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46) 사 62:1~12
2016. 8. 21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 목사님 설교 중 7/24(일) 설교는 초등3부 수련회 때문에 듣지 못해서 CD로 듣는 중이고 8/7(일) 설교는 예배에 참석했지만 요즘 너무 더워서 정리를 못했다. 빨리 해야 될 텐데.

(2) 8/21(일) 설교 중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왜 여기서 아무도 아멘을 안 하는 거죠? 그때는 대답을 못했지만, 지금 답을 드리면 너무 필기하기에 바빠서 못했습니다. 이날은 너무 내용이 중요한데다가 은혜가 넘쳐서 정말 죽기 살기로 받아썼다. 그러다가 아멘 할 타임을 놓쳤다. 예배가 끝난 후 친한 집사님들을 만났는데 그러신다. 아멘을 한 사람만 하는데 그 사람이 안하니까 전체가 야단을 맞았어요.

(3) 요즘 내 주변엔 나를 포함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뿐이다. 하긴 어렵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내 사정이 지금보다는 나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요즘 내 싸움은 한 가지다. 예배 때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게 하는 가이다. 말씀을 들을 땐 살 것 같고 길이 보이는데 본당 문을 나와 2층 계단을 내려서서 교회 마당에 서는 순간 다시 세상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2. 내용
(1) 오늘 본문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고난 속에서 주시는 율법은 어떻게 지키는가이다. 답을 먼저 한다면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꾸중, 위로, 회복과 우리의 의심 그리고 다시 확인되는 우리의 운명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2) 따라서 우리는 그 약속의 바탕 위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가. 태초에 예정된 우리의 운명

(1) 이미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의 운명은 태초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이 운명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구체화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책임과 반응 이전에 우리의 운명을 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영광의 내용을 우리로 삼으셨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려는 영광의 본질인 것이다.

(2) 이렇게 이미 영광스러운 우리에게 시간, 과정, 경험을 주시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조건 없는 승리를 주셨지만 왜 우리의 책임은 면제시켜 주시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따른다.

(3)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책임을 요구한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실패해서 은혜가 왔는데 다시 책임을 물으신다면 과연 은혜란 무엇이란 말인가?

(4) (롬 8:1~2) 로마서에서 우리를 영광의 내용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또한 폐기되어야 할 우리의 책임은 왜 다시 살아나는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은 생명과 존재에 대한 무한정의 긍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사망을 제거하고 승리를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시며 그것을 그 속에서 누리도록 요구하신다.

우리의 책임은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5) (엡 5:22~25) 복종이란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손을 들어 햇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남편을 준 것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이다. 복종이란 단어는 거기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 기쁨이고 감사라는 것을 누리는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왜 어려운 것일까? 그런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세상의 권력구조 속에서 우리가 이겨낼 것을 요구하신다.

(6) 우리 모두가 겪는 실수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왜 내가 그 행동을 했을까 라고 자신을 한탄한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만드는 끝을 아는 모험이다.

여기서 우리의 죄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도 당장 이런 질문을 쏟아낸다. 왜 이런 조건 속에서 하시는가? (왜 모험을 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대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조정이 가능한 다만 피조물로 보시지 않고 우리를 사랑과 믿음을 나눌 대상으로 보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자유란 영광의 찬송이 되는 길을 마음껏 선택하는 기회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오해한다. 마치 이 자유가 우리가 죄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권을 갖는 자유로 오해한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이미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있다. 그러니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봐라. 해보고 싶은 만큼 해봐라. 하는 만큼 너의 영광이며 너의 특권이다.

나.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

(1)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그래서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해 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딴죽을 걸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진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털고 일어나라. 멋있어져라. 네가 매번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너는 매 사건을 통해서 크고 있단다.

(2) (요일 4:10~15)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권리를 주며 우리를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동역자로 만들어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묶는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사랑은 윤리적 책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유대를 말한다.

다. 하나님의 넉넉하심

(1) (요 15:7~16) 아이에게 공부 잘해라 하는 것은 경쟁에서 이겨라 하는 부담을 주지만 생각해보면 공부는 명예로운 기회이고 특권이며 하나님의 허락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네 뜻대로 살아보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굉장한 것이다. 결정권을 우리에게 넘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다. 열매가 가지에 맺히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결정한 일이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2)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다시 얘기해 보자.

땅에는 씨가 떨어져야 한다. 그리고 좋은 열매가 맺히면 그 땅은 좋은 땅으로 증명이 된다. 씨로 인해 땅이 명예를 얻는다. 땅에 꽃씨가 떨어져서 꽃밭이 되면 밭이 영광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심겨지면 우리라는 밭은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된다.

(3) (엡 3:14~21) 20절 말씀을 보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이 말씀은 어떤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느껴지는가?

3. 결어

(1) 우리의 죄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한다. 잘못된 결과에 대하여는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부인하면서 왜 이런 길을 주시는가 라고 반문한다.

(2) 하나님은 답하신다. 태초에 너의 운명을 이미 정한 것도 나이고 너에게 생명을 준 것도 나이며 네가 마음껏 네 인생을 살아보라고 자유를 준 것도 나다. 뿐만 아니라 네가 원하면 더한 것도 줄 수 있다. 그러니 네 인생을 너의 두 손과 두 발로 살아내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4. 에필로그

(1) 목사님 말씀을 잠시 흉내 내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무한한 긍정이다.

(2) 처음에 잠깐 얘기했지만 요즘 내 형편은 많이 힘들다. 그래서 시편 기자처럼 늘 두리번거린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도움은 쉽게 오지 않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 나는 정말 하나님 말씀이 좋다. 아니 그 말씀 이외에는 위로가 되는 일이 없다.

(3) 박 목사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에게 와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신다. 어려울 때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로 달다. 정말로 쉼을 준다. 내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 이 말씀들이 이렇게 은혜가 되었을까?

(4)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의 은혜를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아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