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34) (사무엘하20:4~13)

2018. 3.18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오늘 설교에서 박목사님은 우상에 대하여 잠시 말씀하셨다. 한 10년은 넘은 것 같은데 박목사님께서는 우상에 대해 약간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바로 그 특유의 화법으로,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그런 표정들이시군요, 라고 하셨다.

(2) 물론 설명이 이어졌다. 하나님 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 숭배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충격이었는데 이제는 목사님 생각을 많이 따라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최근에는 좀 더 나아가 진화된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지 않고 하나님과 타협하려는 것 그것은 우상 숭배라고 단언 하셨다. 그렇다 이 부분도 공감이 갔다.

(3) 오늘 설교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가 안심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앗 그런가? 그러면 나는 참 많이 걸리는데, 나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나의 현실생활에서 얼마나 걸리고 있는 지를 살펴봤다. 이렇게 보니 거의 걸린다. 나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고 있는가? 좀 쉴 만 하니까 아주 머리 아픈 명제를 하나 던지신다.

(4) 우리 남포교회가 부족한 몇 가지 일중 대표적인 하나는 초신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은 정말 좋아졌다) 감리교회 같으면 초신자가 한 사람 오면 난리가 난다. 담당 전도사, 교구장, 구역장이 일사불란하게 이 사람을 영접하고 심방도 자주한다. 전화도 한다. 물론 두 가지 반응이다. 교회의 기둥 뒤로 숨고 싶어하는 사람은 부담스러워 하지만, 정말 초신자들은 고마워한다. 생각해 보라 외롭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 한 가지는 박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교회가 준비한 프로그램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다.

“ 당신이 처해있는 그 곳에서 신자로서 명예를 지키고 최선을 다하라.”

여기가 정말 중요한데 우리 교회는 신도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이 말씀을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훈련이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한 박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실까? 내가 보기엔 박목사님께서도 생각은 있으신데 체력이 안 되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교역자들도 감히 이런 문제에 의견을 내지 못한다. 우리 남포교회처럼 교역자들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곳도 드물지만 자유가 가지고 오는 그림자라고나 할까?

(5) 내가 한 가지 자부 하는 일이 있다. 나는 박목사님 설교를 90%는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늘 생활하면서도 CD등을 통해 설교를 듣는다. 이런 나도 아직 목마르다. 예를 들겠다. 나는 몸이 아프다. 그리고 아직도 일을 해야 생활이 해결된다. (아직 젊은 1952년생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야단치시면 할 수 없다.) 그리고 매달 생활비, 집세, 카드 값, 아파트 관리비 그리고 가끔은 병원비에 시달린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로서의 명예를 지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최선을 다 하는 길일까?
이런 질문을 박목사님께 하면 어떤 답을 주실까? 예상하건데 부딪치고, 생각하고, 싸우고, 기도하라고 하실 것 같다.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로서만 들을 수 있다. 이래서 날 마다의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 오늘은 또 어떻게 살까요?

(6) 박목사님께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우상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이런 우리의 현실을 당연히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왜? 당신도 똑 같이 겪으시니까. 우리 보다는 조금 나으시다구요? 쪼오끔 더 나으시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남포교회에 34년째 시무하시는 목사님께서 아직도 경제적인 걱정에서 자유롭지 않으시다면 그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목사님의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기도로 나를 인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주는 카드를 막아야 하고 다음 주는 생활비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렇게 없이 살아도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니 없이 사니까 더욱 아버지께 매달리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아버지 이번 주 카드를 막지 못하고 다음 주는 생활비가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아들답게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저보다 더 어려운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아버지를 믿는 자로서 명예를 지키고 오늘도 만나는 이웃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좋은 말 하고 좋은 얼굴로 그들을 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 설교내용

가. 서론
(1) 우리는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원하며 최소한 영웅을 흠모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대보다 못한 현실에 대하여 세상을 원망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며 산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신의 진정한 인생을 살아내지 못한다.

(2) 이러한 잘못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일 하심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다윗의 후반부 생애이다.

(3)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이 끝난 직후 다시 세바의 반란을 맞게 된다. 세바는 베냐민지파 사람이었고 사울 편에 있었던 사람으로 다윗에게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여기에 다른 지파들이 합세해서 반란군은 무시할 수 없는 세를 가지게 되었다. 다윗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다지파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을 아마사에게 맡긴다. 아마사는 압살롬이 반역할 때 세운 압살롬의 군대 장관 이었다. 다윗이 아마사에게 부탁을 할 때 우리는 왜 이 중요한 일을 요압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윗은 왜 요압을 피했을까? 요압이 압살롬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4) 세바의 난을 진압한 후 다윗은 다시 요압을 군대장관으로 임명한다. 어떤 배경이 있는가? 밧세바 때문이었다. 밧세바 사건에는 요압이 깊이 관여되어 있고 요압은 다윗의 약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요압에 대한 생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요압의 공갈과 협박에도 다윗은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 다윗의 입장

(1) 다윗은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되었다. 그는 민망하고, 답답하고, 부끄럽고, 설명할 길 없는 인고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의 젊었을 때와 현저히 비교된다. 다윗은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그러니까 왜 밧세바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려는 말을 놓치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의 밧세바는 무엇인가?
무능한 거, 할 말 없는 유전자, 이웃집 개 새끼 등 여러분이 제어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여러분 주위에 있고 그것들이 여러분의 밧세바는 아닌가?

(2) 다윗의 전반부 생애가 쌓아놓은 것은, 성경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긴장을 구축한 것에 불과하다. 밧세바 사건 이후 다윗은 우리를 무척 실망시킨다. 자연히 우리는 다윗이 이게 뭐야? 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세상은 이때를 기다려 우리를 공격한다. 야, 내가 믿으면 너 보다는 잘할 것 같다 라고 한다.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당장 목사님 좀 잘 하세요 라고 핑계를 대려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 그 속에서 너는 어떻게 할래?”

다윗도 이 상황에 붙들려있고 이 질문을 받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능동태의 삶을 살리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수동태의 삶을 살고 있고 끌려오는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수동태로 끌려온 인생의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다. (시105:17~22) 요셉은 수동태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이 빚어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다. 하나님의 지혜

(1) 우리는 좋은 길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고난은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지혜이다. 고난의 길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욥이다. 욥은 의롭고 겸손했다. 욥의 친구들은 계속 회개를 촉구했고 욥은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버티었다. 욥기 38장 이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대답하신다.

“ 이 창조된 세상을 보라. 너는 이 세상을 나와 함께 다스릴 내 자식이다. 너는 내 기업을 이어야하며 잘잘못으로 판단 받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안심하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고 너는 창조의 신비를 깨달아 가야할 사람이다. 그러니 그 속에 숨어서 안주하려고 하지 말아라.”

(2) 욥은 자신이 알고 있었던 안심의 상황, 즉 자신이 최선을 다했던 상황이 깨지는 바람에, 주어진 환경과 고난을 이해할 수 없는 바람에 자신의 원망과 분노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또 친구들이 주장했던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도 해결은 없었다.

그러나 욥은 이 때문에 창조자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아 끌어 올려졌다.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자로 자녀라고 부르시고 이 것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 고난은 한계를 깨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대와 만족과 가능성 보다 더 큰 존재라는데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형통과 안심을 요구하지만 결국은 이것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3) 성경이 지적하는 가장 큰 죄는 우상 숭배이다. 우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질투하시고 화를 내셨다. 우상은 타협이다. 즉 우리가 말할 때, 제가 아는 여기까지이면 저는 만족합니다 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여기를 깨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 타협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원망으로 다가온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깨시려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만의 현실이 주어진다. (마26:36~38) 예수님도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우리는 우리가 이런 말을 하거나 이런 상황에 놓이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놓인 정황이다. 하나님께서 이 정황까지 우리를 밀어내신 것이다. 단지 예수님의 정황은 이런 것이었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신은 하고 싶은 걸 못하셨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인간의 폭력, 무지, 처참함, 분노를 다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음까지 당하셨다. 이렇게 수동태의 끝에 오셨지만 능동태로 반전이 일어난다.

로완 윌리암스는 말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동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독교는 옷을 빨고 빨아서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은 후 멋진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웃고 넉넉하고 위대한 것이 상대에게 나누어지는 종교이다. 그렇게 용서와 섬김의 길을 간다.

다윗은 무엇을 용서했을까? 그는 실패를 용서하고 자신의 할 말 없는 인생을 감수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다윗도 그랬어.

라. 결 어

(1) 우리는 쉽게 살고 싶다. 안심하고 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이다. 안심과 확신이 전부가 되면 비난 밖에 하지 않는다. 옆 사람에게 유익하지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 무엇인지 알면 우리는 모든 원망과 보복을 내려놓고 자기 인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물으신다. “여기서는 어떻게 할래?”

그러나 우리들은 대답 대신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빈다.

(2) (고전5:31~32) 우리는 쿼바디스 영화를 보면서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볼 때 눈물이 났다. 이 눈물은 감격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원망이 섞인 눈물이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내버려 두세요? 바울은 피해 다니는 것이 기독교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당신은 대 사도 인데 죽음이 두렵단 말이냐? 라고 비난했다.

성령은 여러분이 앉은 이 자리에 위대한 도전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이 도전에 대답하고 있는가?

3. 에필로그

(1) 내가 그 친구를 만난 것은 1987년경이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이고 고대 철학과 72학번이니 학교로 봐도 내가 1년은 선배였다. 그를 만난 자리는 역시 고대 선배였던 어떤 정치인의 후원 모임에서였다. 첫 날은 잘 알지 못했지만 그 친구는 그 당시 이미 10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자산가였다. 부동산에서 성공한 것이었다.

(2) 그를 만난 지 얼마 후 신문에서 부동산 투기자 명단이 기사로 올라 왔는데 그가 제 1번으로 나왔다. 사람은 참 웃긴다. 그런 기사를 보면 저런 나쁜 놈,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내 반응은 이야 김사장이 역시 큰 손이긴 하구나 였다.

(3) 그는 1992년경에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 그래도 내가 신뢰가 갔던지 수배 중에도 내게 연락을 해와 나는 한 2년 정도 그의 일을 보살펴 주었다. 그 후 우리는 그야말로 세파에 시달리고 시간에 쫒기면서 서로 연락이 없어졌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나는 서울 구치소로 그를 면회갔다. 앞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서 공소권이 없어지고 새로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그는 2013년에 출소 했다.

(4) 이 때부터 우리 둘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아마도 돈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만나서였을까? 나는 이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그의 생활 일부를 보조했다. 그를 위한, 그를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그 때부터 시작 되었는데 만 5년 만에 기도 응답을 받았다.

(5) 그는 이번 부활절 성찬식 (3/28)에 세례를 받기로 했다. 내가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의 마음 문을 여셨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아니다. 유도선수가 한 판을 메어치듯 메어쳐 꼬나 박으시면서. 그러면 어떠냐? 이제는 하늘나라에서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꽃샘추위가 오고 눈보라가 다시 몰아쳐도 그 귀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