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28) (삼하12:20~25)

2017. 12. 24(일)
박 영 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소망회에 가면 일흔 살이 되신 어르신도 신입생처럼 새내기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조금은 의외였다. 이해는 간다. 소망회에는 여든이 넘으신 어르신들도 많이 계시니까.

(2) 손자가 셋이나 있으니 나도 나이를 좀 먹은 건 아닌가, 그건 아니 구 나 라고 생각하면 즉시 자세를 바로하고 졸병다운 차렷 자세로 들어간다.

(3) 금년 가을과 겨울에 많이 아팠다. 권사회 최정숙 권사님이 내 기도 담당 권사님이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소식을 물어 오시는데, 아프다는 말이 참 하기 싫다. 그러나 금년에는 권사님의 열심과 정성을 소홀히 할 수가 없어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치료중이라는 얘기를 상세히 알려드렸다.

(4) 12/5(화)에 신촌 세브란스에 입원해서 경동맥 수술을 받고 12/8(금)에 퇴원해서 집에 있다가 12/10(일)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어찌나 눈물이 흐르는지 초등3부 선생님들을 다 울리고 엉금엉금 기어 본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 다시 기어서 집에 들어왔다. 이날 나를 부축해 주시고 붙잡아 주신 집사님들과 특히 계단에서 내 가방을 대신 들어주신 권사님께 감사드린다. 뭐냐, 도대체! 나는 언제나 병약하고 수술로 연명하는 인생이냐?

2. 설교내용

가. 다윗의 회개

(1) 마1:6에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윗에게는 말할 수 없는 치욕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 자체가 수치일 수는 없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도 수치는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밧세바 사건을 다시 보게 한다. 여기에는 죽음이 있으며 동시에 부활이 있다. 이 모순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2) (시51:10~:17) 시51편에 의하면 다윗의 회개는 한 범죄의 회개가 아니라 존재론적 회개였다. 나는 늘 잘못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십시요가 아니라 구원해 주십시요 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용서를 구하고 각오를 피력하지 않는다. 구원과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기적인가? 죄만 짓는 사람인 자신을 고쳐서 하나님의 의와 기쁨에 참여 하는 사람을 만들어 주시옵소서라는 기적이다.

(3) 우리의 회개는 이번일 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쉽게 우리를 의의 길과 거룩한 길로 인도 하시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의 회개는 쳇바퀴를 돌고 우리의 구원은 기쁨과 소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는 첫째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회개와 구원과 승리를 담는다는 역설을 증언하고 있다.

(4)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승리, 명예, 영광을 우리 자신에게 담겠다고 하신다. 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죄밖에 짓지 못하는 죄인인데 하나님은 지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자리에서 거룩한 자리로 정체성과 존재를 변신 시키신다.

(5) (시40:1~:8)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꺼내주신다. 하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라는 존재를 거기서 꺼내어 의와 진리와 생명으로 살게 하겠다는 것이 성경 말하는 구원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다.

(6) 하나님께서는 이 얘기를 다윗에게 이렇게 하셨다 .

“나는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밧세바 사건 전에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네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냐, 내가 너를 위해 너의 필요를 채운다 라고 하셨다. 즉, 우리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뒤 그에 합당한 명예와 영광을 요구하고 계신다.

(7)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금방 뛰어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받아 주소서, 나부터 은혜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나. 하나님이 하신일

(1) 다윗이 저지른 일과 하나님이 하신 일 사이에 있는 모순을 보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다윗아 너는 수도꼭지다. 수도꼭지는 틀면 물이 나오지만 수도꼭지가 생산한 것은 아니다. 다윗의 전반기 생애는 다윗의 수도꼭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 명예, 승리를 보내셨다. 이에 비해 사울은 수도꼭지를 잠가 놓았다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다.

(2)다윗도 밧세바 사건을 통해 자신의 수도관이 녹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윗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불륜이었으며 다윗의 충성은 배신이 되었다. 다윗은 말한다 하나님 저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만 수도꼭지였습니다. 녹물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너는 다만 수도꼭지여서는 안된다. 이것이 밧세바 사건이다. 수도꼭지가 늘 정결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다윗에게 나와 함께 일하자 라고 하신다. 여기서 다윗의 전반기 생애는 한 차원 올라가게 된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삶이 한 차원 올라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다.

(3) (마13:1~:17) 이 비유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르고 만들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셨다. 그래서 길가와 돌짝 밭에 불과한 황무지 같은 우리에게 열매와 꽃이 생기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며 꽃밭이 된 것이다. (사35:1~:10) 이사야 1장~39장 까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 한 복판에서 35장은 부활과 생명을 얘기 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뛰어난 복과 영광이 넘쳐날 것을 선언 하신다. 하나님은 이선언대로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셨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예언되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실현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 일에 산 증인이다.

다. 우리의 현실적인 어려움

(1) 우리의 어려움은 꽃은 피었는데 밭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돌짝 밭이고 가시 떨기가 많은데 거기에 백합화와 장미가 피어있다. 이사야 35장3절은 이러한 우리의 어려움을 격려한다. 너희는 이미 꽃이 되었다. 이것을 신약으로 설명하면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2)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는 한데 묶여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고 그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결국은 우리를 꽃이 활짝 피는 꽃밭을 만들겠다고 하시며 그 꽃밭이 되어 열매를 맺으라고 하지 않으시며 이미 맺힌 열매에 걸 맞는 밭이 되라고 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생애이며 운명이다.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잘못하면 잘못을 뒤집어엎어야 (회개해야) 열매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 결어

(1) 그 꽃과 그 열매가 맺힐 만한 밭으로 바뀌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며 우리는 생애 내내 바뀌어 간다.(롬6:1~:5) 기독교 신앙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왜 죄를 짓는가? 하나님은 왜 완벽하게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은혜로 되는 것이라면 왜 속을 썩고 살아야 하는가? 다윗은 밧세바 사건을 통해 아래와 같이 깨달았다.

1) 나는 생명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다.
2) 나에게는 명예가 없다.
3)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해 보지 않는 정도인데 차라리 나는 세상에 없 는 편이 최선이다.

이렇게 자책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솔로몬(여디디아-즉, 부활)를 주신다. 부활은 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가는 것이다. 비로서 의, 진리, 생명, 자랑, 감사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씨름하여 이 길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고, 분별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한다. 이것이 구원이 내 것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2) 우리가 아무것도 안한다면 우리는 다만 물건일 뿐이다. 무엇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무엇이 십자가의 길인가를 생각하라. 로안 윌리암스는 기도란 인간성의 자라남이라고 했다. 물론 이 때의 인간은 신자이다. 그러니 기도는 신자의 인간성이 자라나는 것이다.

3. 에필로그

(1) 내가 몸이 아프고 지치고 짜증이 나서 한 질문이거나 푸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12/24(일) 박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답을 하셨다. 다윗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시편에는 몇 곳 그리스도의 존재를 인지하는 듯한 글을 썼다. 그래도 다윗이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2) 박목사님은 뜻밖에도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 번째 아이의 죽음에서 부활의 기적을 찾아내신다.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부활의 단서를 찾아내신 것이다. 첫 번째 아이는 물론 죽었다. 다윗은 이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죄 밖에 짓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고백한다.

(3) 하나님은 이 고백을 들으신 뒤, 그래 너는 네 스스로 깨끗해 질 수는 없다. 그러니 이리와라 내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일하자 라고 하셨다. 다윗은 여기서 삶이 한 차원 올라가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함께 일 하자고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4) 나는 은근히 내 인생에 대해 하나님께서 승부를 결정지어 주시기를 기대했다. 더 많이 아파서 빨리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시든가, 아니면 이 땅에서의 형편을 좀 낫게 해주셔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누구에게 손을 내밀지는 않게 해주시든가 가부간에 결정을 해 주셨으면 했다.

(5) 하나님은 답 하셨다.

재철아, 살다보면 아픈 날이 있단다. 아픈 날은 지금처럼 병원에 와서 수술 받고 치료를 받으렴.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그 많은 시간동안 뭐 할래? 하나님에 대해서 또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분별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야지. 넌 지금 인생이란 그렇게 재미없는 것 인가요 하나님? 이렇게 물어보려고 하지? 아니란다.

내가 이미 준비 해놓은 영광스러운 너의 면류관도 이렇게 하루하루씩 자라는 중이란다. 그러니 하루라도 안자라면 나중에 그 면류관이 폼이 나겠니?

아, 나는 또 괜히 여쭈어 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