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30 (삼하14:1~:17)

2018. 1. 21(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번 주 설교에서는 아멘을 단 한 번도 못했다. 혹시 이번 주 설교는 은혜가 덜했기 때문인가? 라고 묻고 싶은가, 아니다 설교 중에 생각해야 할 테마 하나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깊고 푸른 역사. 박목사님 께서 좋아 하시는 표현 중 하나이다. 지금 하시는 사무엘 설교의 부제이자 우리 교회 출판부의 명칭인 무근검도 위의 표현과 관련이 있다.

(2) 깊다는 건 알겠는데 푸르다는 건 무엇일까? 설교가 끝나고 집에 와서까지 여러 번 생각했는데 마태복음 설교하실 때 했던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생각났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다른 두 가지의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기도하다 라는 말씀 말이다. 그래서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깊으시다는 거구나. 깊고도 깊으시다는 거구나. (고전2:10)

(3) 이번 주일(1/28)에 눈 건조증 으로 고생하시는 목사님께 안약을 하나 전해드렸다. 효과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런데 약에 대해 몹시 까다로우신 목사님 반응이 뜻밖이었다.

“ 이 집사 이 건 복음인데, 나는 인공눈물외에는 쓰지 않았거든”

약효는 다음 다음 문제였다. 자신도 병약한 내가 목사님의 건강을 챙긴다는 게 기특하셨을까? 복음이라고 하신다. 나는 눈물을 감추느라 목사님께 안약 넣는 방법을 시범까지 보인 후 목사님 방을 나왔다.

2. 내용

가. 서론

(1) 다윗의 생애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이 밧세바 사건이 된다. 다윗은 구약에서 은혜의 대표자가 된다. 은혜의 대표자라는 것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자의 대표자라는 뜻이다.

(2) 다윗의 생애를 잘 못 읽으면 다윗의 영웅성이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흠이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초점을 놓치는 일이다 다윗 생애의 초점은 밧세바 사건 이후에 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민망하고 부끄럽고 할 말이 없는 처지에 놓인다.

나. 다윗의 생애가 가지는 의미

(1) 다윗은 권력과 정당성과 종교성을 가진 자로 있었다. 하나님께서도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다. 밧세바 사건은 그런 후에 터진다. 여기서 다윗의 실체와 실상이 드러난다. 다윗이 했던 모든 종교적 행위들이 그의 실력이 아니고 그의 이상이고 그의 소원이었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밧세바 사건을 통하여 그(우리)에게 깨우치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바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고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 우리가 기대하거나 상상하는 것과 다른 하나님의 어떤 뜻을 우리에게 채우시는 일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3) 이것이 영웅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내용과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이해는 십자가 사건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늘 오해한다. (고전 1:18~:29)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이 방법을 쓰는 이유는 이것은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전설과 영웅과 신화를 다 뭉개버리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영웅이고 위대하고 전설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가 만든 최선의 종교가 될 뿐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뭉개버려서 그가 만든 업적과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담으려는 것을 가르치고 담아내게 하신 것이다.

(4)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특별히 부르셔서 할 말이 없게 만드셨다. 다윗이 모든 것을 다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불과했으며,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위대할지 몰라도 내가 하려는 일과는 다르다 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은 그것은 너희가 만들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5)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십자가에서 증언하신 것 같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승자로 만들겠다 라고 선언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다. 우리의 현실

(1)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전설이 되고 영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한다. 늘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바울을 불러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들처럼 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소원이 있고 진심이 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다.
(2) 우리는 내가 아브라함이 아니고 바울이 아닌 것을 너무 억울해 한다.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고 그 뜻을 가지고 우리를 불러내는 것이지 우리를 아브라함을 만들고 바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3) 그러나 우리는 나의 이 모습 이 조건이 싫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얘기 했던 모습에 머물러 있다. 그 다윗은 하나님에게 면박을 당하지 않았는가? 내가 너에게 도움을 주지 네가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4) 깨달은 후에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롬 4:7~8, 시 32:1~2)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이 있고 자신의 인생도 오직 하나님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아직도 오해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담으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는 하나님께 떳떳하고 싶고 위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인정하지도 않고 살아 내지도 못하다가 인생을 마치고 만다.

라. 우리가 가야할 길

(1)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한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미련한 자 약한 자를 부르신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부르셔서 예수 안에서 나에게 주시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보여 주신다.

(2) 하나님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주려는 것은 다윗의 전반기에서가 아니라 후반기의 삶에서 얘기 했다. 네가 부끄러워하고 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담는 단다. 내 아들을 십자가에 세우고 사망을 뒤집었단다. 뭐를 겁을 내느냐?”

이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지금도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과 진심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과는 차원과 내용이 다른 것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자녀이며 거룩하며 영광되며 그의 사랑을 받으며 그를 찬송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다윗의 후반기에서 보여지는 사실들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다윗은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여러 정황에 대해 발언권이 없다. 정의를 실현해야 되는 데 그러려면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 전반기의 삶에서 얻었던 영광과 명성만큼 아니 그 보다 더하게 거꾸로의 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식들까지 즉 가문 전체가 망신을 당하고 있다.

(3)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리에서 용서를 위해 마음을 열고 비난과 수치를 감수하고 내딛는 한 걸음. 이것이 위대한 것이다. 남자가 사회 생활을 한다면 자신의 일이 특정될 수 있다. 그러나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일과 부인의 일이 구별이 될 수 없다. 여기야 말로 진정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도전과 고민과 갈등과 긴장과 위험과 은혜가 있어야 될 자리이다. 그렇게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이 지금 일하시는 자리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오셨다. 나사렛의 목수로 요셉의 아들로 오신 것이다.

마. 결어

(1) 예수님은 33년을 하층 계급에 붙잡혀 살으셨다. 그리고 온 우주와 인류의 운명을 바꾸셨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십자가의 범위 내에 있다.

배신, 왜곡, 오해, 비난, 연약, 눈물, 땀, 피 흘림, 채찍에 맞음, 죽음.
이것이 반전된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의 현장이며 여기에 은혜가 담긴다.

(2) 사무엘서의 제목을 깊고 푸른 역사라고 달았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가 깊고 푸른 역사였을까? 어떤 영웅이 이 역사를 주도했을까? 아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한 영혼 영혼, 한 존재 존재, 그 각 각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복 주기를 원하시고 일하시는 역사였다 라고 말한다. 그러니 당신의 생애야 말로 하나님의 깊고 푸른 역사가 아닌가?

다윗에게는 망신, 민망함, 유구무언, 안절부절, 속수무책인 여기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깊고 푸른 역사이다.

(3) 다윗의 골리앗사건은 성경에서 한 번도 인용되지 않는다. 바울은 신자들을 박해하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딤전1:1~:2)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때 몰랐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은혜와 긍휼을 증거 하시기 위해 나를 만나셨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무지와 고난 밖에는 남는게 없다. 구약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시작되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 다윗이 있다. 굉장해 보이는가? 아브라함은 누구였나? 떠돌이였다. 다윗은? 죄인이었다.

(4)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우리가 가진 최선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진 사랑과 능력을 기어코 이루어 내고 말겠다는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한 책임, 부활로 반전 시킨 하나님의 권능, 우리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여러분은 나단이 되어 큰소리치는 자리에 있지 않다. 드고야의 여인처럼 평범한 여인을 매일 만난다. 그 사람의 절망과 회한과 분노를 깨고 희망을, 구원을, 십자가가 가지는 반전을 증언해야만 한다. 그리고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고 그들을 살리시며 십자가로 세운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인류 역사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3. 에필로그

(1) 언젠가 설교에서 박목사님께서 하나님의 깊고 푸른 역사를 말씀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깊고 푸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라고 하셨다. 그랬다 깊고 푸른 역사라는 말이 나에게는 보기에 좋은 단어로만 허공에 둥둥 떠다니다가 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이었다.

(2) 이번 주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깊고 푸른 역사에 대한 의미가 더욱 깊어 졌다 나는 이 말이 하나님의 깊음을, 신실하심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번 주 설교에서는 그 단어의 대상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왔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우리의 현장,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우리 각자의 삶이야말로 깊고 푸른 역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박목사님은 묻고 계셨다.

(3) 당신은 여러 가지 반응을 할 수 있다. 네 목사님 맞습니다. 아멘. (약간 믿음이 있는 범생이 집사) 아, 목사님 정말 그렇군요,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비교적 봉사도 잘하는 김모 안수집사) 그는 눈물이 글썽하다. 목사님 그렇게 살게요. 제 손을 꼭 좀 잡아주세요. (새 신자 교육 후 새 신자 환영회에 참석한 어떤 성도)

(4) 가자, 두 번이야 죽겠냐? 그 깊고 그 푸른 하나님의 품안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