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45) 사 61:1~11
2016. 8. 7 (일)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 목사님께서 7/27(수)에 전화를 주셨다. 어디 아퍼? 아닙니다, 목사님. 대답하는 순간 왜 전화를 하셨는지를 알아냈다. 7/24(일) 대예배를 빠졌기 때문이었다. 초등3부 수련회에 갔었다.

(2)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기 때문에 목사님께서는 병약한 내가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감사하고도 죄송했다. 건강해져서 이런 걱정을 안 하시도록 해드려야 할 텐데.

(3) 언젠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목사님은 나를 고수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고수라니? 목사님이야 말로 당구를 1000점이나 치시는 고수 아니신가? 목사님께서는 창하는 사람 옆에 앉아서 장구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 고수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남포교회의 대예배 때 아멘 소리를 듣는 것은 그야말로 가물에 콩나기다. 정말 우리 교회는 아멘을 안 한다. 남포교회에 온지 꼭 20년이 되는데 나는 처음에 올 때부터 아멘을 했다. 믿음이 엄청 좋았던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전에 다니던 교회가 감리교회였는데 예배 한 번에 몇 십번의 힘찬 아멘 소리가 버릇이 되어 있던 교회였다. 나는 그 교회의 신실한 권사였다.

남포교회 대예배 중 나는 큰소리로 아멘을 한 번 내지 두 번 한다. 내 아멘의 뜻은 ?알아들었습니다?이다. 목사님께서는 황무지에서 들려오는 아멘 소리를 들으시고 나를 고수라고 여겨 주신 것이다.

2. 내용

가. 서론

(1)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으며 지금도 세상은 교회에게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보이라고 한다. 우리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세상이 알지 못할 뿐이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를 못 알아본 이유는, 눈먼 자를 뜨게 할 때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메시아는 설명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존재 자체가 설명을 대신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성은 이를 거부했다.

(3) 근대에 와서 계몽주의는 메시아에 대한 많은 공격을 했다. 예수가 메시아답지 않다거나, 예수라면 정치적 능력이 있거나, 보통사람보다 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는 죽어버리지 않았느냐, 그래서 예수의 실체는 성경이 부풀려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등의 공격을 했다.

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1) 예수님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지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왜 그러냐?(이 질문은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우리들보다는 좀 더 나아야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우리들의 답은 분명하다. 우리도 모른다.

(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미 없어 보이는 질문과 대답을 왜 지금까지 반복되게 하셨는가?

1차적 세계관은 원칙과 심판의 세계였다.

2차적 세계관은 잘못을 조건 없이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의 세계였다.

3차적 세계관은 은혜가 만사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세계를 의미한다.

(3) 이미 얘기했지만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현실은 찬양과 기쁨으로만 가득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우리들은 질문한다. 그렇다면 이 구원은 무슨 뜻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답하신다. 구원이란 고난이다.

(히 5:8)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구원을 쉽게 허락하시지 않는다. 고난의 자리에서 그 삶을 담아 우리의 모든 잘못을 겪게 하시는 방법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그러면서 그 삶 속에 직접 들어오신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 중 3차적 세계관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1) 위와 같은 설명을 들어도 우리의 질문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이 맞는다고 해도 왜 고난이 지속되어야 합니까?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뻔하다. 믿음은 취소되지 않고 현실에서 고난은 길기 때문에 우리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 긴 고난의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아간다.

(2) 구원은 자유로 설명된다.(요 8:31) 2차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 자유를 주고 권리를 주었다. 결국 자유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세상은 이 같은 명예로운 선택권이 없다. 우리만이 거룩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적대적 세력이 있는 곳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으며 이 어려움이 우리를 계속 붙들고 있다.

(3) (행 3:1~10)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잡혀간다. 이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는 잘 안하고 어쩌다 한 후에는 괜히 했다고 후회한다.

(녹 5:33~39) 자신의 인생을 책임질 능력이 없으면 사람은 거칠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진리)을 심으신다.

(4) 세상은 세상의 일을 하고 예수는 예수의 일을 한다. 그러면서 예수는 말씀한다. 네 인생과 네 믿음을 일상 속에서 하나씩 펼쳐 보아라. 매우 명예로운 일이다.

우리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자책하지 마라. 그 길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의 죄성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본성적으로 우리를 방어하려고 한다.

나, 만만치 않은 사람이야. 조심해. 물릴 수 있어.

우리는 하루빨리 아래와 같은 수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세상에서 지도록 하는 방법을 쓰실까?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경험으로 알게 된다. 질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세상에서는 이긴 것으로 모든 것이 덮어진다. 진 사람은 할 얘기가 많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 길을 그냥 가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이 길을 우리와 함께 가시겠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 도전 받는 것은 오늘 반응하라.

3. 결어

(1)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엄청난 일이 아니다.

웃어라.
예의를 지켜라.
상대방을 존중해라.
눈빛을 좋게 해라.
먼저 경멸하는 눈빛을 갖지 말라.
눈빛에 기쁨을 담아라.

(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정하신다. 이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네가 직접 해라 라고 명령하신다.

(3)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지 않는다.(스탠리)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온 우주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와 실패가 예수의 구원 사역 안에 담겨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통치가 못 미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 속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의심한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에 자책한다.

당신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것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것까지도 다 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당신이 한 것만큼 당신의 자랑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는 우리의 능력과 자랑과 명예와 감사가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에필로그

(1) 거의 두 달 동안 목사님께서는 1차, 2차, 3차적 세계관을 설교하셨다. 어떤 사람 얘기를 들으니 1차, 2차, 3차 얘기가 나오면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다고 한다. 이해가 간다.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 그렇다는 것은 박 목사님께서도 알고 계신다. 목사님은 이렇게 애기하신다.

?이 길은 아무도 안 가본 길을 내가 처음 가는 것이어서 나도 물어물어 가거나 더듬어서 가는 거지. 그리고 이 길에 있는 용어들이 교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더 어렵게 들리겠지. 그러나 누군가는 이 길을 가야해. 그래야 길이 나고 그 길로 내 후학들이 올 수 있으니까?

(3) 우리가 남포교회의 교인인 것이 자랑일 수는 없다. 그러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자랑은 없다. 다만 눈물 흘리는 감사가 있을 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