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48) 사 64:1~12
2016. 9. 18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창세기 설교를 듣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직접 만나 주셨다(창 12:1)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바울을 직접 만나 주셨다.(행 9:3∼9) 그리고 나서 그들의 인생행로는 180도로 바뀐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장래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이전해 갔으며 바울은 예수님을 극렬하게 핍박하던 자가 예수님을 가장 열심히 전도하는 자가 되었다.

(2) 우리들도 다 하나님이 만나 주셨기 때문에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는 말씀에서 걸렸다. 구원이라면 이해가 간다. 영적으로 시체였던 우리를 하나님은 먼저 살리시고 우리는 살아난 후에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제 나를 살려주셨는가 하는 것은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에겐 분명한 구원의 확신이 있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있다.

(3) 나는 후자다.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과 구원 받았다는 것이 꼭 일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구원의 경우 시차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면 그때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는 언제 예수님을 만났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는 아직 안 만났지 하는 것으로 혼자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4) 이 문제를 최근에 박 목사님께 여쭈어 볼 기회가 있었다. 아주 간단히 대답하셨다. 우리는 아직 부족한 존재들이라 그때 거기서 라는 답을 항상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온 생애를 걸고 답하실 때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특별히 필요한 경우 직접 만나 주실 때도 있지만 보통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통해 만나시며 길을 이끌어 주신다고 했다. 아, 진리는 참 단순하구나.

(5) 박 목사님께서 설교 때 하신 간증이 생각난다. 박 목사님의 평생 기도제목은 하나님 한번만 만나주십시오 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도제목이 너무 커서 응답이 늦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셨다. 박 목사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이제 저는 여기가 끝입니다 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 마치자마자 하나님께서 앞에 계셨다. 그리고 답을 하셨다. 아니야, 너의 길은 내가 이끌어.

(6) 삶이 어려우니까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러나 잠시 행복해진다. 정말 어려우면 하나님께서 한 번 만나주시겠지.

2. 내용

가 서론

(1) 사 63:15∼64:12까지는 선지자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올리는 회개의 기도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이 기도는 좀 모순적으로 보인다.

1) 이스라엘은 심판 받았다.(1장∼39장)
→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한 당연한 응보였다.

2) 희망이 없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40장∼55장)
→ 은혜가 책임을 극복한 것이다.

3) 은혜는 책임을 다시 요구한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56장 이후)

(2) 이것을 신앙의 발전 또는 신앙의 진전에 대한 이해 없이 읽으면 56장부터는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은혜를 입었으나 책임을 지키지 못하여 다시 꾸중을 듣는 이스라엘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56장 이후는 은혜가 한 일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가르쳐준다.

은혜가 임하기 전에 책임은 심판을 초래하는 조건과 자격이었다.

은혜가 임하자 책임에서의 실패가 어떻게 우리를 구했는가가 설명된다.

그렇지만 은혜는 책임을 면제하는 것도 무효가 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은혜가 책임을 다시 요구한다는 말에서 책임은 56장 이전과 이후가 다른 의미이다. 이전에는 짊어져야 할 두려운 것이었지만 이후에는 명예를 지키기 위한 기회와 자유인 것이다.

나. 은혜가 만든 자유

(1) 은혜는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신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준다. 우리의 회개가 다만,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라는 것을 넘어서서 은혜가 만든 자유가 무엇인지를 아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2) 그때 우리가 하는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죄를 원치 않고 거룩을 원합니다. 저에게 찾아 오사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실체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을 저는 원하고 제가 마땅히 선택해야 하는 길입니다.

(3)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둔 잘잘못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사함으로서의 정체성, 존재의 가치, 명예의 의미에 대한 소원을 가지게 된다.

다.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 (출 3:7∼15)

(1) 대화

하나님 : 너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

모세 : 하나님 무슨 일을 이렇게 하십니까? 40년 전에 제가 하자고 했을 때는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왜 이제 와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모든 가치와 승리와 시기와 내용은 내가 만든다. 네가 생각하는 경험과 이해와 만족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그것은 내 손에 있다 지금이 그때다. 너는 이제 가라.

모세 : 못 믿겠습니다.

하나님 : 나는 제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 : 그러면 왜 나한테는 그러셨습니까?

하나님 : 가라. 안가면 너를 죽일 것이다.

라. 모세의 성장

(1) 하나님께서는 왜 10가지 재앙을 나누어서 하셨을까?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단계적으로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가 하나님을 단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결국 10가지 재앙은 바로를 혼내기 위한 의미도 있었지만 모세를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2) 모세는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출 14:13∼14에서 드디어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가 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가 이 말을 하기까지 80년이 걸린 것이다.

(3) (출 32:1∼14) 이스라엘 백성이 송아지 형상을 만든 것은 다른 우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 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평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송아지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불렀다.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해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 하나님의 의도, 목적과는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4) 이 일로 극렬한 노를 발하신 하나님께 모세는 간청한다.

하나님 저를 오늘의 저로 만드시는데 80년이 걸리지 않으셨습니까? 이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행하신 일들을 모두 무효로 하시겠습니까?

모세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광야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돌이키신다.(출 32:14)

마.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

(1) (출 32:30) 하나님 우리는 실수합니다. 우리의 실패와 못난 것을 극복하게 해 주시지 않으려면 우리를 기계나 물건으로 만드시든가, 아니며 저를 생명책에서 빼 주십시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책임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기회를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가 납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2) (요 17:1∼5) 영생은 무한대의 존속이 아니다.

생명이 가지는 영광과 충만과 힘과 자랑이 영생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3) 피조물의 한계와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담으신 예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에서 구체화 하실 것, 그것이 영생이다.

그래서 영생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과 신분과 지위를 아는 것이다.

바. 영광스러운 지위

(1) (요 14:12∼14)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 가장 구체적인 증거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고단한 죄인들의 삶을 같이 살아내셨다. 그래서 타협, 시험, 유혹, 자폭이 하나님의 영광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2)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한번쯤은 생각해보라.

내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는 않았는가?

(3)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다.(출 32:30)

하나님 하나님을 하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안 하신다면 저도 자녀 안 하겠습니다.

(4)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다.(롬 9:3)

하나님 제 형제들(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제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형제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3. 결어

(1) 바울이 동족들을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이방인들을 위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우리의 속마음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우리를 묶어 놓으신다.

(2) 그러니 우리의 조건과 정황이 어떤가는 다음다음 문제다. 우리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할 수 있고 우리만이 하나님 창조와 통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

그 길을 가는가?
그 성육신의 길을 가는가?

4. 에필로그

(1) 박 목사님의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Tip이 있다. 목사님은 설교 도중에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서 강하고 큰소리로 말씀하시거나 반복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조금 정리가 어렵다. 한 번은 왜 그렇게 하시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한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균형을 잃기 쉬워?

(2) 이사야(48) 설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을 찾으시오 라고 문제를 낸다면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 왜 40년 동안 가만히 계셨습니까? 모든 가치와 승리와 시기와 내용은 내가 만든단다. 그건 네 생각이나 경험보다 훨씬 더 큰 거야.
둘째, 하나님 우리는 실수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안 도와주시려면 저를 차라리 기계로 만드십시오.

물론 설교는 전체를 듣고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말이다.

(3)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설교 도중 어떤 단어의 정의를 바람이 지나가듯 슬쩍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영생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영생은 무한대의 존속이 아니다.

그리고서는 영생이란 생명이 가지는 영광과 충만과 힘과 자랑이다 라고 설명하셨다.

(4) 이런 걸 안 놓치려면 집중할 수밖에 없나? 그러면 Tip은 없는 거네. 초저녁부터 밤12시가 다 되도록 설교를 다시 듣고 설교 때 했던 메모를 다시 보면서 말씀을 정리한 이 시간이 왜 이렇게 좋을까?

(5) 지지난주 목사님 방에서 나오면서 한 마디 어리광을 부렸다.

?목사님, 제가 책값하고 당구비 여유 있게 낼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세요. 목사님께서 그런 기도를 안 하시니까 제가 어렵답니다?

목사님께서 방문을 열고 방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정확히 한 방을 먹이셨다.

?내가 기도해서 그런 거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