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씨름선수의 신비

2015. 11. 1 (일) 이사야(25) 사44:1∼8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요즘은 박목사님 설교를 한 주만 못 들어도 한 달에 한 번 밖에는 설교를 못 듣게 된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설교를 들었는데 무슨 소리인가 라고 물으려는가? 당신은 이걸 모르기 때문이다. 박목사님 설교를 정신 차리고 들어보라. 목사님의 설교는 분명히 진화한다. 다윈의 이론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풍성한 은혜 속에 말씀이 깊어지고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당신은 31년째에도 32년째에도 박목사님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싶어 할 것이며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2) 이 설교도 그런 맥락 중의 한 편이다. 이 설교에서 핵심으로 예화를 드신 것이 얍복나루의 야곱인데 수없이 언급했던 그 야곱에 대한 얘기가 또 다시 진화했다.

2. 설교 내용

가. 하나님의 예정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시간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운명과 온 인류의 운명을 주관하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다.

(2) 그렇다면 이렇게 모순 덩어리인 이 역사와 이 현실은 무엇인가? (글쓴이 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이 질문 몇 주 전에도 하셨고 답을 하셨는데 왜 다시 이 질문을 하시는 걸까? 혹시 이 질문을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셨나? 라고 설교 시간에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30분이 채 안 돼서 성급했다는 자기반성으로 끝났다)

(3) 그 답은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는 물론 폭력과 강제력이 아닌 사랑의 바탕을 둔 것이다. 이렇게 허락하신 자유야 말로 인간이 지니는 독특한 지위이다. (글쓴이 주: 이 말씀 속에는 인간은 자유라는 것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자유라는 것은 창조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4) 하나님은 인간에게 왜 이런 지위를 주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할 때 누가는 누구를 반드시 예우한다. 하나님은 정성껏 우리에게 예를 갖추셨지만 우리가 받은 자유는 무지로 흘렀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충돌했다.

(5) (창세기 28:10∼15) 이 본문이야말로 하나님의 작정과 야곱의 자유가 공존한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먼저 약속하시면서도 야곱에게는 네 마음대로 가보라, 나는 네가 가는데 까지 함께 가겠다 라고 하신다.

나. 야곱의 선택

(1) 야곱은 평생을 약탈자로 살았다.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나 얍복나루 앞에 앉았을 때 그는 드디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2) 야곱은 그날 저녁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뭔가? 답이 없었다. 야곱은 다시 물었다. 나는 뭔가? 역시 답이 없었다.

(3) 인문학의 장점이 많다. 그렇지만 인문학은 텍스트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인문학은 컨텍스트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줌으로써 우리는 텍스트까지 나가 보려고 발버둥 친다.

(4) 역사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본문(텍스트)이 없으면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함께 같이 살 능력도 없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정당한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는 항상 이렇게 요구한다. 당신은 왜 나와 같지 않은가? 불행은 상대도 똑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생긴다.

(5) 인문학의 공로는 결국 인간은 거대한 갈망이 있지만 그 갈망의 정체성은 모르겠다는 것을 밝힌 것이지만 인문학은 스스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공포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공포가 텍스트라고 주장한다.

(6) 하나님 없이 인간의 정체성은 없다. 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 하나님의 예정

(1) 우리의 방황과 하나님의 신실함은 항상 어떤 결과를 만든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했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다. 야곱은 골반 뼈가 부러진 후에야 돌아선다.

(2) 이것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이것은 공포나 각성이 아니다. 이것은 창조다. 내가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3) 여기서 우리는 기적을 목격한다.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상대를 밀어내던 씨름선수가 이번에는 그 상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 된다. 이 신비를 알겠는가?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사람들이지만 각자가 어떻게 결과에 이르는가 하는 것은 다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런 씨름을 요구하시며 기적을 만드시는 씨름선수로 우리 앞에 서 계신다.

라. 십자가의 증거

(1) (빌2:5∼11) 이 본문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는 공존한다. 인간은 계속 반복되는 배신을 하지만 하나님은 지고 지고 또 지신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2) 십자가는 우리가 한 모든 행위의 궁극적 결과이다. 사망뿐이었다. 그 사망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로 나를 선택하라고 하신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 하나님은 고통스럽게 우리를 기다리신다.(글쓴이 주: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지만 성화에 나오는 인자한 모습으로 웃으시면서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걸로 지금까지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능멸까지도 참으신다. 결국 하나님은 나에게 보여지는 결과를 원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만을 원하신다.

3. 결어

(1) 우리는 잘못을 반복한다. 그러나 잘못까지도 우리의 기회가 되며 이 기회는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어 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2) 다만 한 가지, 우리의 정체성은 죽음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이긴다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