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47) 사 63:1~19

2016. 9. 4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이사야(44)는 내가 초등3부 수련회를 다녀오느라 정리가 늦었다. 그런데 이사야(44)에서 나는 1차적, 2차적, 3차적 세계관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서 썼다. 목사님께 직접 드리지 못하고 사무실 직원을 통해서 드렸기 때문에 주일날(9/4) 목사님 방에 가서 정리한 부분을 읽었다. 본래 무식하면 용감해진다.

(2) 한 패라그래프를 읽고 어떠시냐고 여쭈어 보면 간단히 답을 주시곤 했는데 나는 계속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내가 잘못 알아듣거나 틀린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3) 목사님께 몇 가지 수정 의견을 들었지만 대체로 합격점을 받았다. 한 가지 보완하신 것이 있다. 3차적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창조세계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으로 정리했었는데, 개입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통치의 사역에 우리보고 동역자로 동참하라고 권유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2. 내용

가. 서론

(1) 63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질문하신다. 어째서 너희는 내게 동참하지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대답한다. 저희는 동참할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나님의 혈육 아닙니까?

(2) 이사야 55:12∼13을 보자. 신자에게는 허락된 구원이 있다. 이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은 영원하지만 기쁨은 계속되지 않는다.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3)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험이지만 오늘 우리의 경험이기도 하다.

나. 이 경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이사야 56장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고유하게 허락된 줄 알았던 안식일이 이방민족에도 허락이 되었다. 은혜를 한정시키고 있었던 안식일이 오히려 은혜가 되어 이방백성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로 주어졌다. 은혜가 책임을 연 것이다.

(2) 이사야 58장에서도 그렇다. 금식이란 마지못해 지키는 책임이 아니라 자유와 영광으로 이끄는 문이 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구원과 창조는 어떻게 열려 있는 것인가?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 계명은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는 이처럼 가두지 않고 마음껏 열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닫힌 것을 열어 주신다.(요일 4:18)

결국 신앙이란 소극적이고 두려운 잣대로 측정되는 책임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내는 자유이며 영광이다.(이사야 60장)

(4) 요 15:5∼16을 보자.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제한이며 속박인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순종이며 자유인 것이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사랑 안에 거하라.(내 계명 안에 거하라)

우리는 이 말씀에 부담을 느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죄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것은 나에게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내용을 공급하시기 위한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자유이며, 권리이며, 선택이며, 기회이다.

(5) 따라서 내안에 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과, 영광과, 생명에로의 초대인 것이다.

다. 우리의 특권

(1)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실되고 복되고, 맞는 방향으로 몰아 갈 것을 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영광으로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한다.

이 일에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쏟으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2) 우리가 은혜를 구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책임을 다 한다고 하면서 최소한의 폐쇄적인 공간에 자기를 둔 다음 그것으로 책임을 지켰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히 5:8)

(3)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이 휘두르는 폭력 속에서 하나님을 편들고 그것으로 고난을 감수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채워야 하며 하나님은 이것으로 인간의 내용을 담아내고 싶어 하신다.

(4) (마 13:18∼23) 우리라는 밭에 씨가 떨어지면 우리는 그 씨가 자라나도록 하여 꽃밭을 만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받아들여 꽃과 밭이 꽃밭이 되어 구체적인 실재로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원하신다.

(5) (고전 3:6∼9)을 보자. 우리가 자유를 얻어 어떤 일을 선택하지만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잘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실패와 낙심과 자책이 따라 다닌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성실이라는 귀한 선물을 은사로 받는다.

(6)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핵심은 자책과 실패에 있다 그 실패는 무엇을 낳는가?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며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울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책과 낙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7) 오늘 본문은 말한다.

아브라함은 도망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실지 기대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곳에서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라. 은혜란 무엇인가?

(1) 인생을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낙심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1차적 세계관에 머물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내가 잘못해서 이번 일이 이렇게 된 거야.

(2) 그러나 그건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말이다.

은혜란 해결이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네 인생 모두에 동참하시겠다는 약속이며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놓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3. 결어

(1)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내가 나임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며 내가 하는 모든 결정과 실패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2) 잘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오늘을 담대히 살아라. 너의 절망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부활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사소한 일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는 동안 너는 자라난다고 성경은 약속한다. 너는 그렇게 자라서 결국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4. 에필로그

(1) 지난주일(9/4) 우리 교회는 공동의회를 열어 박영선 목사님을 우리 교회의 원로목사님으로 추대하는 안건에 대해 투표를 했다. 성도님들 520명이 참여하여 찬성 514표(98.8%), 반대 6표로 안건은 통과되었다.

(2) 물론 나도 찬성했지만, 나는 박 목사님을 원로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싫다. 지병이 조금 있으시긴 하지만 주일날 강대상에 서신 박 목사님을 보라. 어떤 원로가 저렇게 힘찬 설교를 하실 수 있단 말인가?

아직까지 당구도 잘 치시고 테니스도 잘 치신다. 다만 손자들이 있어 할아버지라고 호칭이 붙을 뿐이다.

(3) 정말 우리는 박 목사님을 잘 모른다. 아니 박 목사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모른다. 아, 답답하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박 목사님의 입과 손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할 내용은 너무나도 많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이 작은 정리를 하는 것에 그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