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무 엘(35) (사무엘하 21:10~14)

2018. 4. 1(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지난 목요일(4/5)에 교회에서 열리는 2018년 봄 일병 강좌에 다녀왔다. 이번 강좌의 주제는 “다윗을 통해 보는 젊은 목회자들을 위한 기독교 신앙의 통찰”이었다. 이번이 첫 번째 주였는데 부제는 한나와 마리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2) 이 강좌는 본래 목회자들을 위한 것이어서 우리 교회 일반 성도들에게는 개방이 되지 않았지만 특별히 윤철규 목사님께 빽을 써서 듣게 되었다. 벌써부터 들어보고 싶었던 강좌였다.

(3) 나는 박목사님 말씀을 들을 때 초 집중을 한다. 집중력이 좋다거나 그런 말이 아니다. 23년 전 처음 말씀을 들을 때나 지금까지도 집중하지 않으면 순간 놓치게 되고 놓치면 설교 내내 헤매게 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고 이 체득이 저절로 나를 긴장시키고 집중하게 만든다.

이날도 나는 습관처럼 집중했다. 그런데 이 날은 조금 달랐다. 목사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자유롭게 드나드시면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셨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잘 알고 있던 내용 또는 모르던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목사님은 무대 위에서 신명나게 춤을 추는 춤꾼이 되었고 목사님의 말씀은 유연하고도 현란한 춤사위가 되어 나는 두 시간 내내 그 춤사위를 쫓아 같이 춤추는 관객이 될 수 있었다.

주일 설교의 내용이나 수준보다 더 높다는 것이 아니다. 본당의 강대상 위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되는 주일 설교라는 틀을 벗어나자 목사님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셨다. 목사님께서 자유로워지자 하나님의 말씀은 춤을 추듯 꿈을 꾸듯 바람에 스치듯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말씀의 중요한 어떤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말씀 전체가 하나였고 그 하나 속에 담긴 각 부분은 그 하나를 바치고 있는 튼실한 지체였다.

(2) 지나치게 들리는가? 아니다. 당신이 직접 들어보라. 왜 이런 강의가 우리 교인들을 위해서는 없을까? 수련회 때 있다구요? 그게 안 좋다는 건 아니다. 어떤 행사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말씀 그 자체를 가지고 우리 교인들도 모이고 들어야 한다. 외람되지만 남포교회 교인들은 박영선 목사님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야고보 선지자 같은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자꾸 들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도 콩나물처럼 자라있는 자신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 박목사님께서 1948년생이시니까 금년이 만 70 되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 곁에 계실 수 있을까? 제발 조금만 더요, 하나님. 내가 가지고 있는 큰 기도 제목이다.

2. 설교내용

가. 서 론

(1) 기브온 족속은 가나안 원주민 중 한 족속인데 출애굽기에 나오는 대로 거짓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속이고 살아남았다.

(2) 사울은 왕이 되었을 때 그 배경이 강력하지 않은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강력했던 유다 지파를 의식해서 기브온 족속을 공격했다. 기브온 족속의 거주지역은 유다 지파의 지역이어서 사울은 정치적으로 유다지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브온 족속을 공격했던 것이다.

(3) 그 사건으로 사울 사후에 하나님께 약속을 어긴 벌을 받게 된 것인데 이스라엘에는 3년 기근이 있었다. 다윗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기브온 자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사울의 자손 7명을 희생자로 내놓으라고 해서 내주게 되었다. 7명은 참수되었고 기브온 자손들은 그것으로 원한을 갚게 된다.

그 시체를 사울의 첩이었던 리스바가 지켰다. 7명중 2명은 리스바의 자식이었고 5명은 사울의 딸 메랍의 자식이었다. 다윗이 그 얘기를 듣고 그 동안 매장을 못하게 했던 그 시체들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내게 했으며 이 때 사울과 요나단의 시체도 다시 이관하여 장사를 지냈다. 후반기의 다윗에게는 일관된 목표나 지혜나 의지 같은 것이 없었고 일반인과 다름없이 문제가 생기면 그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처리를 했다.

나. 다윗의 생애

(1) 후세 사람들은 다윗을 평할 때 다윗의 후반부는 거의 논하지 않고 다윗의 전반부만을 거론한다. 즉 골리앗 죽인 것,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춤춘 것,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 등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밧세바 사건이고 그 사건을 기준으로 다윗의 생애는 밧세바 사건 이전이 아니라 밧세바 사건 이후가 초점이 되었다. 그 초점은 바로 다윗이 은혜의 대표자라는 것이었다.

(2)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거부감을 갖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포함한 모든 신앙이 인간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대치되는 주장에는 거부감을 갖기 마련이다. 즉, 보이는 어떤 복도 받고 내면으로는 정신적인 어떤 깊은 수준에 가는 것을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한 것일 뿐 성경의 가르침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연결은 되어 있지 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된다.

(3) 다윗은 자신의 후반부 생애 때문에 은혜의 대표자로 불린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최고의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운 것이 아니고,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과정을 밟아서 완성되는가 하는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최초의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방법을 처음 쓰기 시작했고 그 믿음은 이런 것이다 라는 설명을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방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조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만들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은혜의 대표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보면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는 무엇을 만드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의 전반부 인생에서 보여지는 일들을 우리가 자꾸 거론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다윗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다윗을 영웅화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는 다윗은 위대한 사람,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훌륭하다는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요 종교성이 깊은 것이요 기뻐할 때 기뻐하는 것이며 슬퍼할 때 슬퍼할 줄 아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다윗을 영웅으로 믿고 기대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4) 그러나 성경의 지적은 다윗의 후반부 인생을 위해 전반부 인생에서 우리의 공감을 받은 영웅성이 후반부 인생에서는 빛을 잃는다는 점이다. 성경은 전반부 인생이 후반부와 비교하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라고 쓰고 있는데도 우리는 전반부 인생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다윗의 삶을 얘기할 때 다 좋은데 밧세바는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밧세바를 들이 댐으로써 다윗의 전반부 인생은 우리가 기대하는 가치이고 후반부 인생은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인정하는 가치라고 두 사실을 대조 한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전반부 인생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5) (고전1:18~21)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다. 이것을 세상가치로 보면 무슨 영웅성이 있겠으며 위대함이나 권력이 있는가? 구원자가 세상 권력에 붙잡혀 힘으로도 지고 수치를 당하고 무력하며 힘이 없었다. 기도교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인데 이러한 관계를 표현할 때 아들과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 라는 말로 표현한다.

예수를 믿는다 라는 표현 속에는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대상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시는가 하는 내용 등이 모두 담겨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기대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권세도, 승리도 우월도 아니다. 고린도 전서에 있는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은 이해로는 되지 않는, 한 존재의 변화로 증언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으면 어떠한 변화가 있는가? 가치가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운명이 달라진다. 그러나 세상이 원하는 성공은 주지 않는다. 병이 낫지도 않고 태평해 지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성공해도 돈이 생겨도 그 복으로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너를 구원했다는 이 표현은 밧세바를 통해 너를 구원했다 라고 바꿀 수 있는 것이다.

(6) 다윗 생애의 가치는 밧세바에 있다. 그 앞의 영웅성이 밧세바를 이기지 못한다. 다윗의 영웅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폭력이었다. 폭력은 무엇을 막고, 깨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힘으로 되는 것이지만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기독교 가치에서 최고로 여기는 것은 사랑인데 사랑은 힘이 있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힘에서도 졌고 명예에서도 졌고 공포 앞에서도 졌지만 사랑과 영생과 진리를 담고 계신다. 세상은 이것을 방해 할 수도 대적할 수도 없다. 물론 만들 수 도 없다.

다. 생명과 사망

(1) (고후:4:7~12) 생명과 사망의 2중주를 연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한다. 사망이 우리에게 와서 폭력과 공포를 내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모든 사람의 인생이다. 사망의 권세는 있는 것을 파괴하는 것, 즉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사망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분리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사망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일 수 있는 것이지만 사망이 할 수 없는 것은 생명, 진리, 소망, 영광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으며 사망은 이것에 손을 댈 수가 없다. 사망이 우리를 죽이지만 우리가 죽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를 싫어한다. 우리는 속도 이기고 겉도 이기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살아서도 영광, 죽어서도 존귀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왜 이 두 가지 일을 충돌시키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함으로써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사는 것을 막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빨리 알아듣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위협을 겁내지 말고 내가 너희 안에 준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네 인생을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우리와 씨름하는 이유는 우리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어도 사망과 핍박과 고난을 아예 제거해 달라는 간구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다 응답하신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된다. 사람이 생각을 안 하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이 괴로움 속에서 우리를 만드신다. 다윗의 생애 에서도 드러나듯이 밧세바 사건은 잊을 수 없는 수치가 된다. 심지어 신약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장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이 말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 그러나 여기야 말로, 네가 잘못한 일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결실했는가를 보라 라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이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권면한다.

(3) 이런 이유로 우리가 다윗과 밧세바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감사와 평안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훌륭한 사람들을 나열함으로써 우리의 기대와 소원과 이상이 훌륭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우리는 자기 인생을 만들고 싸우고 살아내는 일을 안 하면서도 훌륭한 사람을 거론하여 진실을 슬쩍 피해 가려고 한다. 이런 태도가 하나님도 속일 수 있을까?

우리는 울어야 한다. 불안에 떨어야 한다. 고민하고 자책해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처해있는 아무 것도 없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면서 대들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은 답하신다. 내가 네게 주려고하는 것은 겁이나 공포가 아니다. 강요도 아니다. 다만 예수 안에서 보인 내 진심이 아니냐 라고 말씀 하신다.

네가 돌이 킬 수 없는 과오와 실수를 가졌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다 최고의 영광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윗이 겪었던 민망함, 모호함, 자책들이 일을 하고 있다. 사망이 나를 불타게 해도 내 속에 있는 보배는 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변하게 한다. 우리가 가졌던 성의, 의지, 각오, 이상 등을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의 사랑, 이해, 용서, 인내를 갖춘 멋진 인격체가 되어간다.

정철훈 시인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 시는 신앙인의 현실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시사하고 있다.

식탁의 즐거움
정철훈

식탁을 보라 죽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 가
그래도 식탁위에 오른 푸성귀랑 고등어자반은 얼마나 즐거워하는 가
남의 입에 들어갈 직전인데도 그들은 생글 생글 웃고 있다.

한 여름 땡볕 아래 밭이랑 똥거름 빨며
파릇했던 파도보다 먼저 물굽이 헤치며
한 때 바다의 자식으로 뛰놀던 그들은
데쳐지고 지져지고 튀겨져 식탁에 올라와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펄떡이고 출렁이고 싶다.

그들은 죽어서 남의 밥이 되고 싶다.
풋고추 몇 개는 식탁에 올라와서도
누가 꽉 깨물 때까지 쉬지 않고 누런 씨앗을 영글고 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터지는 식탁의 즐거움
아, 난 누군가의 밥이 되었으면 좋겠네

시인도 삶을 이렇게 읽어 내고 있는데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에 너무 맥이 빠져 있다. 힘이 없다. (마28:18~20)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가? 바로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를 말한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성경 말씀도 바로 여러분이 서있는 그 자리를 의미한다. 왜 그 자리는 그토록 중요한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며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살아가신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를 보는 사람이 이것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세상의 위협이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당연히 기이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 결 어

(1) 사랑이란 최고의 가치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공포이다. (요일4:18)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특색은 공포가 없는 것이다. 혹 근심 걱정이 있을 수는 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는 이것 아니면 안 돼, 또는 이것 없으면 안 돼 라는 것이 없다. 또한 지금 이 순간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라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기이한 존재가 되었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약속해 주셨고 우리는 그 약속을 받고 지금 이 자리에 보내졌다.

3. 에필로그

(1) 요즘 나는 송파구청, 서울시등과 주일 예배 시 도로에 주차를 허용해 달라는 문제로 많이 싸우고 있다. 싸움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관청을 상대해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민간인에게는 이건 싸움이다.

(2) 아직 어떤 결정이 나려면 멀었지만 지금도 서로 다투는 과정에 있으니까 말투가 꼭 공손할 수는 없다. 얼마 전 서울시의 회신이 왔는데 요지는 남포교회가 불법을 타협하려고 한다는 투의 답이 왔다. 이 문서를 받고 열이 확 올랐는데 그래도 최대한 참고 인신공격을 자제하면서 답을 썼다.

(3) 이 답은 최목사님 명의로 발송되기 때문에 결재를 올렸더니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고치셨다. 예를 들면,

“ 남포교회에 불법행위가 많은지 서울시에 많은 지는 꼭 비교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라는 문장을 내가 썼는데 최목사님이 빼자는 것이다.

나는 최목사님 세대도 아니고 처음부터 일에 대한 지시를 박목사님께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최목사님의 의견대로 조정을 했다.

(4) 며칠 후 박목사님께 이 문제를 보고 드렸다. 보통은 박목사님 말씀에 절대 복종하는 나이지만 이날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반론을 폈다. 나중에 나를 승복하게 하신 한 말씀.

“말 꼬리를 잡지 말고 그냥 우리 주장만 써”

(5)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링에서 복서로서 상대방이 되어 서로 싸우는데 이렇게 때리면 아프실 것 같으니 이렇게 때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맞는 말씀 아닌가? 신자란 이러한 싸움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잊지 않고 싸워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일은 훨씬 더 힘들고 어려워 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