이 쓰렸다,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는 등의 세부적인 표현은 없다. 그러나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다윗은 다시 시편 51편을 지었을 때로 돌아가 하나님께 엎드리며 기도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3)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신다.

“너 그거 묻지 마라. 그냥 내가 인도하는 대로 한 걸음씩 따라와라. 나는 결코 네 손을 놓지 않는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