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무 엘(32) (사무엘하 16:21-17:4)

2018. 2. 18(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오늘 설교에서 박목사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를 설명하셨다. (눅15:11-32) 내가 22년 동안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 비유를 몇 번이나 들었을까? 잘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10번 이상은 아닐까? (2년에 한번은 들었을 것이라고 낮추어 잡은 거다.) 그러니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 비유인데 오늘 설교를 듣고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 이 비유의 핵심은 화가 난 큰아들과 이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와의 대화이다.

큰 아들: 아버지 전 지금까지 집안을 위해 죽을 고생을 해온 거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저한테 송아지 안심 구이 한번 사주신 적이 없잖아요?

아버지: 그래 아들아 내가 다 안단다. 너는 내 뒤를 이어 집안의 어른이 될 사람 아니냐? 모든 것이 네 것인데 뭐 그렇게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느냐?

큰 아들: 아버지 쟤는 언젠가 또 사고 쳐요.

아버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오늘은 하나님 은혜로 우리 눈 앞에 있지 않니? 앞으로는 쟤도 정신 차리도록 열심히 기 도 하자.

큰 아들: (속으로, 이게 뭐야? 버는 놈 따로 있고 쓰는 놈 따로 있다고 하더니 꼭 그 얘기 같네.) 네 아버지. 저는 내일 새벽에 나가야 하니 일찍 잘게요.

(3) 그렇다, 작은 아들이 살아 돌아 온건 그 집안의 큰 경사다. 그러나 삶이란 어찌 매일 경사만 있으며 어찌 매일 살진 송아지를 잡을 수 만 있겠는가? 그날이 그날 같이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바로 그 하루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고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은 어떤 특별한 하루에, 어떤 큰일에, 의미가 담긴 다기 보다는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4) 큰아들아. 너는 이미 내 상속자요 내 삶의 전부이다. 그러니 너야말로 이 집안의 주인이다. 작은 애가 살아 돌아온 건 정말 기쁜 일이다마는 우리가 매일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니?

2. 내용

가. 서론

(1) 다윗이 은혜의 대표자라고 할 때, 우리는 당연히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으로 다윗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혜란 잘못한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2)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고 그의 반역에는 아히도벨 이라는 모사가 함께 함으로 힘을 더욱 키운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이기도 했다. 그는 지략가이며 책사이며 군사였다. 아히도벨은 반역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처 도망가지 못한 다윗의 후궁들과 대낮에 동침할 것을 압살롬에게 권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아버지 보다 더 큰 권력과 지위에 있음을 모든 백성에게 보이고자 했다.

(3) 아히도벨의 이런 제안은 그 이면에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였다. 그러니까 아히도벨은 지금 압살롬을 돕고 있다기 보다는 압살롬의 반역을 자신의 복수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밧세바 때문에 아히도벨의 집안은 거의 멸망했기 때문이다.

나. 다윗의 변화

(1) 다윗의 범죄는 나단의 지적처럼 하나님의 처벌을 받지만 다윗의 회개는 시편 51편에서 보이는 것처럼 도덕적 회개를 넘어서 존재론적 회개에 이른다. 또 다윗은 회개와 구원에 대해 놀라운 고백을 한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2)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그의 왕권도 유지된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더 벌줘야한다고 주장하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에 까지 떨어져야 했는가? 우리가 죄를 지면 죄는 늘 우리를 파멸로 인도한다. 또 다만 파멸을 만들뿐 아니라 파멸로 인도하는 길을 점점 확대한다. 앞의 죄가 뒤의 죄를 더 대담하게 만들거나, 앞의 실패가 그 뒤의 실패를 더 치명적으로 만든다.

(3) 압살롬의 반역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결국은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 반역은 반역, 복수, 치명적 파멸이라는 수순을 밟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한 아히도벨에 의하여 압살롬도 몰리고 다윗도 몰린다. 나중에는 아히도벨도 죽을 처지에 몰려 죽게 된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이러한 국면을 미리 선포하시고 관련자 모두가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셨다. 즉 죄가 무엇을 하는가 보아라, 죄는 파멸을 만들고 또 더욱 파멸로 가는 길을 확장한다는 것을 보아라,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할 말이 없는 자로 쫓긴다. 아히도벨로 인한 폭력에 반발하지 않으며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 배반에 대하여 분개하지 않는다.(삼하18:33) 우리는 다윗에 대해 생각할 때 다윗의 영웅적인 행동만을 칭송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들이 다윗의 후반기 사건들과 어떻게 대조되는 지를 놓치고 있다.

(4) 하나님이 만들려는 다윗은 그의 전반기 보다는, 내 아들 압살롬아를 울부짖으며 외치는 그런 다윗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후반기 사건의 눈물과 회한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긴 사건보다 우월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윗은 전반기에서 물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으나 그의 신앙과 그의 최선이 밧세바를 이기지는 못했다. 죄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다윗은 죄를 짓자 놀라운 반전을 경험 하게 되는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네 대신 죽는 것이 나았을 걸, 이라는 통곡 속에서 다윗은 비로소 모든 못난 자와 죄인을 용서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사랑의 반대말은 공포다. 죄는 우리를 공포로 몬다. 우리가 억지로 우겨서 힘으로 이기는 것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폭하는 것은 사실은 같은 것이다. 결국 다윗은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결실하지 못하는 공포와 폭력의 자리에 와서 마침내 자신이 아무도 심판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 용서에 대하여

(1) 전반기의 다윗의 신앙은 확신과 담대함은 있지만 신앙이라는 것이 죄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 당시 다윗은 신앙이란 하나님을 힘입어 보이는 승리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랬던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겪고 나서는 발언권이 없어진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에 대하여 분노하기 보다는 용서할 수 밖에 없어진다. 용서는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 대해 넘어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아니다. 로완 윌리암스는 자신의 책 “제자가 된다는 것”에서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자를 심판할 지위와 자격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결국 내가 더 못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또한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 주는 일도 아니다.

(2) 주기도문 순서를 잘 보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건 순서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면 저도 저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겠습니다, 이래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용서했으니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그를 고칠 수 없고 내가 그 사람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기도문 우리를 가르치는 순서이다.

내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쩌면 저럴 수 있어? 하는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면 당신은 용서의 시작점에 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 제가 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제가 저 사람을 고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내가 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며 이 용서를 통해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3) 공포의 반대말이 사랑이었던 것처럼 폭력의 반대말은 용서가 된다. 이렇게 해야 보복의 고리가 끊어진다. 폭력을 행사하여 벌을 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도 능력도 아니다. (마16:16-22) 이 제자 도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인이 바로 다윗의 자기 부인과 일맥상통한다. 다윗은 누구에게도 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영웅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필요한 일의 시작이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깨달아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된다. 나는 죄를 넘을 수 없다, 나는 사망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자기 부인의 시작은 용서이다.

(4) 예수님은 신으로서 인간의 한계 속을 걸으며 인간의 배신과 비웃음과 고통을 감수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음까지 갔다. 이 시작은 용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속에서 인간을 체험해 보기로 하셨다. 우리의 못난 것과 한심한 것을 체험하기로 하신 것이다. 이것이 용서이다.

라. 결어

(1) 다윗이 은혜의 대표자가 된 것은 다윗도 이러한 길을 걸어 은혜로 이 길을 멸망과 실패와 사망으로 가지 못하게 꺾고 이 길을 승리의 길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2) 밧세바 사건은 압살롬의 반란을 낳았다. 아히도벨의 폭력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주셨다. 이것은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3) 우리는 겁이 나니까 자기부인을 거부한다. 그리고 체념하고 산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 하는 길, 폭력이 필요 없는 길 그래서 고난으로 느껴지는 길, 아무런 권한도 없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고 마땅히 욕을 퍼부을 자리에서도 참아야 한다. 참는 게 신앙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저주의 말을, 심판의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4)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밧세바 사건을 통해 만든 폭력과 공포와 파멸의 길에서 십자가의 부활로 가는 길을 걸어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윗의 생애가 보여준 증언이다.(사53:4-6)

(5) 우리가 용서하고 사는 것은 이 세상 짐을 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삶인 것이다. 내 아들 압살롬아 네 대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외치는 곳에 이미 폭력과 보복은 없는 것이며 다윗은 다른 세상을 열었다.

(6)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탕자가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곳에 시선을 멈춘다. 그러나 이 비유는 더 나아가야 한다. 돌아왔으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아버지의 아들처럼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 통치, 용서, 섭리, 기다리심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쟤는 아직도 안돌아 왔는데요?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을 것인가? 폭력 절망, 보복, 원망, 파멸의 세계를 지나서 살리고 울어주고 힘을 주고, 희망을 보이고, 기적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신앙생활이 영웅과 전설 속에 묻히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이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다윗의 후반기야 말로 위대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여기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준비한 시기이다. 다윗은 이것을 나중에 훌륭한 찬송 시로 남겼다. 이 길을 우리가 걸어야 한다.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위대한 인생을 사는 여러분의 감격이 있기를 바란다.

3. 에필로그
(1) 요즘 우리 교회 앞에는 4주째 계속해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아마도 남포교회가 생긴 후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시위의 이유나 내용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까지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담보로까지 생각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2) 시위대는 우리가 교회 앞에서 시위하면 그 대상자는 좀 창피해 할거야, 그러니 빨리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3) 옛날에 어떤 부동산 중개업자가 우리교회를 상대로 말도 아닌 돈을 요구하는 소송을 낸 적이 있었다. 내가 소송대리인을 했었고 결국은 이겨서 그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때 나는 박목사님께 큰 교훈을 하나 배웠다. 아무리 교회라도 부당한 돈은 줄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이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면 교회는 언제든지 받아준다.

그 당시, 내용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이 집사, 그냥 좀 주고 말아, 뭔 교회가 소송을 하나? 라고 말씀하시던 어른들이 상당수 계셨다. 그러나 나는 시종일관 박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에 따라 움직였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피하지 말고 생각을 좀 해 보시라. 그리고 답을 카톡으로 주실래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