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1) 토요일 아침이었다. 보통은 아침 일찍 현관문을 열고 아침 신문을 들여오지만 토요일은 조금 느긋하게 신문을 본다. 다른 휴식이 별로 없는 내 스스로가 나에게 주는 작은 여유일까?

(2) 신문을 잡은 손 너머로 또 하나의 인쇄물이 보였다. 뭐지? 선전물인가? 인쇄물은 만민뉴스였다. 아, 이재록 목사의 만민중앙교회. 잘은 모르지만 정통 교단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 정도였다. 만민뉴스는 만민중앙교회의 소식지였다. 가끔 다른 교회 소식지가 오지만 만민뉴스는 처음이었다. 버릴까 하는데, 표지의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성경암송, 영혼이 잘되는 축복의 지름길!

버리기 직전에 멈춰 대충 읽어보니 이 교회는 매년 말씀퀴즈 대회를 하는데 성경암송은 신앙성장에도 큰 도움이 되고 영혼이 잘되며 물질의 축복이 넘친다는 것이 요지였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3) 한 장을 넘겨보니 이재록 목사의 설교가 게재되어있었다 소식지의 발간일이 9/20(일)이니까 설교는 아마 9/13(주일)이나 9/6(주일)에 한 것인가 보다. 설교 제목은 변함없는 마음이었고 본문은 고전 13:13 이었다.(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어떤 내용인가, 읽어보고 싶어졌다.

(4) 설교 중 소제목 1번의 제목은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되 변함없이 사랑하는 마음. 내용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넘치는 사랑을 주시며 건강이나 물질 어떤 마음의 소원도 품은 대로 응답하시며 큰 권능도 행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5) 2번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 역시 쉽게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고난 앞에서도 사랑과 신뢰가 변함이 없는 성숙한 아비의 신앙을 원하시며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하시며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신다는 것이었다.

(6) 위 두 가지 소제목과 그 내용은 무슨 틀린 내용이 있는가? 어디 성경 말씀과 다른 부분이 있는가? 없다.

2. 본론
(1) 나는 지난 20년 동안 거의 매주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살아왔다. 주일날 설교를 듣는 것 이외에도 주중에 녹음된 테이프를 다시 듣거나 CD를 들었지만 4∼5년 전부터는 강의 시간처럼 필기를 시작했다.

(2) 필기의 좋은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진중할 수 있고 집에 와서 복습할 수 있고 들어서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을 저장해주기 때문이다.

(3) 박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가? 물론 없다. 그래도 무리해서 꼭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이런 거다. 신앙이 좋은가? 그럼 표정도 좋아야 한다. 표정이 좋아야 한다는 걸 무슨 설교시간에 얘기하느냐고 묻는가? 윤리시간에 할 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가?

(4) 나는 앞서 언급한 이재록 목사의 설교를 읽을 때 정말 그런 강한 생각이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내용은 설교라기보다는 도덕 강좌에 가까웠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 생각에는 신앙의 얘기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공공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사회가 밝아지고 살기 좋아진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도덕 강좌에 가깝다. 기독교 신앙은 이와는 다른 것이다.

(5) 신앙은 도덕이 아니다. 신앙은 도덕과는 비교될 수 없는 본질의 세계이다. 높은 도덕심을 가지고 높은 경지의 선을 보여주며 인격이 훌륭한 사람도 얼마든지 신앙인이 아닐 수 있다. 신앙은 도덕은 넘을 수 없는, 도덕은 생산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6) 이 신앙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주시고 누구에게는 안 주시는가? 모른다. 우리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그러시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앙이 주는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천만다행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7) 그럼 도덕은 무엇일까? 신앙인은 높은 도덕을 가지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애써야 한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인이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할 일이다.

(8) 그러나 제가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신앙인이 그런 도덕 수준에 이르지 못해도 신앙인의 생명은 없어지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저런 파렴치한 인간이 구원을 받은 신앙인이란 말인가? 그렇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9) 신앙인이란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생명을 주신 분 앞에서 명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분은 사랑하기에 그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다. 그 분을 사랑하면 그 분이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라는 생각은 분명히 본말이 전도된 생각이다. 그 분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그 분을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3. 남포교회의 교인으로 산다는 것

(1) 남포교회의 교인으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첫째, 주일마다 듣는 박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쉽지 않다. 생각해야 되고 고민해야 된다. 어떤 날은 결론이 뭔지도 잘 모르는 날도 많다.

둘째, 어떤 삶의 공식을 주시지 않는다. 새벽기도를 해, 신앙이 자랄거야. 십일조 잘해, 물질 축복 받을 거야. 뭐 이렇게 안하신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너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생각을 해라, 생각을.

셋째, 지금 네 처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최상의 상태다. 그러니 불만을 말하지 말아라.

넷째, 네 운명은 어차피 승리로 정해져 있다. 그러니 지금 고생은 기쁘게 생각해라.
늘 듣는 얘기는 이런 얘기인데 현실은 눈만 뜨면 어려운 일 뿐이다. 아니 이거 내 인생은 왜 이래? (답이 들려온다) 그게 최선의 삶이란다. 아이구, 내 팔자야! 믿는 사람이 팔자라니, 하나님 뜻이야.

여기서 우리는 미쳐간다. 머리에는 쥐가 난다. 이 딜레마를 아는가? 이 딜레마에서 오는 고통을 아는가?

(2) T.S. Eliot 는 그의 대 서사시 황무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4월이 왜 가장 잔인한 달이냐구? 모든 생명체는 새로운 생명을 움틔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데 인간인 나만 이렇게 뒤처져 있으니 이 얼마나 잔인한 달인가?

(3) 차라리 우리가 박목사님 설교를 듣지 않았으면 모르겠다. 들은 건 있고 몸과 마음은 따라주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4) 이것만 해도 죽겠는데 박목사님 설교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가 있는데 이것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아! 절망이다.

4. 결어

(1) 상황이 이렇게 어려운데 나는 왜 남포교회의 교인으로 계속 살아가려는 것일까?

(2) 적지 않은 나이까지 살아왔어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데 무엇을 더 견디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3) 이런 답답한 심정으로 오늘도 성전에 왔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아멘을 큰소리로 외쳤다. 갑자기 하늘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이 들린다.

“왜 이 한 사람만?”

(4) 결론으로 박목사님의 설교 한 부분은 인용한다.

“역사 속에서 이미 완성하신 구원이 각 개인에게 구체화되도록 현실화 시키십니다. 사람마다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 없이 살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과 세상이 만들어 내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보며,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영광과 궁극적 목적을 예수 안에서 확인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다시 보는 로마서 43편 666쪽)”

(5) 그렇다. 나에겐 아직 답이 없다. 그러나 나는 답을 안다. 그렇기에 오늘도 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간다. 박목사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슴에 안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