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31) (삼하16:5~14)

2018. 2. 4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 (2/4) 설교는 좀 쉬운 듯 느껴졌다. 어쩌면 1/21에 하신 설교(사무엘30)의 확장 편 정도로 생각이 되었으니까. 나중에 설교를 정리 하면서 다시 보니 나는 주일 예배 때 전혀 잘 못 들었다. 특별히 베드로에 대한 부분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고 놓친 것이었다. 아무도 뭐라고 안했는데 조금 창피하다. 다만 상한 심령으로 와라.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가면 안 됩니까? 주님.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2) 혹시 제가 좀 아는 척 하는 것 같으면 용서하고 들으시라.
한 20년 전에 교역자 한분이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간 고난을 받은 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측면도 있었다 라고 하셨다. 그 때는 별 이의 없이 좋게 들었는데 최근 민수기를 다시 보니 좀 다르다.(민14:33)

“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 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들이 너희들 죄 때문에 광야에서 죽는 것은 당연하고 너희들의 죄 때문에 자녀들까지도 고난을 받으리라 라는 말씀이다. 어떤 설교에서는 이런 얘기도 들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민족의 노예근성을 고치기 위한 시기였다고. 광야에서 죄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이었고 그 벌은 죽음이었다. 이를 자꾸 달리 해석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3) 남포교회 교인들의 큰 행복 중 하나. 우리에겐 완벽하지는 않아도 늘 고민하며 더욱 나아지려고 애 쓰는 목자가 있다는 것이다.

2. 내용

가. 서론

(1) 다윗은 은혜의 대표자이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밧세바 사건 이후가 다만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 있던 이야기들 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라고 성경은 얘기하고 싶어 한다.

(2)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른가?
앞에서는 다윗은 영웅이고 전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다윗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 중에 잉태했습니다, 주께서 공적을 가지고 가야 보상해 주신다면 나는 가지고 갈것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 라는 선언을 남기시게 된 것이다.

(3) 다윗의 후반부 얘기는 성경 전체의 사상인가?

나. 예수님의 3중적 회복 (요21:15~17)

(1)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과 세 번의 회복은 베드로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이어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과 기적에 대한 증언이다. 베드로의 장담과 실패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베드로를 부끄럽게 하시고자 함이 아니었다. 베드로의 실패에 잊지 못하게 못을 박으신 것이다. (마16:16~19)
베드로가 처음 충성을 맹세할 때 그 충성은 사탄의 일이었다. 베드로의 헌신과 각오는 왜 사탄의 일이 되었는가?

(2) 부활 후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는 알겠지? 라고 하신다. 베드로야 그때 내가 너에게 왜 사탄아 라고 했는지 알겠지? 라는 배경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복사이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다. 베드로는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을 따르려던 충성된 제자였다. 그게 왜 사탄일까? 베드로가 가졌던 최선, 질서, 가치는 사탄의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시고 목적하시는 질서와 가치는 인간의 최선과 능력의 극대치가 아니다.

“ 나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나에게 바치는 것, 다시 말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너는 다만 상한 심령으로 와라. 네가 만들 수 없는 것을 내가 준다는 것을 알고 와라.”

우리가 이것을 알려면 우리가 만드는 것의 실상을 알아야한다. 도덕성, 능력, 신의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우리로 깨우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실패를 주시며 해결할 수 없는 사고를 주신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에게는 세 번의 부인이요, 다윗에게는 밧세바였다.

(3)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 입니다.이게 저의 최선입니다. 이게 전부라면 헛될 수밖에 없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다시 물으시니 저는 이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사망을 이기시고 나의 실패를 극복하고 찾아 오셨으니 이 일을 완성하시고 영광으로 끌고 가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1) 우리는 끊임없이 전반부의 다윗, 세 번을 부인하기 이전의 베드로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의 초월을 빌려서 이것을 크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충돌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요21:18~19) 다윗과 베드로의 전반부는 그들의 의지와 최선을 바친 것 이지만 후반부에서 주님은 이제 내가 너를 끌고 간다, 이 길은 네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라고 하신다. 이 문제는 인내와 겸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이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길을 가며 결국 우리는 죽는다.

(2) 우리의 신앙현실에 있는 문제가 여기에 그대로 다 있다. 우리는 소원이 있고 열심이 있다고 변명한다. 아니다. 영웅이 되어서 하나님을 전하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이 그 자식들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원하고 계신다.

우리는 내가 나 되는 것으로 영웅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조건과 한계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고 져야 하는 책임을 성실로 지고 살아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왜 이 길을 부인 하는 것일까? 주께서 가난한 자와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누누이 말씀하시는데도 왜 우리는 아니라고 부인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베드로와 했던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 그렇습니다. 주님.

예수님: 그런데 뭐가 불만이냐?

나: 주님 주께서 제 진심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게 뭡니까? 매일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매일 애보고 빨래하고 언제 나가서 기도 한번 제대로 하겠습니까?

예수님: 얘야, 그게 십자가의 비밀 아니냐? 십자가가 뭐 멋있는 데가 있느냐? 모두가 오해하고 배신하고 손가락질한 끝에 내가 죽어버린 건 아니냐? 거기다 내가 부활을 담았단다. 그런데 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여기를 우리가 건너야 한다. 여러분의 생애가 위대 하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라. 결어

(1) 다윗의 후반기 현실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반복된다. 압살롬이 반역하고 피난길에 시므이는 비난을 퍼부어댄다. 다윗은 이것을 제지하려는 수하를 말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나를 저주하게 하신다 라고 받아들인다. 여기가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인 것이다.

(2) (행9:10~16) 이러한 길은 베드로에게도 잘 나타나지만 사도바울에게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살기가 등등 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확신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은 사도가 되지만 그 길은 고난과 환란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울은 당시에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자 능력이었다.

우리의 인생 속에 모든 기적과 권능을 담는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보상을, 확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른 약속을 한다. (고후12:7~10)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역설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가치와는 다른 것이다. 이 길을 잘 못 가면 우리는 충성과 헌신을 바쳐서 사탄이 되고 만다.

(3) 우리의 모든 불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우리의 모든 불만, 모든 조건에서 예수님은 묻고 계신다.
어떻게 할래? 그러니 우리가 감수 하지 못 할 일은 없다. 우리의 조건과 능력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실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생애였다. 베드로와 바울의 생애였다. 이 기적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3. 에필로그

(1) 박목사님 설교를 정리한 메일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많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어서 내편과 니편이 너무 확실한 게 탈이지만, 목사님설교를 보내 달라는데 무슨 이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군말 없이 보낸다. 참고로 교회 홈페이지에도 올린다.

(2) 이번 주 설교에서 다윗 얘기는 1분도 안하셨다. 베드로 얘기로 시작해서 바울 얘기로 끝을 맺으셨는데 설교를 듣는 내내 다윗이 생각이 났다. 다윗의 늙고 힘없는 얼굴과 박목사님의 날이 갈수록 노인이 되시는 얼굴이 여러 번 오버 랲 되었다.

(3) 박목사님께서는 지금 삶을 우리에게 온몸으로 생생하게 전하고 계신다. 인생이란 그 팔팔하던 전도사 시절부터 그 욕 잘하던 중년을 거쳐 나뭇잎 흔들리듯 떨리며 강단에 서는 모든 날을 다 포함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는 말씀하신다. 인생은 잠깐이다. 이 잠깐 동안에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