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에필로그(2) 엡 4:13~16
2016. 11. 27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 설교가 끝난 뒤 나는 박 목사님 방으로 가서 꾸벅 인사를 드렸다. ?목사님, 긴 시간 동안 이사야 설교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무엘 상에서 다시 뵈올께요?

20년 전 생각이 난다. 내가 13년 동안 다니던 임마누엘 교회를 떠난 뒤 나는 교회를 찾고 있었다. 집사람이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 얘기를 했다. 그래? 별 기대를 안 하고 주일 설교를 들었다.

히브리서 강해 설교하실 때였는데, 본문은 히브리서 6장 4절~6절까지였다. 종종 논쟁이 되는 구절, 한번 구원을 얻고 타락하면 다시 구원은 없다는 본문이었다.

솔직히 설교는 그저 그랬다. 목사님은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이 구절은 우리 신자들을 독려하기 위한 구절이지 구원이 취소되는 것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물론 같은 히브리서를 보아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구절은 많다. 히브리서 10장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설교가 끝나고 과감히 목사님을 만나러 갔다. 그때는 담임 목사님 방이 지금의 로비에 있었다. 나에게 순서를 기다리게 한 목사님이 또 계셨는데 나중에 보니 이대원 목사님이셨다.

?안녕하십니까? 어떤 목사님들은 오늘 본문을 근거로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 하시는데 목사님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시네요?

?무식해서 그렇지요?

박 목사님과 나는 이렇게 처음 만났다. 집사람은 박 목사님을 알고 있었다. 1979년부터 1984년경까지 우리는 반포2단지 신반포아파트(주공)에서 살았다.

그때 남서울교회를 다녔는데 나는 홍정길 목사님만 기억이 난다. 박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셨을 때 나는 중등부 교사였는데 대예배 시간과 겹쳐서 한 번도 만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집사람은 박 목사님을 욕 잘하는 성깔 있는 목회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2) 20년이 참 빨리 갔다. 세상적으로 나는 상처뿐인 인생이다. 계속 바보처럼 살아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누구에게 불평을 할 수도 없다 20년을 결산하면 나에게는 박 목사님의 딱 한마디만 남는다.

?하나님은 이 집사의 실패 속에도 무언가를 담고 계셔?

2. 내용

가 서론

(1) 본문은 신자들의 당연한 책임을 말하고 있다. 사랑, 성숙, 헌신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은 때로 우리에게 막막하게 들린다.

현실생활은 이 단어들로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러한 단어들은 어떠한 실제적인 내용으로 짜여 져 있는지를 알 수 없다면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나. 바울의 믿음

(1) (빌 1:20~26을 보자) 바울에게는 생명과 사망이 동일한 조건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는 일에도, 또는 죽는 일에도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담는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살면 고생하는 일을 더 보여줄 수 있으니 너희에게는 내가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한다.

(2) (롬 8:15~17을 보자)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영광이라는 운명, 고난이라는 현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은 외면하고 헌신, 충성, 열심, 보상, 승리라는 단어만을 엮어냈다.

뿐만 아니다. 영광도 자유에서 꽃이 핀다. 자유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이 다르다. 우리는 자유를 생각하면 방임을 생각하지만, 성경은 자유는 제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풍성하고 놀라운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3) (빌 3:10~12를 보자)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 속에서도 완성된다. 여기서 고난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본 헌신, 충성, 승리 같은 단어들에는 고난, 선택, 책임, 과정이라는 뜻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은 치열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실패하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이 길을 선택하라고 한다. 도전에 맞서라는 정도가 아니라 도전을 먼저 선택하라고 가르친다.

(4) (롬 6:3~4를 보자)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이것은 책임이 아니라 기회로 주어진다.

(롬 6:15~19를 보자) 전에는 우리가 죄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죄를 선택할 수도 있고 의나 선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이야 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명예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 선택은 고난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말한다.

마이클 샌달은 주장한다.

인류는 어느 시대에나 정의를 추구했지만 정의를 실현하지는 못했다. 정의는 법으로는 실현되지 못한다. 정의는 고급한 가치이기 때문에 법과 같은 강제력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가치는 도덕에서 나오고 도덕만이 자발적 적극적 가치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정의의 실패는 도덕의 실패로 보아야 한다.

성경에는 도덕을 상회하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적극적인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영광이다. 사랑을 실천하려면 자유, 즉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 각 개인의 선택, 결정, 책임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 자유로 하나님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인류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와 가치가 무산되었다.

이렇게 생명이 끊긴 인류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생명을 얻었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 욥의 인생 (욥기 38장)

(1) 욥의 질문에 하나님이 답하신다. 창조세계를 다시 보여주셨다.

창조된 것 중에 잘못된 것이 있느냐?
네 논리보다 아래에 있는 것이 있느냐?
이 창조세계에는 생명과 영광이 있지 않느냐?

(2)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 (42장) 욥은 말한다. 저는 티끌과 재 밖에 안 되는 존재이지만 이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잡겠습니다. 나는 못났지만 나는 순종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붙잡겠습니다.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붙잡겠습니다.

(3) 하박국도 하소연한다. 하나님 악한 자들 때문에 의인을 동일한 고난에 몰아넣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답하신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의인은 형통한 조건 속에서 살지 않는다. 의인은 보상으로 살지도 않는다. 의인은 능력으로 해결하면서 살지도 않는다. 의인은 감수하면서 산다.

하박국이 답한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라. 씨 뿌리는 비유

(1) (마 13:3~17을 보자) 이사야가 너희에게 보냄을 받은 것 같이 나도 그렇게 왔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이것이 모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이다.

이사야를 언급하신 것은 너희가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인용을 하시기 위함인데 곧 이어 너희가 모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2) 들어도 보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는 오셨다. 뿌려도 소용없는 길가와 돌짝밭과 가시덤불에도 씨는 뿌려진다. 듣고 보고 깨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오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창조가 그랬듯이 구원도 오셔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 밭을 만들려고 하신다. 가시덤불이 여전히 있지만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씨를 열매로 결실해야 한다.

꽃밭은 꽃 때문에 꽃밭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씨의 영광과 밭의 영광이 함께 만나 이루는 결과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다.

3. 결어

(1) 우리는 돌짝밭이거나 가시덤불일 수 있다. 예수가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일하시며 우리를 반응하게 하신다. 이렇게 살아난 영을 성령께서 격려하신다.

씨(예수님)는 우리와 함께 꽃밭이 되기 위해 오셨다.

우리라는 존재는 담긴 내용에 의해 바뀐다. 이 일은 우리 생애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주로 실패하니까 이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패가 일을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자국은 완벽해지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광이요 자랑인 것이다.

(2) 우리의 실패도 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꽃밭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4. 에필로그

(1) 박 목사님은 이번 설교에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언젠가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인용하신 적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중략)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중략)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끝)

이 시는 목사님께서 고르신 것은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정호승의 시다. 설명은 각자의 몫이다.

(2) 박 목사님께 선뜻 가까이 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우리 교회에는 많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큰 이유는 목사님을 처음 보면 조금은 차갑게 보이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 당신도 손해셨고 우리들도 손해였다. 그러나 거기를 조금만 넘어가보라. 매우 따뜻하고 정이 많은 분이다.

감성 또한 풍부하셔서 냉철한 학문적 해석력과 별개로 시와도 많이 가까운 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