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하나님의 비전(22) 사 41:1-10

박영선 목사

1. 들어가는 글

(1) 박목사님 설교는 어렵다. 어떤 날은 오늘은 무슨 말씀을 전하시려는 걸까 라는 생각을 설교 내내 하다가 끝나기 5분쯤 전에 아하, 이 말씀이셨구나 하고 머리에 반딧불이 켜지는 때가 많았다. 9/20(일) 설교도 그랬다. 그래서 설교 내용을 요약하고 반딧불 빛을 같이 나누고자 한다.

2. 설교 내용

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

(1) 역사는 갑작스러운 파탄이나 결말을 맞는다. 이러한 결말은 너무 여러 번 반복되어서 우리는 그렇게 역사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의 멸망과 비극을 보게 하시는가? 본문에서 야곱이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것은 인생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것은 인간을 이길 수 없어서 그 인간에게 오히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의 멸망과 비극을 보게 하신다.
나. 하나님은 왜 벧엘에서는 복을 주시지 않았는가?

(1) 야곱의 도망 길에서 하나님은 승리를 예표하시고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벧엘이라는 이름과 장소를 허락하셨다. 복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시지만 그 복을 받는 것은 야곱이 얍복나루를 건널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2) 야곱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인간의 역사는 단순치 않음을 바로 알 수 있는데 과연 누가 세계 역사에 바른 내용을 담아낼 수 있으며 역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고(예수님을 역사 속에 내용으로 담으셨고) 십자가의 사건을 이루셨으며 우리 각 사람은 각자의 생애를 통해 십자가 사건을 납득하고 이해해간다. 인간의 역사는 답이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했을 때부터 준비되어 우리를 채워 나간다.

(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없이 사는 게 어떤 것인가를 명백히 보이신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죄일까?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좋아지기 위해 격어야 할 필수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은 거짓뿐이며, 인간은 이겨서도 가져서도 편안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을 약속하시지만 그 복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을 겪게 하시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밀고 나가시는 방법이다.

다. 하나님의 방법

(1) 결국 세월은 가고 우리는 체념으로만 평화를 얻는다. 그 체념은 우리를 무능하거나 바보로 만드는가? 아니다. 그 체념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외에는 사랑과 믿음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문장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 분의 진정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창조가 가능했던 것이다.

(2) 이렇게 사랑과 믿음이 예수님 없이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우리가 현실에 부딪힐 때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어리석은 대응을 한다. 즉, 일상에서 우리는 늘 우리의 성실과 노력이 세상에서 통하지 못했다 라고 자책한다. 그리고 이 원인을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는 매주 교회에 나와 이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회개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필수적으로 겪게 하시는 과정일 뿐이다.

(3)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서는 시간 순서가 흔히 바뀐다. 마치 인생에서도 자식 때문에 부모가 어떤 자리에 가거나 어떤 지위에 가듯 시간은 순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연계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바뀌는 것을 허락하신다.

(4)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시정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큰 사건과 사건을 연결하시며 그 속에 우리를 두어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다.

라. 사람은 무엇이 먼저 자라는가?

(1) 당연히 사람은 육체가 먼저 자란다. 사람이 영적으로 어떤 고민을 하는 것은 적어도 사춘기는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이 없을 때에 우리의 몸체를 먼저 키우신다. 그런 후에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신다. 몸체가 없으면 생각은 어디에 담고 믿음은 어디에 담겠는가? 우리의 몸체가 다만 추상명사가 아니 듯 우리의 믿음도 추상명사가 아니며 우리가 실제로 삶에서 겪은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이 키워 주신 것이다. (반딧불)

(2)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급 되기 전에 그 수를 300만 정도가 되도록 키우신 것과 마찬가지 섭리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몸체를 키우는 동안 종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렇게 커진 후에 출애급 했을 때에는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스스로 생각을 해야 하는 인격자의 지위를 각각 부여받았다.

(3)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어있던 우리를 살리신 후 우리 믿음의 몸체를 이런 저런 방법으로 먼저 키우신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게 두지 않으신다. 우리 스스로가 믿음의 고민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여 하나님을 더 알게 되는 자리까지 강제로라도 끌어내신다.

(4) 인생도 이와 꼭 같다. 사람은 생각하려면 먼저 몸체(틀)가 있어야 한다. 몸체가 있은 후 생각을 하게 되며 생각을 하면서 인간은 어른이 되어 간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내가 겪은 모든 인생의 시간과 공간이 모두 모여 한 인격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며 하나님은 여기에 적극 개입하시어 나라는 작품을 만들어 가신다.

4. 결어

(1) 모세는 하나님께 대든다. 이 나이에 무엇을 제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괜찮다. 모세는 쉽게 이해를 못했지만 모세가 허송세월로 보냈다는 그 80년 때문에 모세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2) 당신은 위기에서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되려는가?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자가 되려는가? 아니면 인간성으로 어려운 사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려는가? 당신은 선택의 자유다. 다만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끝.