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44) 사 60:1~9

2016. 7. 24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오늘 설교에서도 목사님은 다시 한 번 1차적, 2차적, 3차적 세계관을 언급하신다. 이 문제를 복잡하다고 피하면 은혜가 안 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각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세계관을 갖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며 이 문제는 곧바로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3) 정리해보면 1차적 세계관은 원칙과 심판이 핵심 내용이며, 2차적 세계관은 우리의 잘못을 조건 없이 회복시켜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어 있고, 3차적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물론 이번에 시리즈로 계속된 세계관 설교의 당사자는 이스라엘 민족이며 시기는 바벨론 포로와 귀환의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다. 이것을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보면 아래와 같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져서 나라는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포로로 붙잡혀갔다. 포로가 된 그들은 이 환란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1차적 세계관)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 극소수인 1~2명의 선지자만이 이 포로생활은 70년 만에 끝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이대로 페르시아에 흡수되어 세계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고 한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야말로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일이 벌어졌다.(시 126편) 자신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셨던 것이다.(2차적 세계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왔고 하나님께서는 귀환 후의 복되고 영광된 생활을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지쳐갔고 타락해갔으며 심지어 예배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하나님께서 제발 예배드리러 내 성전에 오지 말아라 라고 까지 말씀하시는 강력한 질책을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성경 표현을 빌리자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셔서 개입하셨다.(3차적 세계관) 이 개입은 역사 속에서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의 삶 속에서 이루셨다.

(4) 위와 같이 세계관을 정리하면, 그렇다면 모세 이후 바벨론 포로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1차적 세계관 속에서만 살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1차적 세계관으로 우선 살게 하셨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많은 잘못을 해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심판하셔서 멸망시키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행동과 상관없는 은혜를 하염없이 부어주셨던 것이 사실이다.(2차적 세계관) 뿐만 아니라 구약 내내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몰랐지만 각 사람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서 삶을 이끄셨다.(3차적 세계관)

이렇게 1차적 세계관이 먼저 있어야 2차적 세계관에 대한 눈을 뜨거나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2차적 세계관을 이해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3차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부분이야 말로 도움이 필요하며 우리가 박 목사님께 크게 도움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목사님의 설교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신 후 다시 우리에게 책임을 강요하시는가 라는 질문만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들었던 세계관에 대한 3번의 설교로 우리는 답을 얻었다.

(5) 위 세계관들은 각 사람의 인생에서 반드시 순차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순차적으로 이 계단을 밟는가 하면 어떤 이는 평생 1차적 세계관에 머무르기도 하며 어떤 이는 2차적 세계관까지는 도달했지만 거기서 머무르고 어떤 이는 3차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에게는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누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6) 창세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창조세계를 그냥 내버려 두신 적이 없다. 우리가 몰랐을 뿐. 그러니까 하나님께도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3차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에 직접 개입하셨고(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성령님을 통해 직접 개입하신다.(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에 직접 개입하셨다.

바울은 이 세계관을 이해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후 6:2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 도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바울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에 직접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주변사람들과 민족 전체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2. 내용

가. 서론

(1) 이스라엘은 1차적 세계관이 먼저 보였다. 자신들이 잘못했고 그 결과 멸망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공로 없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왔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1차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2) 그러나 돌아온 이스라엘은 다시 어려워졌고 인생에 대한 소망도 의지도 없이 하나님을 잊고 살게 된다. 과연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

이 질문은 당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질문이다.

나. 우리의 현실

(1) 우리는 이사야 59장에서 고난은 인생보다 믿음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았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지만 우리의 고난은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차적 세계관을 극복하고(2차적 세계관으로) 은혜를 주셨다면(심판을 내려 고난을 주시지 않고) 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은 고난보다 크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2) 그러다가 60장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한다.

롬 8:1~2을 보자. 인류의 현실은 죄와 사망의 법이 주관했고 하나님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오게 하셨다. 사망은 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은 사망에 종속된다. 세상은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덕목도 사망에 진다. 세상은 선이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다. 세상이 선을 행한다 해도 그것은 거짓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셨다.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가 잘못했다 해도 손해 보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것까지도 선으로 담아내신다.

(3) 예수를 믿는 가장 놀라운 기적은 우리가 잘못한 일에서도 하나님은 은혜를 담아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이긴 것도 사망에 종속되지만 우리는 실패한 것도 생명에 종속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현실에 다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혼란해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구원하셨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보류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아직도 죄와 사망의 법이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고난이다.

성경은 이것이 우리가 통과해야 할 필수과정이라고 한다.(롬 8:14~17)

다. 하나님의 방법

(1)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

하나님은 아직도 죄와 사망의 법이 권력을 쥐고 있는 세상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을 충만하게 하셔서 우리로 승리하게 하시고 영광으로 채워지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

(2) 롬 6:3~4, 롬6:15~19을 보자. 우리는 구원 받으면 죄와 사망의 법과 결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두 가지 법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뿐만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에 훨씬 더 많이 잡혀간다.

(3) 엡 4:17~24을 보자.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지만 우리는 죄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새 사람 속에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가? 요 8:31~43을 보자.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진리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자유가 생겼지만 하나님은 자유를 쉽게 선물로 주지 않고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신다.

즉, 세상이 궁극적인 권력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며 위협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을 살라고 하신다. 이 삶은 당연히 고난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라. 인문학적 관찰

(1) 아서 클라인만은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들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 일 없는 것 같이 두 세상을 사는 자기기만과 침묵은 모든 가치와 진실과 희망을 망친다?

인생을 체념하고 사는 사람들도 사는 동안만은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물며 우리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나님이 창조와 타락이라는 공존하는 두 가지 현실 속에서 우리를 타락에서 창조로 다시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준 자유로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도록 하신 것이다.

(2) 우리가 죄인일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신 것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어 우리가 사망과 고통과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조건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3) 예수님은 조롱과 폭력 속에서 죽는 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셨다. 이것은 우리를 대접하신 것이다. 내 뒤에 와서 숨어 라고 하시지 않고 나와 함께 가자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일어나라, 빛을 비추라 라는 말씀은 아래와 같은 뜻이다.(엡 5:8~21)

시간 속을 살아가라.
시간을 채워라.
모든 경우에 신자로서 대답하라.
서있는 자리에서 신자다운 행동과 역할을 하라.

3. 결어

(1) 도망가지 말라. 면책을 요구하지 말라. 마취주사를 맞지 말라. 깨어있어서 당해야 할 것들을 당하라.

(2) 하고 싶은 만큼 하지 못하는 실력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울어라. 매 순간이 너를 자랑하게 하라. 세상을 경험하여 실력이 되게 하라.

(3) 이렇게 하면 우리는 찬송, 감사, 복종으로 가게 된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이란 책에서 다시 얘기한다.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계의 무게를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극복하고 초월할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각각의 결함은 삶의 의미와 질서를 가져오는 전투를 벌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실패에 존엄성이 부여 된다?

(4)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운명과 영광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신다.

종말론적인 인생의 역순 속에서 살아봐라. 져도 끝나지 않으며 실패가 끝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빛으로 살아봐라.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책임이며 현실이다.

4. 에필로그

(1) 가끔 어떤 사람들은 박 목사님의 설교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고 말을 한다. 단언하지만 그것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한 자리에 계신다. 그 모습을 박 목사님은 여러 각도에서, 여러 측면에서 보고 은혜를 받으시며 그 받은 은혜를 우리와 나누신다.

(2)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자주 등장하는 예화(특히 벤허가 그렇다)를 듣고 내용이 비슷하다고 말하면 정말 착각이다. 잘 들어보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 시길래 저렇게까지 박 목사님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가.

(3)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 큰 복이라고 깨닫는 다면 당신은 반은 왔다. 끝.[/fusion_t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